61화 : 붉은 새의 깃털 (2)
“이민하 씨! 정신 차려요! 이민하 씨!”
뒤에서 들리는 이신예의 목소리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마 안 일어날걸? 일어나도 아무것도 못 할 테고.”
“그게 무슨 말이지?”
“상처를 통해서 내 마비 가루가 들어갔으니 이제 저 인간은 싸울 수 없다는 뜻이지.”
모스 퀸은 한껏 여유로운 걸음으로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승리를 직감한 듯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조금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너희들 중에서 누가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지. 그래서 먼저 처리한 거야.”
“…….”
부정할 수 없었다.
아까 그 짧은 전투에서도 이민하는 내 앞에 서서 내 공격을 서포트해 주며 모스 퀸의 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모스 퀸의 입장에선 이민하가 가장 까다로운 적으로 보였겠지.
“이미 전투는 끝났어. 너희에게 남은 건 어떻게 죽는지 선택하는 것뿐.”
파앙- 파앙-
모스 퀸은 커다란 날개를 계속 움직이며 가루가 허공에 날리게 하고 있었다.
“상처를 통해 몸에 직접 들어가는 것보단 느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입으로 마신 마비 가루 효과가 나타날 거야.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신예 씨! 일단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세요!”
“땡! 그건 정답이 아니야. 이미 나가는 문은 막아 뒀으니까.”
젠장.
상황이 좋지 않다.
여기서 내가 죽으면 남아 있는 두 사람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스킬을 쓸 수 없는 지금, 새로 얻은 ‘이모탈’로 죽는 걸 막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부웅-!
“뭐야, 아까보다 공격이 허술해졌는데?”
나를 비웃으며 뒤로 물러나는 모스 퀸을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얼핏 보면 내가 모스 퀸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론 그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게 전부였다.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한 모양이지?”
“닥쳐!”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지.
부웅-! 붕!
에렌 셀을 쉴 새 없이 휘두르며 모스 퀸을 공격했지만, 그녀는 여유롭게 내 공격을 모두 피하고 있었다.
라이프 파워를 쓰지 않은 상태에선 네이비 라벨의 털끝조차 건드릴 수 없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콰앙!
“……!”
“이신예 씨!”
처음부터 내가 노리고 있었던 건 모스 퀸이 아니었다.
놈을 문 쪽으로 유도해서 내게 시선을 묶어둔 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고 싶었던 거니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신예가 이민하를 부축해서 밖으로 빠져나갔고, 구멍이 생기자 분진 가루도 조금씩 밖으로 나가서 아까보단 밀도가 옅어졌다.
“이 자식… 처음부터……!”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분한 표정으로 살벌하게 나를 쏘아보고 있는 모스 퀸을 살짝 약 올려 준 뒤 제대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이민하는 이신예가 어떻게든 해 줄 거라고 믿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두 사람이 다시 이쪽으로 올 때까지 버티는 것.
부웅!
모스 퀸이 날개를 크게 펄럭이자 주변의 분진 가루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좋아. 이런 것도 나름 재밌겠네.”
안개처럼 뿌옇게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분진 가루 속으로 모스 퀸이 모습을 감췄다.
모스 퀸이 말했던 것처럼 이곳에서 싸우는 것부터 우린 아주 불리한 위치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놈의 사냥터에 먹잇감이 스스로 들어온 것과 같으니까.
[피를… 피를 줘.]
피? 무슨 소리지?!
발렌이 말하는 것처럼 머리에 직접 울리는 목소리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발렌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
벽을 긁는 듯한 목소리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곧바로 발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씨. 진정해. 지금부터 냄새로 내가 놈의 방향을 알려줄 테니까.”
“발렌! 너……!”
“지금은 일단 이 싸움만 집중하자. 얘기는 여기서 무사히 나간 뒤에 하자고.”
발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방금 들은 목소리는 대체 뭐지?
“형씨, 정면에서 왼쪽에 있어. 온다!”
파앗!
“……!”
발렌의 말에 몸을 옆으로 비틀었고, 분진 가루 사이에서 튀어나온 모스 퀸의 날카로운 손톱이 스치고 지나갔다.
“반푼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파앗! 팟!
분진 가루로 모습을 감췄다가 기습하기를 반복했지만, 발렌이 있는 이상 내게 그녀의 공격이 닿진 않았다.
상황은 여전히 불리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나마 희소식이 있다면 모스 퀸의 분진 가루가 생각보다 치명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단숨에 목숨을 빼앗는 독 가루라던가, 마시는 순간 몸이 마비되는 치명적인 가루는 없었다.
확실히 계속 분진 가루를 흡입한 탓인지 아까보다 몸이 둔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형씨! 뒤쪽!”
카앙-!
몸을 비틀며 검을 휘둘렀고, 모스 퀸의 손톱을 막아냈다.
그녀는 아까보다 더욱 일그러진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상한 움직임이네. 마치 내가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는 듯한걸?”
“몸에서 그렇게 지독한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모르겠어.”
지금은 놈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군.
말하는 것만으로도 모스 퀸을 도발하고 혼자서 시선을 끌 수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모스 퀸에게 죽는 게 아니다.
모스 퀸의 손톱에 의해 상처를 입게 되면 온몸이 마비된다.
차라리 죽으면 부활해서 다시 올 수 있지만, 마비되는 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테니까.
“형씨, 잘 들어. 딱 한 번 내가 놈의 빈틈을 만들 수 있어.”
“뭐?!”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발렌의 목소리에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건 네가 나오겠다는 거야?”
“…맞아.”
단숨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발렌은 이미 한쪽 다리를 쓸 수 없는 상태고, 펫 시스템으로 발렌을 꺼내게 되면 10분 동안은 다시 넣을 수 없다.
