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13구역 (2)
바리케이드 틈 사이로 누군가의 손이 보였다.
“괜찮으세요?!”
“안쪽에 갇혀 있어요. 도와주세요.”
남자의 목소리에 나와 이민하의 손이 더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통과할 만한 공간이 생기고 나서야 안에 있는 남자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는, 팔에 깁스를 한 상태였다.
“덕분에 살았어요. 이런 꼴이라 혼자서 치우질 못하고 있었거든요.”
“다행이네요. 혹시 안에 다른 사람들도 있나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그가 고개를 떨구자, 이민하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저희가 찾아볼 테니까 아래로 내려가서 쉬고 계세요. 의사분들께 기본적인 진료는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래층으로 그를 보낸 뒤에 그가 나온 곳으로 우리가 들어갔다.
생각보다 3층은 깔끔한 상태였고, 병실을 하나씩 돌기 시작했다.
원래 목적이었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는 것과 혹시 모를 다른 생존자를 찾기 위함이었다.
“긴장 늦추지 마.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민하 말대로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기습해 올지 알 수 없다.
밤이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전부였기에 지하에서 사용하던 헤드 랜턴 빛에 의지해서 3층을 돌아다녔다.
병실마다 갖춰져 있는 냉장고에 제법 먹을 게 많았고, 입원했던 환자들 먹을 것도 적지 않았다.
“3층엔 아무도 없네요.”
“차라리 다행이지. 일단 먹을 것만 챙겨서 내려가자.”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서 빠져나가 안전 구역으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현재 상황에선 무리였다.
우리 전력으로 이 사람들을 지키면서 몬스터를 뚫는 건 불가능하니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랬군요. 다행이네요.”
“……!”
내려오자마자 보인 낯익은 얼굴의 주인은 차윤지였다.
“무사하셨군요!”
“그건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나를 발견하고도 그녀는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
혼자 신나서 그녀에게 달려간 게 머쓱해질 정도였다.
“뭐, 너는 어떻게든 여기까지 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크게 걱정은 안 했어.”
어떤 의미든 간에 차윤지에게 ‘믿었다’라는 말을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찡한 느낌이었다.
“야, 너 너무 티 내는 거 아니야? 우리도 있다고.”
뒤에서 노골적으로 째려보고 있는 이신예의 말에 내가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차윤지 씨가 무사하다면 두 분도 당연히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죠.”
뭐,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련하시겠어.”
“장수주 씨도 무사하셨군요!”
어쩐지 상당히 지친 얼굴이었지만, 여기까지 무사히 왔다는 게 가장 중요한 거다.
“하하, 두 분이 잘 지켜 주셨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괜찮으세요?!”
“아, 네.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안쪽에 간이침대가 있으니 일단 거기서 쉬시죠.”
의사 중 한 사람이 그녀를 데리고 안쪽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차윤지 일행에게 대충 이곳에 대한 설명을 해 줬다.
“그래서 이분들이 너랑 같이 여기까지 와 주셨다고?”
이신예가 그렇게 물으며 이민하와 공명준에게 시선을 옮겼다.
“네. 두 분 다 실력이 뛰어난 헌터분들이에요.”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차윤지 일행이 오고 나서부터 이민하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했다.
뭐랄까… 지금까진 자부심 넘치는 터프한 헌터였는데, 갑자기 아이돌 팬으로 변한 것 같은 눈빛이랄까.
“호… 호… 혹시… 차윤지 씨? 그 빨간 망토 차윤지?”
“…….”
차윤지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미세한 움직임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이민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흐윽… 팬이에요!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역시 좋은 일을 하면 상을 받는군요.”
그렇게 나 도와주는 거 질색했으면서…….
나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그녀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설마, 옆에 계신 분은 신월의 화타…! 이신예 씨?!”
“화… 화타?”
주변에서 누군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그 빨간 망토랑 악수를 하다니.”
자신의 손을 얼굴에 문대는 이민하를 보고 머리가 아파졌다.
이런 상황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은 플래그라고.
“자자, 그럼 이제 진짜 대책을 세워 봅시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강유성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재 저희가 가진 식량은 이곳에 있는 게 전부입니다. 사람 수를 봤을 때 나눠서 먹는다면 대략 5일 정도는 버틸 수 있겠군요.”
“문제는 버티는 게 음식만이 아니라는 거죠.”
이신예의 말대로다.
던전에서는 계속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던전과 비교적 가까운 이곳은 언제 다른 몬스터에게 기습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당장에라도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즉,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곳에서 바깥 상황이 진정되길 기다리는 게 첫 번째, 그리고 우리가 직접 안전 구역인 베이스캠프까지 이동하는 게 두 번째 선택지군요.”
“가능성만 놓고 본다면 첫 번째가 좀 더 안전한 선택지이긴 한데, 두 번째 선택지를 선택하면 기회비용이 너무 커.”
“기회비용이요?”
이신예의 말에 이민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에 있는 헌터는 총 6명. 심지어 SS급 헌터까지 있잖아요. 그렇다면 바깥에서 그만큼 부담해야 하는 전투가 많아진다는 의미예요. 상황이 발생한 초기에는 대응이 가장 중요한데, 그 시간 동안 여기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는 건 상당한 손해죠.”
