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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x9999-49화 (49/176)

49화 : 아포칼립스 (1)

“다들 자리에 앉으시죠. 최현 씨도 일단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갈색빛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긴 윤서훈은 안경을 살짝 올리며 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엇보다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점이 의외였다.

“제가 이름을 알고 있어서 놀라신 모양이군요. 이쪽에선 이미 최현 씨가 유명 인사거든요. 앞으로는 스스로도 인지를 하고 계시면 좋을 겁니다.”

“…….”

내가 그렇게 유명해졌다고?

초월 헌터가 주목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한데, 아직 D급밖에 안 되는 내게 관심을 갖는 건 역시 서진욱의 제자이기 때문인가.

“S급 이상의 헌터만 소집했지만, 이곳에서 하는 이야기 중 대외적으로 숨겨야 하는 건 없으니 계셔도 상관없습니다.”

“…칫.”

뒤에서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래서 저희를 부른 이유가 뭡니까?”

“아직 인원이 다 모이지 않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현재 던전은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몇 년 전부터 등장한 이형의 게이트들과 던전 내부에서 생긴 이상 현상들은 던전이 불안정하다는 증거였죠. 그래서 저희 협회에선 던전을 주시하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인력을 배치해 뒀습니다.”

이형의 게이트…….

나를 한참이나 가둬 버렸던 그 게이트도 이형의 게이트 중 하나였다.

게이트의 변화는 헌터들에게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했다.

그로 인해서 헌터 자체를 그만둔 사람도 많았다.

헌터 협회의 입장에서 이형의 게이트는 영 까다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30분 전부터 던전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게이트가 이형의 게이트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

정적과 함께 모두가 경악에 빠졌다.

이형의 게이트는 하나만 발생해도 공략하는 데 애를 먹는데, 던전 안의 게이트가 모두 이형으로 변하다니…….

윤서훈은 잠시 우리 반응을 살피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게이트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환경과 형태를 갖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정찰은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공략에 관해선 아직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잠깐. 그럼 우리 S급 헌터들을 모은 이유가 이형의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서인가요?”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고 물었고, 윤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크가 큰 만큼 실력이 좋은 헌터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틀 뒤면 브루탈의 밤이 일어났던 날로부터 정확히 10년이 됩니다. 던전이 불안정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여러분도 상시 대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윤서훈의 말에 순식간에 헌터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이형의 게이트에 들어가서 공략하라고 하는데 반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물론 이번 게이트 공략에 참여해 주시는 분들께는 충분한 보상을 드릴 겁니다. 부디 힘을 빌려주시길 바랍니다.”

고개를 숙이는 윤서훈을 보고도 다들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헌터들이었기에 큰돈을 준다고 해도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정찰이 끝난 게이트는 몇 개죠? 일단 필요한 정보는 모두 저한테 보내 주세요. 제가 공략할 만한 게이트를 뽑아서 다시 보내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서진욱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고, 윤서훈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헌터가 게이트를 공략하고 몬스터와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형의 게이트가 부담되는 것도 이해하지만, 과거 던전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수많은 헌터가 목숨을 걸고 게이트 공략에 들어갔죠.”

서진욱은 회의장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겁이 나신다면 빠져 계셔도 좋습니다. 제가 다 공략할 테니까요.”

“…….”

서진욱다운 도발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도발했던 게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로 인해서 장내 분위기는 더욱 살벌하게 변했다.

그걸 느낀 서진욱이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최현 씨도 저와 같이 게이트 공략에 들어가시죠.”

“아…. 네.”

서진욱은 나를 데리고 바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정말 괜찮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게이트들을 다 공략하는 건 무리가…….”

“괜찮을 겁니다. 저기 있는 분들은 잔재주로 S급 헌터가 된 게 아니니까요. 이런 도발을 받으면 참을 수 없겠죠.”

어쩐지 서진욱은 이 상황이 즐거운 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하여간 이 사람도 성격이 이상하단 말이지.

“지금부터는 저를 따라서 게이트 공략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제가 싸우는 걸 유심히 보시고 월하백화식을 익히세요.”

“네?! 하지만 월하백화식을 배우기 위해선 처음에 본 것으로 테스트에 통과해야 했던 거 아닌가요?”

내 물음에 서진욱은 씁쓸한 표정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러고 있을 여유는 없는 것 같네요. 저는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헌터를 은퇴할 겁니다.”

“……?!”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멈춰 섰다.

SS급 헌터 중에서도 최강의 자리에 있는 그가 은퇴라니…….

내겐 너무나 현실감이 떨어지는 말이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제 병은 점점 더 저를 갉아먹고 있어요. 지금도 사실, 전처럼 움직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며 전투를 하게 된다면 몸 상태는 더욱 악화될 게 뻔하죠.”

“그렇다면 상황을 설명하고 이번 일에선 빠지시는 게…….”

