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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x9999-50화 (50/176)

50화 : 아포칼립스 (2)

가장 먼저 내 앞에 나선 도끼를 든 남자는 듬직한 덩치에 검은색 숏컷을 하고 있었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다른 두 사람도 비슷한 또래였다.

“저도 싸울 수 있습니다.”

뒤로 빠져 있으라는 말에 인상을 구기며 말했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앞에 있는 이 몬스터는 데스나이트라는 녀석으로 무려 블루 라벨인 놈이죠. D급 헌터가 상대할 만한 잔챙이가 아닙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힘을 보태고 싶으신 건 이해하지만, 괜히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그들은 내가 D급 헌터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 버린 듯했다.

조금 짜증 나도 별로 상관은 없겠지.

이렇게 당당한 걸 보면 이 세 사람이면 데스나이트 정도는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나는 다른 몬스터를 처리하러 가는 게…….

“어디를 가려는 겁니까?!”

“네? 당연히 다른 곳을 도우러…….”

“지금 밖은 위험천만합니다. 평소에 당신이 다녔던 그런 게이트와는 차원이 다르단 말입니다.”

“…….”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물론 내가 D급 헌터인 건 사실인데, 평소에 내가 다녔던 게이트와 차원이 다르다고?

난 이런 데스나이트 놈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살다 나왔다고!

“후우…. 아무리 저희라고 해도 블루 라벨인데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B급인 저희 셋이 힘을 모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요.”

“네!”

이내 세 사람은 큰 기합과 함께 앞에 있는 데스나이트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곳에서 시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것뿐.

“크아악!”

다른 몬스터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중,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고개를 휙 돌리자 데스나이트와 싸우던 헌터 한 사람의 팔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파… 팔이…! 내 팔이……!”

다른 두 사람은 데스나이트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지만, 제대로 먹히지 않는 모습이었다.

젠장! 그 잠깐 사이에 이렇게 된 거냐고!

라이프 파워!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나는 데스나이트에게 서둘러 달려들었다.

카가각!

에렌 셀이 데스나이트의 옆구리를 매섭게 쑤셨다.

[-415]

[5421/7189]

7189, 낯익은 숫자였다.

그렇게 많은 데스나이트와 싸웠으니 놈의 체력이 익숙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체력이 깎여 나가는 수치가 보이는 걸 봐선 내 초월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 보군.

“위험해! 빠져 있으라고 했잖아!”

나를 본 헌터 중 한 사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누군가 다친 상황에서 더 이상 이 짜증 나는 녀석들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데스나이트랑 싸워 본 적 있으세요?”

“뭐?! 그건… 없지만, 너 같은 D급 나부랭이가 낄 자리가 아니라고!”

우리가 떠들든, 말든 데스나이트는 다시 거리를 좁혀 달려들었다.

부웅-!

하지만 나는 놈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할 수 있었다.

보통의 헌터는 놈의 공격을 피하기가 무척이나 버거웠지만 나는 미운 정이 들 정도로 지독하게 놈과 싸웠기에 이런 일쯤, 간단했다.

“뒤로 물러나 계세요. 방해되니까.”

“……!”

데스나이트 앞에 서서 제법 거만한 소리를 내뱉자, 다른 헌터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표정을 구겼다.

방금 잠깐의 전투로 두 사람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들만으로는 데스나이트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실력이 좋은 B급 헌터 세 명이라면 데스나이트를 이겼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세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니 내 말에도 반박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거리를 두고 있는 거겠지.

“개죽음이라고! D급 따위가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야.”

“그렇지 않을걸.”

“……!”

나 대신 대답한 건 익숙한 목소리였다.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리자 차윤지가 평소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빠… 빨간 망토?!”

“괜찮으세요? 힘드시겠지만, 정신을 잃으시면 안 돼요.”

뒤쪽에서는 이신예가 아까 팔을 잘린 헌터를 봐주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쪽이 우선이다.

아무래도 차윤지는 거들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건 내 쪽에서도 썩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보여 줘.”

“…많이 놀라실 겁니다.”

나는 씨익, 미소를 지은 뒤 곧바로 데스나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라이프 파워가 발동된 상태였기에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다.

물론 아슬아슬하게 반응하는 정도였지만.

카앙!

놈의 공격을 옆으로 흘려보내자마자 검으로 다리를 훑었다.

방어를 기본으로 하면서 공격을 하려고 하니 치명상을 입히기 힘드네.

[-117]

적은 대미지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데스나이트와 마주하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었다.

처음 게이트에 갇혔을 때는 그저 공포의 대상이었던 데스나이트가 이제 전투력 측정기로 쓰이고 있었다.

“뭐야, 저 움직임…. 정말 D급 맞아?!”

“저런 무거운 갑옷을 입고 데스나이트 속도를 따라가고 있다니…….”

먼저 왔던 다른 헌터 두 사람이 내 전투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 거짓말한 건 아니니까.

괜히 차윤지가 뒤에서 보고 있다는 것에 신경이 쓰여서 몸이 근질거렸다.

혼자서 수련한 게 전부였지만, 어떻게든 뭔가를 차윤지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쐐액!

매섭게 내 목을 노리고 데스나이트의 검이 쏘아졌다.

나는 다급히 몸을 옆으로 꺾었다.

공격을 완벽히 피하지 못해서 목 쪽에 붉은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덕분에 데스나이트의 빈틈을 완벽히 잡을 수 있었다.

