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아포칼립스 (4)
정신을 차리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초월 능력들은 여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혹시 부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남아 있었으니까.
정신을 차리고 몸을 벽 쪽에 기대며 주변을 살폈다.
부활한 직후에는 몸이 욱신거리고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잠시 쉴 필요가 있었다.
게이트는 한정된 공간이었기에 부활해도 어차피 게이트 안이었지만, 이렇게 밖에서 죽어본 적은 없어서 현재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 범위가 세계까지 이어질까 걱정했지만, 주변이 초토화되어 있는 것과 한글 간판이 보이는 거로 봐선 그다지 멀리 오진 않은 것 같다.
“당신, 괜찮아요?”
어느새 한 중년의 여자가 내 옆으로 다가와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색 곱슬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그녀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여기! 한 사람 있어!”
“괜찮습니다. 혼자 움직일 수 있어요.”
“…다행이네요. 다치진 않았어요?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걸 보면 헌터인 것 같은데.”
숨을 돌리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근육을 풀어 줬다.
“D급 헌터인 최현이라고 합니다.”
“최현…? 혹시 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최준’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 성함은 왜…….”
“오! 역시! 네가 그 녀석 아들이었구나!”
그녀는 진심으로 반가웠는지 환하게 웃으며 내 머리에 손을 올려 잔뜩 헝클어뜨렸다.
“만나서 반가워. 나는 ‘오민선’이라고 해.”
“……! 오민선 씨라면 ‘블랙 유니콘’ 길드의 마스터?!”
“나를 알고 있구나? 영광인데? 일단 여긴 위험하니까 다른 곳에 가서 얘기할까?”
오민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은 급하게 가야 할 곳이 있어요. 혹시 지금 여긴 어디죠? 지도가 필요해요.”
내 말을 듣고 있던 오민선이 방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표정으로 변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살기에 나도 모르게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너, 소속은? 이런 상황에서 혼자서 움직인다고? 위에서 허가가 떨어진 거야?”
“…하나씩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비켜 주세요.”
나와 그녀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켜 냈다.
“좋아. 그럼 일단 어디를 왜 가야 하는지만 말해.”
“여동생이 병원에 있는데 그사이에 이런 일이 터졌어요. 다른 동료랑 같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몬스터 기습을 받아서 떨어지게 됐고요.”
오민선은 잠시 고민하다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널 막는다면? 개인적인 이유로 헌터가 협회의 허가도 없이 움직일 수는 없어. 더군다나 이런 상황이라면 헌터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절실하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야 해요.”
내가 에렌 셀을 들고 그녀에게 겨누자 그녀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주변에 그녀의 동료로 보이는 다른 헌터들이 무기를 꺼냈고, 오민선은 손을 들어서 그들을 제지했다.
“하여간, 막무가내인 건 자기 아빠를 똑 닮았구나. 가는 걸 막지 않겠지만,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우리 길드원을 데리고 같이 가도록 해. 협회에는 내가 얘기할 테니까.”
예상치 못한 오민선의 말에 검을 내렸다.
“갑자기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죠?”
“음, 왜냐고 물으면 네가 최준의 아들이니까? 그리고 여동생이라면 그 아이는 최준의 딸이겠지? 난 너희 아빠랑 친구였거든.”
빙긋 미소를 짓는 오민선은 전혀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지도 가져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지도를 받은 오민선이 내 앞에 펼치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야. 이쪽이 던전이고. 네 목적지는 어디야?”
다행히 병원과 크게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오히려 아까 지하철도에 있던 곳보다 가까웠다.
죽은 뒤 10분 동안 움직이지 못했으니까 차윤지 일행도 거의 도착했을지 모른다.
“여기예요. 가깝네요.”
“좋아. 민하가 같이 갔다 와 줘.”
“네?!”
오민선 옆에 있던 민하라는 여자는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하아, 나도 마음 같아선 혼자 가고 싶거든!
그렇게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으면 상처 받거든!
