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13구역 (4)
“정신 차렸어?! 다행이다.”
“…다행은 무슨.”
죽고 부활해서 눈을 떴을 때 느껴지는 이 역겨운 감각은 변하지 않는구나.
동굴 통로 한가운데에 누워서 눈을 뜬 채로 일어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블루 라벨의 에이션트 골렘이 나오다니… 최악이네.
[최현 Lv.29
체력: 2950/2950 마나: 290/290 기력: 30/30
힘: 79 민첩: 38 지능: 38
(사용 가능 포인트: 12)
라이프 : 715개]
간만에 능력치 창을 열어보니 감회가 새로운걸.
지금까진 기본적인 전투 수련을 하기 위해 최대한 초월 능력을 떠올리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스킬 없이 싸우지도 못하는 놈이다.
아무튼, 최상층과 여기저기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쓰러뜨린 덕분에 라이프가 제법 올랐다.
나보다 강한 몬스터를 쓰러뜨려야만 라이프 개수가 늘어나지만, 아무래도 내가 대부분의 몬스터에 비해 낮은 수준으로 측정되는 모양이었다.
“겨우 라이프 좀 늘려 놨더니, 이번 게이트에서 다 쓰지만 않으면 다행이겠네.”
“에이션트 골렘이라는 놈은 강한 놈이야?”
발렌의 말에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강한 수준이 아니지. 아까 봤잖아. 골렘은 둔한 움직임과 튼튼한 몸이 특징인데, 에이션트 골렘은 그 둔한 움직임이 없어. 오히려 다른 몬스터보다 빠르다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에이션트 골렘이 출몰한다는 것은 보스 몬스터는 그 이상이라는 건데, 과연 700개 정도의 라이프로 이곳을 공략하는 게 가능할까.
애초에 여기에 온 것부터가 객기였던 걸까.
“형씨는 할 수 있다고! 절대 불가능할 것 같았던 그곳에서도 당당하게 살아서 나왔잖아.”
발렌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분명 거기서도 내가 데스나이트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나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강제로 게이트에 갇혀서 살아남기 위해 버티고 있었던 것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직접 뛰어든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렇네. 그땐 수천 번 죽어도 다시 싸우곤 했는데, 겨우 한 번 죽은 거로 기죽을 순 없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쭉 늘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다 좋은데 문제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자연 지형이라면 어떻게든 표시를 남겨서 지형을 파악할 수 있을 텐데, 모든 곳이 다 똑같이 생긴 동굴에선 도저히 방향을 읽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일단 표시를 해 둬야겠네.”
카가각!
들고 있던 에렌 셀로 벽에 크게 숫자 ‘1’을 적어 놓았다.
여기서부터 1번 구역으로 하자.
그나마 다행인 건 이쪽에도 벽에 횃불이 걸려 있어서 주변이 밝다는 점이었다.
만약 빛까지 없었다면 진즉 포기하고 나갔을 거다.
“형씨! 앞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뭐?!”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인간보다 감각이 뛰어난 오크니까 내가 듣지 못하는 것도 들을 수 있다.
검을 들고 앞에 겨누며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온다!”
쿠구구궁!
바닥이 들썩거리는 걸 보고 땅 밑에서 무언가 내게 다가온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케이브 웜!”
바로 앞에서 튀어나온 케이브 웜은 이름처럼 동굴에 사는 지네 몬스터다.
지네라고 하기엔 온몸에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어서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그린 라벨인 케이브 웜은 그렇게 까다로운 몬스터는 아니었다.
공격 패턴도 단순하고 파괴력도 약해서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다.
다만, 수많은 가시와 끈질긴 생명력 때문에 성가신 놈이었다.
“아까 몸도 풀었으니까 이제 제대로 싸워 볼까?”
“몸을 풀었다고 하기엔 두들겨 맞기만 했는데?”
“…시끄러.”
라이프 파워.
스킬을 사용하자마자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뜨거운 힘이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스으읍.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검을 꽉 움켜쥐었다.
타앙-!
나를 잔뜩 경계하고 있던 케이브 웜은 내가 앞으로 도약하는 것과 동시에 몸을 웅크렸다.
가시를 세워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하는 게 케이브 웜의 특징이었다.
새까만 가시들이 나를 노리고 날카롭게 서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콰직!
“끼에에엑!”
동굴에 케이브 웜의 비명이 시끄럽게 퍼져나갔다.
검을 수직으로 휘둘렀지만, 베었다기보단 내리찍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가시가 너무 많아서 놈의 피부까지 벨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차라리 타격으로 대미지를 입히는 게 나았다.
[5522/6340]
대미지가 나쁘지 않은걸.
한 방에 체력을 800 가까이 깎았고, 방금 공격으로 케이브 웜은 방어 자세를 취한다고 해도 대미지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거다.
“형씨! 뭔가 예전이랑 검 휘두르는 느낌이 다른데?!”
“예전이랑 같으면 오히려 내가 섭섭하다고.”
부끄럽지만 검을 제대로 휘두르는 법조차 모르고 있었던 나였다.
검귀 할아버지에게 검을 휘두르는 수련법을 배우고 나선 한동안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검만 휘둘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적어도 이 초월 능력에만 기대서 기초도 없는 헌터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런 수련을 하니 확실히 대미지라는 수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타격은 들어갔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야.”
“뭐?! 이런 느낌이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케이브 웜은 다른 몬스터에 비해서 체력 회복속도가 굉장히 빠르거든.”
[5611/6340]
잠깐 떠드는 사이에 금방 100 정도의 체력을 회복한 걸 보고 인상이 찌푸려졌다.