“제가 빠진다면 다른 헌터들도 갈피를 못 잡고 이 위기를 넘길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헌터로서의 제 자부심과 긍지가 걸린 문제기도 하고요.”

이게 1인자라는 호칭의 무게인가.

오늘따라 항상 든든해 보였던 그의 어깨가 한없이 약해 보였다.

“무엇보다 최현 씨에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한창 성장하고 있는 최현 씨가 지금까지 없던 게이트들을 경험해 보고, 제가 월하백화식을 직접 사용하는 것도 본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처음에 그를 의심하고 경계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서진욱은 올곧은 사람이었다.

머릿속에 정말 ‘헌터’라는 단어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자. 그럼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서…….”

“마스터! 큰일입니다.”

바로 게이트 공략을 위해 이동하려던 찰나, 그의 집사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지금 게이트의 몬스터들이 던전 외부로 유출되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어째서……!”

“상급 몬스터들이 나와서 경비대가 손을 쓰지 못한 것 같습니다.”

헌터가 던전 공략을 시작한 이후로 몬스터가 던전 밖을 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과거 브루탈의 밤에도 몬스터들은 던전 내부에서만 날뛰었다.

애초에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였나?!

“민간인들이 말려든다면 상황은 심각해져요. 최대한 빨리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사실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상위 몬스터와 싸울 수 있는 헌터의 수는 정해져 있었다.

심지어 이형 게이트가 던전에서 잔뜩 발생한 지금, 낮은 층에서도 상위 몬스터가 나오는 것도 가능했다.

모든 층에 그만한 인력을 배치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가능하다고 해도 놓치는 몬스터는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던전 안에서는 한정된 장소에서 싸울 수 있지만, 던전 밖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것은 몬스터의 처리가 상당히 까다로워진다는 뜻이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 몬스터를 서둘러 처리해야 합니다. 따라오세요!”

협회는 던전 1층이었기에 바로 밖으로 나가면 몬스터를 금방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린 허겁지겁 던전 밖으로 나왔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최악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콰앙-! 쿠웅.

“키에에엑!”

“꺄악!”

던전 최상층이 천국으로 보일 정도로 이곳은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누군가의 비명이 끊이질 않고 들려왔다.

“아무래도 저희가 같이 다닐 여유는 없겠네요. 최현 씨는 이쪽으로!”

나는 서진욱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인벤토리에서 장비를 꺼내서 착용하자, 익숙한 이곳에서 장비를 입고 있다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에렌 셀의 감각이 선명해졌다.

저번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서 하루에게 받은 보상이었다.

그 이후로는 내 수준에 맞는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 제대로 사용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살려 줘!”

카앙-!

데스나이트는 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검을 내리찍으려다가 내 에렌 셀의 공격이 막히고 말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내 뒤에 있는 남자는 반 토막 났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몸만 벌벌 떨었다.

“정신 차리세요! 어서 여기서 벗어나 던전과 최대한 빨리 떨어지세요.”

“네…. 넵!”

남자는 떨리는 다리를 움켜쥐고 일어나 뛰어가기 시작했다.

“후우…….”

하필이면 처음 만난 게 또 데스나이트인가.

언제쯤 이 녀석과의 질긴 악연을 끊어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남자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했지만, 그건 내게 하는 말과 같았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주변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굉음 때문에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쐐엑-!

“……!”

멍하니 있을 여유는 없었다.

데스나이트의 매서운 검이 내 옆을 훑고 지나갔고, 황급히 자세를 다잡았다.

꿀꺽.

몇천 번을 마주했던 데스나이트였지만,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던전 밖에서 죽어도 내 능력이 힘을 발휘할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통신계나 치유계 헌터들이 던전 밖에서도 능력을 쓸 수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내 능력은 시험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무서울 수밖에.

“형씨, 나도 같이 싸우게 해 줘.”

“그건 안 돼!”

쩌엉-!

묵직한 데스나이트 검을 받아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널 밖으로 꺼낼 순 없어.”

“하지만……!”

발렌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다.

이렇게 몬스터가 도시를 활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헌터가 발렌을 발견한다면 발렌이 헌터에게 공격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지금은 눈앞에 있는 데스나이트를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라이프 파……!”

“위험해!”

스킬을 사용하려던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내 앞을 막아선 남자는 큼지막한 도끼로 데스나이트를 후려쳤고, 그 덕에 데스나이트는 뒤로 쭉 밀려났다.

“괜찮아요?!”

“아…. 네.”

갑자기 내 앞으로 나선 세 사람은 아무래도 헌터들인 것 같았다.

“헌터인가요? 등급은?”

“D급입니다.”

만나자마자 내 등급을 물어본 탓에 홀린 듯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는 내 말을 듣고 피식 웃더니 도끼를 들어 올렸다.

“D급은 뒤로 빠져 계세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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