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프x9999-60화 (60/176)

60화 : 붉은 새의 깃털 (1)

“조금만 늦었어도 과다 출혈로 죽었을 거야. 일단 치료는 끝냈어. 하아…. 이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봐.”

발렌의 다리 쪽을 보고 있던 이신예가 내게 고개를 돌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살면서 내가 몬스터를 치료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솔직히 나도 치유계 헌터의 능력으로 몬스터까지 치료가 가능한지는 미지수였다.

당장 기댈 수 있는 게 이신예의 능력뿐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다짜고짜 오크의 부상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말이 돼?”

“그래도 이신예 씨는 들어주셨잖아요?”

빙긋 웃으며 말하자, 이신예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웃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지? 헌터는 몬스터를 죽이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반대로 몬스터를 살리려고 하다니… 사람들한테 알려지면 얼마나 큰 문제가 생길지 불 보듯 뻔하다고.”

“2년 전에 게이트에 갇혔을 때 만난 친구예요.”

“…제정신이 아니구나.”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이민하가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나도 발렌을 만나기 전에 다른 헌터가 몬스터와 친구라고 말한다면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헌터에게 있어서 몬스터는 가장 큰 적이자, 악이니까.

“우리가 이 오크 살리자고 위험을 무릅쓰고 게이트에 들어온 게 아니라고.”

이민하는 내게 상당히 화가 난 듯 보였다.

“그건 나도 동감이야. 처음엔 통신으로 너랑 연락을 해 보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이 게이트는 바깥과 연결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들어왔거든. 지금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 통신이 닿지 않아.”

통신이 안된다니… 통신계 헌터의 능력은 정해진 거리 안에서 텔레파시를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한 번도 통신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쩌면 던전 외부에 있는 게이트라서 생긴 이상 현상일지도…….

“이민하 씨도 A급 헌터시면 들어 본 적 있을 거예요. 2년 전에 하위층 게이트에서 데스나이트가 무더기로 나타나서 큰 혼란이 생겼던 일.”

“…설마?”

“맞아요. 그때 저도 거기에 있었어요. 정신을 차렸을 땐 다른 사람은 모두 사라지고 저만 게이트에 남아 있었지만.”

나는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주었고, 내 말을 듣고 있는 이민하의 표정은 연신 경악에 물들었다.

출구로 나갈 수 없다던가, 시간에 맞춰서 몬스터가 날 죽이기 위해 찾아온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겠지.

“그때 만난 게 바로 이 오크예요. 이 녀석은 신기하게 저희와 같은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녀석이었거든요.”

“뭐?! 오크가?! 아니… 하아… 이런 상황이라 말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겠네.”

“이름은 발렌이고, 제가 게이트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많이 도와줬어요.”

이민하와 이신예는 가만히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내 말을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 게이트에서 수백 번, 수천 번 죽을 동안 제 옆에 있어 줬던 건 오직 이 녀석뿐이었거든요.”

“하지만, 몬스터라면 말이 안 되잖아. 게이트 안에 있는 모든 몬스터를 사냥하지 않으면, 보스는 출현하지 않는다고.”

“제 초월 능력의 일부예요. 몬스터를 동료로 데리고 다닐 수 있는…….”

머리가 아픈지 한숨을 내쉰 이신예가 손을 내저었다.

“좋아. 일단 알겠어. 지금은 그런 것보다 이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부터 생각하자.”

“알겠어요.”

그녀 말대로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고, 이젠 좀 더 시간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밖에 있는 팀이 아침이 되면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했으니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잠깐, 그럼 두 분은 지금 출구로 나가셔서 합류하시는 게 좋지 않나요?”

이대로 우리가 게이트 공략하는 게 늦어지면 두 팀으로 나누어져 버린다.

우리 셋은 물론이고, 밖에 있는 팀까지 위험하게 만드는 상황이 되는 건 절대 원치 않는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믿기 힘들지만, 계속 부활하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셋이 같이 공략하면 더 빨리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죽어도 부활하는 것뿐이지, 네가 죽는 게 좋을 리 없잖아.”