제1공식, 목란.

파앙-!

“……!”

역시 서진욱이 썼던 것에 비하면 내가 사용한 건 기술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이었다.

목란은 팔과 검이 일직선이 되도록 하여 적을 찌르는 기술이었다.

정교함이 더해진다면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아직 나는 기술을 한 번 보고 따라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원래 위력을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819]

“뭐?!”

예상치 못한 대미지에 나도 깜짝 놀랐다.

데스나이트가 반응하지 못한 채 정확히 급소에 맞았다곤 하지만 이 정도의 대미지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 느낌과 감각을 잃지 않도록 최대한…….

잠깐 손의 감각을 되새기는 사이 단숨에 데스나이트의 검이 나를 덮쳐 왔다.

카가가각!

어느새 내 옆으로 날아온 차윤지의 검이 데스나이트의 검을 흘려보냈다.

“아직 적이 앞에 있는데 뭐 하는 거야?”

“아…….”

“방금 그 기술은 서진욱 아저씨?”

차윤지는 시선을 데스나이트에게 고정한 채 물었다.

“아. 맞아요. 어쩌다 보니 검술을 배우고 있거든요.”

“그래서 아까 같이 왔던 거구나.”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데스나이트를 향해서 빠르게 돌진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파앗!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빨라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매섭게 쏘아대는 차윤지의 검에 데스나이트의 공격은 닿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니, 닿기는커녕 허공에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런 데스나이트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쿠웅-!

차윤지의 초월 능력인 ‘간파’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녀가 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블루 라벨의 데스나이트는 금방 바닥에 쓰러졌다.

“여전히 엄청나시네요.”

“너도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는걸.”

스르릉.

차윤지가 검을 집어넣으며 뒤쪽에 있는 이신예에게 걸어갔다.

그사이에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헌터 둘이 아까와는 다른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너, 정말 D급 헌터가 맞는 거야?”

“실력도 그렇고, 그 빨간 망토랑 이런 대화를 할 정도로 친한 사이라니…….”

“등급은 어디까지나 등급일 뿐이니까요.”

이 녀석들과 굳이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나 역시 오래간만에 만난, 이신예를 향해 다가갔다.

“괜찮은가요?”

“절단면이 깔끔하고 잘린 직후라서 다행히 붙일 수 있었어.”

“저… 정말 감사합니다.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데스나이트에게 잘려 나간 팔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자연스럽게 붙어 있었다.

이신예 역시 S급 헌터였으니까.

통신계와 치유계, 두 가지의 능력을 가진 데다가 실력도 좋은 그녀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당신들은 저쪽에 있는 베이스캠프에 합류하세요. 그쪽에 가면 협회에서 지시를 내려 줄 겁니다.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니까 서두르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B급 헌터 세 사람은 이신예가 가리킨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나는 이신예에게 제대로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그러게. 이런 상황에서 만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야.”

“그보다 베이스캠프라니, 협회에서 만든 건가요?”

확실히 원래 쓰던 헌터 협회는 던전 1층에 있으니 그대로 사용하기에 너무나 위험했다.

더군다나 일반인을 보호해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 그다지 좋은 위치는 아니겠다.

“응. 임시로 만든 곳이야. 어쨌거나 상황을 진정시키려면 안전 구역이 필요하니까.”

던전을 공략할 때랑 같은 구조였다.

먼저 정리된 곳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그곳에서부터 점점 영역을 넓혀 안전지대를 확보한다.

“…상황이 진정될지는 모르겠지만.”

차윤지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높게 솟아 있는 던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상황은 최악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던전 입구에서만 몬스터가 쏟아진다면 그곳을 막으면 되겠지만, 던전 중간중간에 있는 외부와 연결된 문을 통해서도 몬스터가 뛰쳐나오고 있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악화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이런 상황이라면.

넓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싸우는 것보단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몬스터의 시선을 유도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어차피 몬스터들은 인간을 공격하기 위해서 움직이니 괜한 동선 낭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현재 ‘아포칼립스’가 선포됐어. 이 도시에서 나가는 곳은 모두 막힌 상태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들은 이미 빠져나간 것 같아.”

“아…! 저 잠시……!”

순간 머릿속에 율이가 떠올랐고 급히 폰을 꺼냈다.

그러나 통신이 터지지 않는다는 표시가 뜨는 걸 보고 속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여동생이 병원에 있어요. 가 봐야겠어요.”

곧장 몸을 돌려 움직이려는데, 내 팔을 차윤지가 잡아챘다.

“혼자선 위험해. 데스나이트 같은 놈들이 여러 마리가 달려들면 죽을 거야.”

“죽어도 상관없어요! 시간이 없다고요!”

젠장, 몬스터들이 나오고 얼마나 지났지?

하필이면 오늘은 율이가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간 날이었다.

“알았어. 그럼 같이 가.”

“뭐?! 차윤지! 넌 이 주변을 정리해야 하잖아!”

“이미 이쪽은 피난이 끝난 곳이라 몬스터의 수가 적어. 그리고 가는 길에 만나는 몬스터는 모두 처리할 거니까 괜찮아.”

차윤지의 말에 무언가 말하려던 이신예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내가 널 어떻게 말리겠어. 알겠어. 같이 가자.”

평소라면 두 사람에게 미안해서라도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여기서 티격태격할 시간이 없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이라면 누구보다도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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