무시무시한 생명력을 가진 놈이라 전투를 길게 끌고 가면 내 기력이 버티지 못한다.
무기의 내구도가 깎이는 것도 나름 스트레스였다.
지금부터 단숨에 놈을 처리하는 수밖에!
“키엑!”
이번엔 가시들을 전부 앞쪽으로 세워서 미친 듯이 나를 향해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가시로 내게 타격을 입히는 게 전부지만, 마비 독이 발라져 있어서 가시에 닿으면 위험하다.
어떻게든 사냥감을 마비시킨 뒤에 가시로 뒤덮인 기다란 몸으로 상대를 옭아매서 천천히 죽이는 게 놈의 사냥법이다.
물론 빙결의 갑옷을 두르고 있는 내게 가시의 마비 독이 닿을 가능성은 적지만, 그래도 굳이 당해 줄 필요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거든!
“목란.”
파앙-!
“……!”
방금 뭐지?!
어떻게 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내가 예전에 봤던 서진욱의 자세와 가장 유사한 느낌이었다.
정확하게 돌진해 오는 케이브 웜의 머리를 꿰뚫었고, 손에 찌릿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이번 감각을 까먹지 않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방금 내 움직임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형씨! 아직 놈이 죽지 않았다고.”
검이 머리통을 꿰뚫었지만, 케이브 웜은 아직 살아서 팔딱거리고 있었다.
“…이게 최강의 검술인가.”
[3367/6340]
내가 그냥 대미지를 입혔을 때보다 무려 3배 가까운 파괴력이었다.
제대로 숙련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괜히 최강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아닌가 보군.
다시 한번 내 초월 능력과 현실은 별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케이브 웜은 여전히 체력이 반이나 남은 상황이었지만, 머리가 한 번 꿰뚫린 탓에 놈은 방향을 잃고 날뛰는 것밖에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친 듯한 생명력 덕분에 이대로 두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오겠지만, 나는 그걸 기다려줄 만큼 자애롭지 못했다.
콰직! 콰직! 콰악-!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쉬지 않고 검을 내리쳤고, 케이브 웜의 체력은 착실하게 깎여나갔다.
[System : 그린 스톤x1, 검은 가시x3, 마비 독침x1 케이브 웜의 고기x1을 획득했습니다!]
[Level Up!]
[최현 Lv.30
체력: 3050/3050 마나: 300/300 기력: 30/30
힘: 80 민첩: 39 지능: 39
(사용 가능 포인트: 14)
라이프 : 710개]
아무래도 레벨업까지 경험치가 아주 조금 남은 상태였던 모양이다.
케이브 웜을 잡자마자 레벨이 30으로 올랐고, 그와 동시에 다른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 새로운 스킬 ‘이모탈’을 획득하셨습니다!]
제법 간지나는 스킬 이름에 바로 스킬창을 열어서 어떤 스킬인지 확인했다.
[Active - 이모탈 Lv.1
10분 동안 죽지 않는 불멸의 상태가 된다. 체력이 0이 되면 라이프가 1이 소모되며 부활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 쿨타임 24시간]
이건 쓸 만한데?!
스킬 설명을 보자마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이모탈’이라는 스킬은 원래 내 능력이 가진 리스크를 줄여 주는 스킬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체력이 0이 돼서 죽으면 10분 뒤에 랜덤 지역에서 부활한다.
그런데 이 이모탈이라는 스킬을 사용한 상태로 체력이 0이 되면 죽지 않고 라이프만 1개 소모하며 부활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거다.
즉, 다른 곳으로 강제 이동되지도 않고, 10분이나 죽어 있을 필요도 없었다.
“앞으로 쓸모가 많겠어. 좋은 스킬이야.”
항상 내가 죽는 건 괜찮았지만, 죽어 있는 동안 다른 팀원이 위험에 빠지는 게 딜레마였다.
이 스킬은 그런 딜레마를 없애 줄 수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축하해, 형씨!”
“드디어 30레벨인가. 그래도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구나.”
검을 다루는 것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고, 초월 능력도 꾸준히 성장 중이다.
일단 지금은 당장 닥친 일에 집중해야지.
“그럼 이제 다시 에이션트 골렘이랑 싸우러 가는 거야?”
“이 게이트를 공략하려면 결국, 그놈들을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어. 아직 라이프 파워가 남아 있는 상태니까 서둘러서 아까 그놈들을 찾아보자.”
잠시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던전에 들어온 지 1시간 정도인가.
남은 시간은 7시간.
그 안에 이 게이트를 공략하고 밖으로 나갈 수 있으려나.
문제는 이 인조 동굴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까 그 골렘을 찾기 위해서 몇 시간을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직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생각 없이 뛰어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형씨! 이쪽은 빛이 이상한데?”
“그러게. 푸른빛?”
지금까진 동굴 벽에 있는 횃불만이 유일한 빛이었기에 주황빛에 의지해서 이동했다.
그런데 동굴 옆쪽에서 보이는 푸른색 빛에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코너를 도는 순간, 동굴 벽에 새겨진 크고 많은 룬 문자가 나를 반겼다.
“이건… 엄청난데?!”
벽에 적혀 있는 모든 문자가 푸른색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가만히 문자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고, 홀린 것처럼 벽에 다가갔다.
그리고 벽에 손을 대는 순간, 방금까지 빛을 뿜어내던 문자가 단숨에 빛을 잃었다.
“뭐야!?”
괜히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에 황급히 벽에서 떨어졌고, 혹여나 함정 같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그런 걱정과는 달리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System - 퀘스트 - 던전 안에 있는 ‘검은 새의 비명’이라는 책을 찾으십시오. 보상-검은 새의 깃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