“부탁할게. 아 참, 명준이도 괜찮으면 데려가도 돼.”
“하아… 알겠어요. 가자, 공명준.”
“네.”
그녀는 나를 쏘아보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나는 오민선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그녀를 따라갔다.
“나는 ‘이민하’, 그리고 이쪽은 ‘공명준’. 소개 끝.”
둘 다 나와 비슷해 보이는 또래였는데, 이민하는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있었다.
금발을 하나로 질끈 묶은 이민하는 노골적으로 나를 싫어하는 티를 냈다.
그리고 뒤에 있는 공명준은 그녀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키가 크고 허리에 긴 검을 착용하고 있는 그는, 걸으면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는 최현이라고 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도와주긴! 마스터 오더니까 어쩔 수 없이 온 거거든!”
“…그렇군요.”
굳이 저렇게 소리를 지를 필요가 있나.
“돌려 말하거나 예의 바르게 말하는 건 잘 못 하니까 미리 말해 둘게. 나는 네가 싫어. 겨우 D급 헌터면서 자기 사적인 일 때문에 다른 헌터에게 검을 겨누는 것도 그렇고, 너 때문에 내가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짜증나.”
“죄송합니다.”
그녀 말이 맞았다.
잘못된 걸 모르고 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그 무엇보다도 율이의 안전을 확인하는 게 중요했고, 그걸 위해서라면 다른 건 뭐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야, 공명준! 너도 뭐라고 말해 봐.”
“…빨리 끝내고 가서 잘래. 졸려.”
개성 넘치는 조합이네.
“결국, 마스터도 본인 사적인 일에 우리를 투입한 거니까 나중에 제대로 따질 거야.”
등에 커다란 방패를 매고 있는 걸 보면 이민하는 방패수인 것 같았다.
체구가 그리 큰 편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혹시……?
“혹시 이민하 씨도 초월 헌터인가요?”
“맞아. 잠깐, 이민하 씨도? 그럼 너도 초월 헌터라는 거야?”
이민하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고, 당황한 내가 입만 뻥긋거렸다.
“하긴, 초월 헌터인데 D급일 리 없지.”
예리한 건지 아닌 건지 도통 모르겠군.
어쨌든 우리는 병원을 향해 착실하게 전진했다.
차윤지 일행과 이동했을 때는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이동했지만, 내가 부활한 곳은 병원의 북쪽이었기에 그 세 사람을 다시 만날 일도 없었다.
병원 북쪽은 대체로 정리가 됐는지 몬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여긴 이미 몬스터 사냥이 끝난 건가요?”
“던전에서 계속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있으니 끝났다고 하긴 어렵지. 아포칼립스가 선포되고 나서 우린 바로 이쪽부터 정리했거든.”
이동하면서도 이민하는 주변을 경계하며 몬스터의 기습을 주의하고 있었다.
투덜거리면서도 물어보는 건 다 대답해 주네.
“두 분 다 블랙 유니콘 소속의 길드원이신 거죠?”
블랙 유니콘은 신월 길드처럼 최상위 길드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는 유명 길드였다.
인원이 적고 실력이 뛰어나서 소수 정예라는 느낌이었다.
“땡, 나랑 공명준은 다른 길드야.”
“네? 그럼 어째서 오민선 씨의 오더를 받은 거죠?”
“이런 긴급 상황에선 소규모 길드는 대형 길드에 합류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되거든. 내가 속한 길드는 겨우 4명인 길드니까 어쩔 수 없지.”
4명이라니, 그렇게 적은 인원으로도 길드를 만들 수 있구나.
“물론 길드원이 많은 게 여러모로 이점이 많지만, 우리 길드처럼 수가 적으면 항상 같이 공략하러 다니면서 서로에게 완벽하게 맞출 수 있거든.”
어렴풋이 그녀가 말하는 게 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이 싸워 온 시간이 길수록 전장에서 좋은 호흡을 보여 줄 수 있다.
