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13구역 (1)
쿠웅! 쿵!
우리를 발견한 오우거가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5층 건물만 한 덩치를 가지고 있으니 움직일 때마다 주변이 흔들리는 건 당연했다.
크기로만 따지면 네이비 라벨은 될 것 같은데 오우거는 옐로우 라벨에 불과하다는 게 여전히 믿기 힘들었다.
“후욱… 후우욱…….”
“…아무리 봐도 상태가 이상하잖아요. 술이 들어간 초콜릿 좀 먹었다고 사람이 저래요?!”
비틀거리면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공명준의 모습은 거뜬히 소주 3병은 비운 사람 같았다.
“술에 조금 약하거든.”
“저게 조금 약한 겁니까?!”
공명준이 오우거를 향해 일자로 겨누고 있는 검 끝이 쉴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진짜 시끄럽네. 가만히 보고 있으라니까.”
타악!
그는 갑자기 검을 손에 꽉 쥐었고, 떨리던 검 끝은 조금의 떨림도 사라졌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오우거가 우리를 향해 들고 있던 몽둥이를 내리쳤다.
두 사람을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언제든지 공격을 받아칠 수 있도록 나도 자세를 잡았다.
월하백화식은 아직 전혀 익히지 못한 상태라 이런 실전에서 쓰기엔 부담스러웠다.
“……!”
방금까지 비틀거리던 취객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인 자세였다.
오히려 제정신일 때보다 더 안정적이었다.
“명준이는 평소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든. 저 녀석이 자기 실력을 100% 발휘하는 건 취했을 때뿐이야.”
“캐릭터가 확실하네.”
쎄앵!
빠르다!
그의 검은 내리치는 오우거의 몽둥이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대로 우리보다 커다란 몽둥이가 두 동강이 나버렸고, 오우거는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아까 미노타우르스랑 싸우면서 명준이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자세는 좋은데 휘두르는 게 어설프니까.”
“보통 제정신일 때 자기 실력을 발휘하는 거 아닌가요?”
“쟨 반대야. 긴장을 엄청 하는 성격이거든. 실력은 좋지만, 실전에선 긴장 때문에 제대로 발휘를 못 해. 하지만 취하면 달라지지.”
파앗-!
단숨에 오우거와 거리를 좁힌 공명준은 오우거의 주먹을 피하면서 재빠르게 놈의 다리를 공략하고 있었다.
그의 검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속도’다.
복잡한 움직임도 없었고, 그렇다고 검술 자체가 파괴력이 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단순한 직선 움직임이었기에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귀검’이라고 불렸던 할아버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특이한 캐릭터네요.”
“그렇지?”
평소엔 매일 꾸벅꾸벅 졸면서 긴장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가, 실전 상황만 되면 긴장돼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 하다니…….
심지어 술에 취하면 본 실력이 나오는 건 특이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둘의 전투는 보는 사람이 싱거울 정도였다.
오우거는 매번 헛손질할 뿐, 한 번도 공명준에게 공격을 먹이지 못했다.
반대로 공명준의 공격을 착실하게 오우거에게 대미지를 쌓았고 무난하게 쓰러뜨릴 수 있었다.
여유가 있는 거로 봐선 그 역시 제대로 본 실력을 다 보여 준 것 같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역시 A급은 다른가.
S급이나 SS급을 주변에서 봐 온 탓인지 두 사람의 실력이 내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아까보단 든든하게 느껴졌다.
“자, 시간 없으니까 빨리 와!”
이민하가 보채자, 공명준은 서둘러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공명준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꾸벅꾸벅 졸면서 우리 뒤에 따라붙는 그의 모습은 일부러 그런 컨셉을 만든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거의 다 왔어. 곧 병원이야.”
이쪽은 나도 율이 병원 때문에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눈에 익은 풍경이었지만, 몬스터 때문에 난리가 난 거리는 내가 알던 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옆에는 원래 내가 나오기로 했던 지하철역이 보였다.
시간상으로는 차윤지 일행이 더 일찍 도착하는 게 맞는데, 지하에서 계속 전투가 벌어졌다면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평소라면 차윤지 걱정은 하지도 않았겠지만, 앤트 라이온에게 당했던 걸 생각하면…….
“이대로 바로 병원까지 뛸 거야. 만약 따라붙는 놈들이 있으면 병원 앞에서 정리한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싸우느라 가까이도 못 갈걸.”
“알겠습니다.”
건물 뒤쪽에서 몸을 숨기고 주변을 살피며 진입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이곳은 게이트와는 다르다.
수많은 건물이 시야를 가리고, 환경과 상관없는 몬스터들이 공격해 오니 예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차윤지가 당했던 것도 그 때문이겠지.
만약 우리가 있던 곳이 사막 환경의 게이트였다면 그런 빈틈을 만들지 않았을 거다.
어쨌든 지금은 차윤지와 이신예를 믿는 수밖에.
“뛰어!”
“네!”
이민하의 신호와 함께 병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의 이목이 끌렸고, 빠르게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 파악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라벨이 높지 않은 몬스터가 대부분이었다.
가장 높은 녀석은 그린 라벨인가.
“먼저 가! 내가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 테니까!”
“네?! 하지만……!”
“빨리!”
이민하가 방패를 들고 몬스터들을 막아섰고, 그녀의 오더에 나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단숨에 병원 앞까지 달려온 나는 출입구를 밀쳤지만, 안에서 막아 놨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쿵쿵!
“어떻게 하죠? 부수고 들어갈까요?”