이민하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자, 시간 없어. 빨리 움직이자.”

“…저래 보여도 마음은 따듯한 사람이네요.”

“뭐!? 내가 어떻게 보이는데!”

***

혼자 싸우는 것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과 함께 싸우는 건 수월했다.

[System : 블루 스톤x2 맹독x5 블랙 스네이크 가죽x2를 획득하셨습니다.]

이민하가 앞에서 블랙 스네이크의 공격을 모두 막아 줬고, 이신예가 견제해 준 덕분에 블랙 스네이크도 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윽… 역시 뱀은 징그러워.”

두 마리의 블랙 스네이크를 모두 처리하자 아래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이 생겼다.

“내려가기 전에 미리 말할게요. 지금이 아니면 나가지 못할 수도 있어요.”

“…….”

던전 외부에서 발생한 이 게이트 역시 기형 게이트라고 할 수 있다.

지하로 내려가는 순간, 위로 올라가는 길이 끊긴다거나 출구가 막히는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다.

“여기까지 와서 겁주려는 거야?”

“이제 보스 몬스터만 잡으면 되는데, 너만 두고 나갈 수 있을 리 없잖아. 빨리 끝내고 나가자고.”

두 사람의 당당한 모습은 생각보다 든든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길어서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만 했다.

다행히 위층에 있었던 것처럼 벽에 횃불이 걸려 있어, 어둡진 않았다.

“위에서 나온 몬스터가 케이브 웜이랑 블랙 스네이크, 그리고 에이션트 골렘이라는 거지?”

“네. 보스는 ‘모스 퀸’이에요.”

“뭐? 그걸 어떻게 알아?!”

이민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중간에 다른 층이 숨겨져 있었거든요. 거기에 이 게이트에서 출현하는 몬스터 종류와 정보가 적혀 있었어요. 룬 문자로.”

“룬 문자?! 그걸 읽었다고?”

“발렌이 읽어 줬어요.”

다시 한번 발렌의 이름이 나오자 두 사람은 당황한 눈치였다.

발렌을 펫 시스템에 들여보내는 걸 두 눈으로 보긴 했지만, 오크라는 몬스터가 사람 말을 하고 우호적이라는 것은 여전히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모스 퀸이면 네이비 라벨인데 우리 셋으로 가능할까요?”

“괜찮아, 할 수 있을 거야.”

이민하가 걱정스럽게 물었고, 이신예 역시 대답과 달리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 수준의 게이트는 A급 이상의 헌터 네 명이 팀을 짜서 들어오는 게 정상인데, 우리는 사람 수도, 전력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같이 싸우는 이상, 나도 초월 능력만 믿고 죽을 순 없게 됐다.

“그런데 그 이상한 옷은 뭐야?”

이번에 새로 얻은 검은 가죽 갑옷을 보고 이신예가 물었다.

“멋있죠? 원래 검은색이 잘 받거든.”

“이런 상황에서 잘도 그런 농담을 치네.”

사실 이 장비를 보고 있을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 던전이 공략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퀘스트를 받았을 때 출구를 통해서 나가는 게 정답이었다.

그랬다면 발렌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

결국, 내 욕심 때문에 발렌을 다치게 했다.

“최현. 정신 차려!”

“아… 죄송합니다.”

앞에 빛이 보이는데도 멍하니 계속 걷다가 이신예가 내 팔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커다란 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문틈 사이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모스 퀸은 분진 가루를 사용해서 적을 무력화시킨 뒤 공격하는 패턴이 많아.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분진 가루로부터 두 사람을 지키는 데 주력할 테니까,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쪽으로 가 보자.”

“네!”

이신예는 생각보다 리더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다른 팀원들과 함께 있을 때는 게으르고 얌전한 사람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선 전혀 다른 모습인걸.