확실히 현실적인 얘기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다르게 말하면 바깥에서 다른 사람을 지킬 수 없다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을 지키며 보이지 않는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다.
“이상적인 답안지는 여기서 나가 베이스캠프에 합류하는 것이겠지만, 위험 부담이 커요.”
“그래도 나는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
모두의 시선이 차윤지에게로 집중되었다.
지금은 차윤지의 말이 가장 중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SS 헌터라는 타이틀도 있었지만, 그녀가 작전을 거절한다면 실행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여기 있다고 확실하게 안전한 것도 아니고, 5일 후에 다른 헌터들이 주변을 정리해서 안전해진다는 보장도 없어. 오히려 더 위험해질 확률도 있고.”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저희가 속해 있던 블랙 유니콘이 이 근처에서 안전 구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곧 여기까지 올 가능성도…….”
이민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며 차윤지의 눈치를 살폈다.
“인원은 대략 15명. 그중 6명이 헌터. 전력이 그렇게 부족하진 않다고 생각해. 그리고 우린 얘도 있으니까.”
차윤지의 손가락 끝이 나를 가리켰고, 순식간에 시선이 내 쪽으로 이동했다.
갑자기 모두의 시선을 받은 나는 당황해서 연신 눈을 굴렸고, 이민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여차하면 미끼로 쓴다는 뜻이죠? D급치곤 실력이 괜찮긴 했지만, D급은 D급이라고요?”
한껏 나를 비웃고 있는 이민하를 보고 차윤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제대로 싸우는 걸 못 봤나 보네. 뭐, 상관없지. 아무튼, 내 의견은 우리가 이동하는 게 좋다고 봐.”
어쩐지 조금 화가 난 듯한 차윤지의 말투에 이민하는 멀뚱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역시 차윤지의 의견에 동감한다.
헌터는 결국 계속 선택을 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가능성을 좇는 게 당연했다.
아까 유니콘 길드가 있던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지키면서 이동하더라도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다.
“그럼 저희가 이동하는 것으로 하죠. 물론 억지로 저희와 함께 가자고 하진 않겠습니다. 따라오실 분만 따라오세요.”
이신예 다운 말이었다.
여기 남아서 구조를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문제는 자신이 선택하는 게 옳으니까.
“일단 오늘 밤은 위험하니까 날이 밝으면 이동할게요. 그때까지 함께 가실지, 이곳에 남으실지 고민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대충 정리가 끝나자마자 다들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이런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니 다들 고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
이동하던 우리가 전멸하고 여기 남아 있던 사람들이 무사히 구조될 수도 있는 법이다.
던전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모든 것은 정상과는 거리가 멀어졌으니까.
“오빠… 우리 괜찮아?”
내 옷자락을 꽉 쥔 율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건 내가 아닌, 이신예였다.
“오빠를 하나도 안 닮아서 너무 귀엽게 생겼네.”
“그게 무슨…….”
“걱정하지 마. 저기 있는 언니가 엄청 강하거든. 그리고 네 오빠도 쓸만하고.”
가볍게 나를 무시한 이신예는 제법 능숙하게 율이를 달래 주고 있었다.
이신예의 부드러운 미소에 율이도 진정됐는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식량은 사람 수에 맞춰서 나누도록 할게요. 손이 남는 분은 도와주세요.”
이신예는 자기 말만 하고 바로 다른 일을 하러 가버렸다.
방금까지 바깥에서 전투를 치르다 온 사람으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씩씩한 모습이었다.
차윤지랑은 다른 의미로 대단하단 말이지.
“그래서? 둘 중 누군데?”
“…뭐?”
방금까지 걱정하고 있던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빠 마음속에 있는 여자친구가 누구냐고.”
“그게 무슨 소리야! 여자친구는 무슨!”
“하여간, 재미없긴.”
재미는 무슨…….
누가 아빠 딸 아니랄까 봐 성격이 빼다 박았네, 빼다 박았어.
뭐, 둘 다 워낙 미인에다가 실력도 뛰어난 헌터들이고…….
아니지, 지금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야, 그런데 너는 어떻게 저 대단한 사람들이랑 아는 사이냐?”
“네? 그건…….”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민하가 말을 가로챘다.
“알겠다! 네가 위험할 때 저 둘이 구해 준 거구나. 하긴, 그런 게 아니라면 D급이 어떻게 SS급이랑 아는 사이겠어.”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건데.
실력은 좋은 방패수지만, 성격은 상당히 짜증 나네.
“여러분! 여기 좀 와 보세요!”
안에서 쉬고 있던 장수주가 다급하게 소리쳤고, 사람들은 놀라서 그녀가 있던 방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에요?!”
“이건……!”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이곳에 있는 다른 헌터들도 나와 같은 충격을 받았을 거라 단언할 수 있다.
방구석에 생긴 일렁거리는 푸른색은 지금까지 우리가 자주 봐 왔던 것이었다.
“이건… 게이트 입구?!”
“……!”
게이트를 처음 본 사람들도 우리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던전 밖에서 게이트가 열린다는 건 지금 상황보다 최악의 상황이 남아 있다는 걸 의미했다.
“다… 끝이야.”
털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