네 명이고 서로 계속 함께해 왔다면 그건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우리 길드는 완전 강하거든!”
씨익 웃고 있는 이민하는 진심으로 자신의 길드에 자부심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스릉.
“……!”
갑자기 공명준이 검을 뽑았고,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엔 몬스터가 있었다.
“미노타우르스!”
“D급! 자기 몸은 알아서 지켜!”
“최현이라고요!”
정면에 나타난 미노타우르스는 총 3마리.
그린 라벨 하위 몬스터로 그렇게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들은 아니다.
3m 남짓한 키에 큰 덩치, 그리고 소와 인간은 합쳐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위는 나, 그리고 공명준이랑 D급이 뒤에서 지원한다.”
“확인.”
공명준은 방금까지 졸고 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단숨에 미노타우르스와 거리를 좁힌 이민하가 방패를 위쪽으로 들어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미노타우르스의 묵직한 도끼가 방패를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쩌엉-!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고, 그걸 신호탄 삼아 나와 공명준이 그녀 뒤로 따라붙었다.
이민하에게 시선이 집중된 사이, 우리가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다.
“……!”
카앙!
미친 듯이 덤비는 미노타우르스의 공격을 이민하가 깔끔하게 막아 내고 있었다.
앞에서 방패로 놈들의 도끼를 막는 건 물론이고, 까다로운 위치에 있으면 밀쳐 내서 우리가 좀 더 공격하기 편하게 만들어 줬다.
지금까지 다른 방패수를 많이 만나 봤지만, 그녀만큼 능숙한 방패수는 보지 못했다.
그에 비해서 공명준은 어설픈 감이 있었다.
검을 쥐는 것도, 휘두르는 것도 묘하게 어설퍼서 이상한 느낌이었다.
분명 자세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데 휘두르는 게 허접하다고 해야 하나.
“이걸로 마지막!”
[System : 그린 스톤x3, 날카로운 도끼x1 미노타우르스의 심장x2 뾰족한 뿔x3을 획득했습니다!]
딱히 내가 활약할 틈도 없이 미노타우르스 세 마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오, 뭐야? D급치곤 나쁘지 않은데?”
물론 스킬을 쓰지도 않았고, 일부러 적당히 힘을 빼고 싸웠다.
굳이 내 실력을 이 두 사람에게 과시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이후로 또 전투가 벌어질 때를 대비해서 미리 둘의 실력을 확인해 두고 싶었으니까.
“하아암, 얼른 가죠.”
방금 전투에선 다른 사람이 되어 있던 공명준이 원래대로 돌아온 졸린 표정으로 말했다.
도통 알 수 없네.
이민하가 말한 대로 두 사람의 길드가 강하다면, 공명준도 제대로 실력을 보여준 게 아닌가?
“…저기 혹시, 두 분은 헌터 등급이 어떻게 되시나요?”
여차하면 두 사람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게 가장 확실했다.
내 말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이민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리 둘 모두 A급이야. 왜? 그렇게 안 보여?”
“아… 아뇨. 그냥 궁금해서.”
“하긴, 평소에 이 녀석 실력이 A급 헌터와는 거리가 멀지. 마침 잘됐네. 한 번 보여 줄까?”
그렇게 말한 이민하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고, 그곳엔 오우거가 보였다.
옆에 있는 건물만 한 크기의 오우거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이민하는 여유롭게 웃음을 띠고 있었다.
“명준아, 초콜릿 먹을래?”
“먹을래.”
눈이 반쯤 풀려 있는 공명준에게 이민하가 정말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뭐 하는 거야?
한입에 초콜릿을 먹어 치운 공명준의 상태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뭐… 뭘 먹인 거예요?!”
몸을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지 못하는 공명준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후욱… 후욱…….”
“직접 봤잖아? 평범한 초콜릿이야. 다만, 알코올이 조금 들어갔을 뿐.”
이민하는 그렇게 말하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