내 물음에 공명준은 뒤에 있는 이민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몬스터들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 내던 이민하는 우리 쪽으로 다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부수죠.”
바로 검을 뽑아서 문을 향해 내리치려는 순간, 문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오빠?!”
“일단 들어오세요!”
율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하마터면 눈물까지 날 뻔했다.
“안으로 들어가!”
뒤따라온 이민하가 가장 먼저 건물로 들어갔고, 멍하니 있던 나와 공명준도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이 다시 입구를 막았다.
콰앙! 쾅!
몬스터가 문 쪽을 공격하는 소리에 검을 손에 꽉 쥔 채 언제든 공격할 준비를 했다.
“…….”
“갔나 봐요.”
“후우…….”
오우거 같은 놈들이 근처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들어오진 못했을 거다.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으로 입구를 막아 놓은 덕분에 소형 몬스터들의 힘으로는 부수지 못한 것 같다.
“오빠!”
바로 내게 안겨 오는 율이를 보고 지금까지 함께 있어 주지 못한 죄책감이 한 번에 휩쓸려 왔다.
“괜찮아?! 안 다쳤어?!”
“응. 괜찮아. 여기 있는 분들 덕분에 살 수 있었어.”
이곳엔 성인으로 보이는 사람 10명 정도, 그리고 아이 2명이 있었다.
“몬스터가 날뛰자마자 입구를 막고 건물 안쪽에 숨어 있던 탓에 무사할 수 있었어요.”
30대쯤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내게 와서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도 헌터인가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 저는 최현이라고 합니다.”
얼굴은 나이가 있어 보이는데 그의 체격이나 몸은 나보다 더 좋아 보일 정도였다.
“반가워요. B급 헌터인 강유성입니다.”
“이분이 여길 지켜 주셨어.”
율이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강유성이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지키다뇨. 그냥 간단한 조치를 했을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냄새는…….”
“병원용 에탄올이에요. 몬스터는 사람을 보면 공격해 오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그랬군.
입구를 저렇게 막아 버리고, 이렇게 에탄올을 뿌려 놓으면 몬스터에게 들킬 위험이 없다.
놈들은 시각과 냄새로 사람을 찾으니까.
“아, 혹시 저희 말고 다른 헌터가 오진 않았나요?”
“네? 아뇨. 이런 일이 발생하고 나서 저희는 바로 바리케이드를 쳤고, 그 이후로 들어온 건 여러분이 처음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시간이 늦어지는 건 상관없었지만, 혹시라도 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이 됐다.
“바깥 상황은 어떤가요?”
강유성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그에게도 소중한 사람들이 있을 테니 여기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게 상당히 힘들었겠지.
“최악입니다. 몬스터들은 마구잡이로 도시를 파괴하고 있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헌터 협회는 일단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곳곳에 안전 구역을 만들고 그곳에서부터 몬스터를 토벌하기 시작했지만, 쉽게 정리되진 않을 겁니다.”
“…역시 그렇군요.”
지금 가장 급한 일은 여기 있는 사람들을 안전 구역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다.
그 후는 아직 생각하고 싶지 않다.
전력은 A급 둘과 B급 하나, 그리고 D급 하나인가.
근처에 있는 몬스터가 잘해 봐야 그린 라벨이라 다행이지만, 만약 그보다 상위 몬스터가 기습해 온다면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힘들다.
던전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기 시작했을 땐 상위 몬스터가 대부분이었다.
블루 라벨과 네이비 라벨이 가장 먼저 나왔고, 그 후로 아래 라벨의 몬스터가 던전에서 도시를 습격했다.
그래서인지 던전과 비교적 가까운 이곳엔 하위 몬스터만 남은 것 같군.
내 입장에선 다행이지만, 다르게 얘기하면 상위 몬스터는 더 먼 곳까지 이미 가 버렸다는 거니까 끔찍한 상황인 건 사실이다.
“식량은 어느 정도 있나요?”
“여긴 병원이라 저희가 평소에 먹는 음식이랑 간단한 간식거리밖에 없습니다. 병실 쪽을 뒤져 보면 환자들이 두고 간 음식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병원치곤 남아 있는 사람이 적네요.”
이민하의 물음에 한 의사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밖이 난리가 나자마자 다들 놀라서 뛰쳐나갔어요. 건물 안이라도 몬스터에게 안전하진 않다면서…….”
“원래 3, 4, 5층이 모두 병실인데 위쪽이 몬스터에게 공격받아서 무너져 내린 탓에 지금은 3층까지만 올라갈 수 있어요. 그 위쪽에 있던 사람들은…….”
“…….”
이내 정적이 흘렀다.
이곳에 있던 사람들도 우리처럼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건가.
“일단 그럼 3층에 가서 먹을 게 있나 찾아보도록 하죠.”
“2층에서 3층으로 가는 계단을 막아 놨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그쪽에 몬스터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저랑 이 녀석이 같이 올라갔다 올게요. 다른 분들은 여기 계세요.”
이민하가 내 뒷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괜찮아! 금방 갔다 올게!”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율이에게 손을 흔들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몬스터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으니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지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닥에서 기습해 올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늘에서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
언제라도 반응할 수 있도록 몸의 감각을 최대한 곤두세웠다.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절대 아무도 죽게 하지 않을 거니까.”
빙긋 웃고 있는 이민하의 말은 내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녀의 실력을 직접 봐서인지 이보다 든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2층 계단에 쌓여 있는 책상과 침대를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고, 이제야 위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조금씩 보였다.
“사… 살려… 살려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