“앞에서 시선을 끄는 건 내가 하고, 넌 뒤에서 조금씩 대미지를 쌓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민하의 탱킹 역시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허술해 보이는 팀이었지만, 탱커, 힐러, 딜러가 나름대로 갖춰진 팀이다.

콰앙!

문을 거칠게 밀치고 이민하가 먼저 진입했다.

아찔하고 고약한 냄새와 함께 방안 가득히 분진 가루가 채우고 있었다.

“쿨럭쿨럭.”

“최대한 입 가려!”

촤악!

작은 나이프를 꺼낸 이신예가 자신의 셔츠를 망설임 없이 찢어서 긴 천을 만들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다가와 입에 천을 감싸 주었다.

“감사해요.”

“임시방편일 뿐이야. 여기서 오래 싸우면 위험해.”

파악!

앞쪽에서 큰 날개를 펼치는 소리와 함께 모스 퀸이 분진 가루 사이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늘씬하게 뻗은 몸은 인간 여자와 비슷했지만, 모스 퀸의 피부는 푸른색이었다.

머리에는 더듬이가 자라 있었고, 백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큰 날개가 양옆으로 펼쳐져 있다.

“여기에 인간이 온 건 엄청 오랜만인데? 괜히 두근거리잖아.”

하이톤의 목소리가 모스 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오크나 고블린 같은 하위 라벨의 몬스터는 인간의 언어를 할 수 없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런 상위 라벨 보스 몬스터 중에선 간혹 이렇게 언어를 구사하는 녀석들이 있다.

이신예 말처럼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모스 퀸을 처리하고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우리가 먼저 분진 가루에 당해버리고 말 테니까.

씨익 웃고 있는 모스 퀸을 향해 이민하가 먼저 달려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체보다 큰 방패를 들고 있었으며, 왼쪽 손목엔 작은 방패를 하나 더 착용하고 있었다.

팔을 휘둘러 방패로 모스 퀸을 공격했지만, 모스 퀸은 가볍게 날개를 움직여 뒤로 피했다.

둘이 싸우는 틈에 모스 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분진 가루를 만들어 내는 날개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전투가 수월해질지도 모른다.

파앗!

“……!”

날개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지만, 모스 퀸이 그렇게 쉽게 당해 줄 리 없었다.

이미 거리를 좁힌 이상, 다시 모스 퀸과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쌔엥-! 쌩!

계속 검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나는 모스 퀸을 따라갔다.

옆에 있는 이민하도 내가 공격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모스 퀸을 압박해 주었다.

덕분에 모스 퀸이 내게 반격할 만한 여유가 없었고, 편하게 공격이 가능했다.

“간만에 온 인간들이라 기대했는데, 지루하네.”

그렇게 말한 모스 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의 날개에서 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물러나!”

이신예의 외침에 반응하기도 전에 새하얀 가루가 나와 이민하를 덮쳤다.

너무 많은 양이라 주변 시야가 가려질 정도였다.

“쿨럭쿨럭!”

천으로 감싼 것이 무색하게 비집고 들어온 가루는 내 목에 쌓이는 듯한 역겨운 감각이었다.

딱히 어떤 맛이나 냄새는 없었지만, 무언가 기도를 통해 내 몸으로 들어온다는 것부터가 싫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네!”

이민하의 목소리에 최대한 숨을 얕게 쉬며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입으로 들어오는 산소의 양이 적은 만큼 집중력도 흐트러지고 머리도 어지럽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굳이 지금 공격할 생각은 없거든. 어차피 너희는 다 죽은 목숨이거든. 이런 곳에서 나와 싸우려고 한 것부터가 자살행위라는 거지.”

다행히 이민하의 목소리를 쫓아 그녀와 등을 맞댈 수 있었다.

“이제 어떡하죠?”

“위험해. 이대로 있다간 정말 정신을 잃겠어. 일단 여기서 나가서…….”

그때 바로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우리 둘을 덮쳤다.

“말했잖아. 이미 다 죽은 목숨이라고.”

푸욱.

모스 퀸의 날카로운 손톱이 이민하의 배를 관통하는 게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