확실히 발렌이 나와서 한 번의 공격은 성공시킬 수 있겠지만, 그 후로는 오히려 상황이 안 좋아질 가능성이 크다.
나는 발렌을 지키면서 싸워야 할 테니까.
“무리야. 이번엔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알고 있어. 그래도 괜찮아.”
“안 괜찮아! 상황이 더 악화된다고!”
“혼자서 중얼중얼 시끄럽네!”
카앙!
내가 발렌과 떠드는 걸 얌전히 기다려 줄 모스 퀸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모스 퀸의 공격을 받아내며 발렌을 말려야만 했다.
“고민해 볼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 좋을 게 없잖아!”
“기습 후에 내가 방해된다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지?”
“…….”
“그런 거라면 괜찮아. 나한테 생각이 있거든.”
발렌의 말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전투가 이어진다고 해도 내게 흐름을 가져올 방법은 없다.
모스 퀸의 공격을 지금처럼 흘리며 이민하가 다시 전장에 복귀하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그나마 모스 퀸이 밖에 있는 두 사람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발렌 말대로 기습에 성공하고 그 후에도 페널티가 없다면 흐름을 가져올 기회일지도 모른다.
“알겠어! 그럼 믿는다!”
카앙!
모스 퀸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검을 쳐올려 공격을 받아 냈다.
자연스럽게 모스 퀸의 팔이 위로 솟아올랐고, 그 타이밍에 발렌을 소환했다.
“발렌!”
자연스럽게 검을 손에서 흘렸고, 기다렸다는 듯이 발렌이 내 에렌 셀을 받아서 크게 휘둘렀다.
쌔에엥-!
무방비의 상태로 발렌의 공격을 받은 모스 퀸은 어깨부터 허리까지 대각선으로 긴 검상을 입었다.
“크아앗!”
처음 제대로 모스 퀸에게 공격을 먹일 수 있었다.
갑자기 내가 발렌을 소환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발렌은 오크라서 기본적으로 무지막지한 힘을 갖고 있다.
라이프 파워를 쓰면 내가 더 강하겠지만, 평소엔 발렌이 나보다 힘이 더 세다.
“오… 오크가 왜 여기서…….”
“형씨!”
다시 발렌에게 에렌 셀을 받은 나는, 아직 제대로 자세를 고치지 못한 모스 퀸의 배에 검을 쑤셔 넣었다.
[947!]
[10589/12990]
제법 높은 수치의 대미지였다.
무방비 상태로 공격을 받은 것도 있고, 모스 퀸이라는 몬스터 자체가 방어력이 약한 탓도 있겠지.
파앙!
당황한 모스 퀸은 서둘러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공격을 마치고 나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발렌에 깜짝 놀랐다.
“생각해 둔 게 있다며! 이제 어떻게 하면 돼?!”
“미안. 거짓말이야. 난 이대로 두고 형씨는 계속 싸우면 돼.”
“뭐?!”
발렌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페널티가 없이 전투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게 널 포기하라는 뜻이었냐?!
“너 미쳤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한쪽 다리가 없는 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오크라고. 여기서 이 정도 활약하고 죽을 수 있다면 만족이야.”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발렌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너답지 않게 왜 답답하게 굴어!”
발렌 앞에 서서 어디서 공격해 올지 모르는 모스 퀸을 경계했다.
여전히 주변은 분진 가루로 가득 차 있었고, 몸이 아까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않았다.
10분.
발렌을 다시 시스템에 넣으려면 10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서 버티는 것도 힘든데, 내가 발렌을 지키는 게 가능할까?
“형씨! 뭐 하는 거야! 여기서 비켜! 이러다 우리 둘 다 죽어!”
“닥치고 가만히 있어!”
“…….”
발렌에게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고, 발렌 역시 당황한 듯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몇 번이나 스스로 죽으려고 할 때마다 발렌은 있는 힘껏 나를 붙잡아 줬다.
이젠 내가 발렌을 잡아 줄 차례다.
문 쪽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둔 덕분에 흐릿하게나마 모스 퀸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큰 타격을 입었는지, 모스 퀸은 쉽사리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지 못했다.
“무사해?!”
“이민하 씨!”
이민하가 서둘러 우리 쪽으로 합류했고, 쓰러져 있는 발렌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발렌을 다시 초월 능력으로 집어넣으려면 10분이 필요해요. 그때까지만 버텨 보죠.”
이민하는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죽이기만 했던 오크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게 납득하기 힘든 거겠지.
곧바로 이신예도 다시 전장으로 복귀했다.
“상처에 마비 가루가 들어가서 치료하는 데 오래 걸렸어. 혼자 버티느라 고생했어.”
두 사람이 같이 있다면 10분은 충분히 버틸 수 있다.
문제는 아까처럼 모스 퀸이 방심하지 않는다는 건데…….
“어떻게 놈을 아래로 끌어내리죠? 오래 걸리긴 하지만, 분진 가루를 계속 마시면 몸이 아예 마비돼서 움직이지 않을 텐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내가 내려가기도 전에 너희는 죽을 테니까!”
촤앗!
모스 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고, 그와 동시에 우리 몸에 하얀 실이 감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누에들이 우리를 향해 실을 뱉어 내고 있었다.
“젠장! 모스 퀸만 경계하느라 전혀 몰랐어.”
주변이 분진 가루로 가득 차 있는 데다가 모스 퀸이 공중에서 우리의 시선을 빼앗은 상태였다.
애초에 다른 몬스터가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점점 감각이 둔해진 탓인가?!
“안 돼! 풀리지가 않아!”
실은 점점 우리를 강하게 옭아맸다.
[피… 피를 줘. 제발…….]
그리고 아까 들렸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머릿속에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