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월하백화식 (3)
끼이익-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철문이 열리면서 간만에 빛이 내 눈을 적셨다.
그의 배려 덕분에 바깥이 밤일 때 나올 수 있어서 눈에 큰 대미지를 받진 않았다.
“일주일 동안 동굴 안에만 있었던 경험은 어떤가요? 이제 조금 괜찮아지셨나요?”
빙긋 웃고 있는 서진욱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외면해 왔던 고통을 한꺼번에 느끼고 왔습니다. 확실히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진심이었다.
두려워서 외면하고 있던 기억들을 마주했고, 전처럼 괴롭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요. 일단 오늘 하루는 푹 쉬시고, 내일부터는 진짜로 월하백화식을 가르쳐 드리도록 하죠.”
그가 안내해 준 저택의 내부는 부자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굉장했다.
우리 집보다 훨씬 큰 욕탕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 소변기도 거대했다.
전문 마사지사에게 마사지를 받고, 먹어 본 적 없는 특식을 먹은 뒤, 드디어 침대에 누웠다.
매일같이 동굴의 딱딱한 바닥에서 자다가 전혀 딴판인 침대에 누웠더니 오히려 이질감이 느껴졌다.
“월하백화식이라…. 이걸 익히면 정말 강해질 수 있을까?”
“1인자의 검술이라며. 당연히 강해지겠지.”
강해지고 싶었다.
누구든 지킬 수 있게 되면 그녀에게 찾아가서 다시 한번 사과하고 싶었다.
편안한 침대 위에서 어떤 잡생각도 없이 오래간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월하백화식. 이름 그대로 달 아래에 피어 있는 백 송이의 꽃과 같은 검술입니다.”
“…그게 대체 무슨 검술인데요?”
“잔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운 검술. 그게 바로 월하백화식이죠.”
최강이라고 불리는 검술의 이름치고는 너무 낭만적인 건 사실이었다.
서진욱은 거의 혼자서 활동하는 헌터이다 보니 그 검술을 본 사람이 애초에 몇 없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궁금한 걸 참기 힘들었다.
“먼저 월하백화식은 총 6개의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개의 공식, 2개의 수식으로 이루어져 있죠. 상황에 따라서 공식과 수식을 써서 적의 공격을 받아치거나, 적을 공격해서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그럼 월하백화식은 6가지의 기술밖에 없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어떤 식을 먼저 쓰고 그 후에 어떤 식을 이어서 쓰는지에 따라 전투의 흐름이 달라집니다. 즉, 식의 조합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많은 형태의 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스르릉.
그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고 저번과 달리 그의 검 끝은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직접 앞에서 보는 것만큼 좋은 건 없습니다. 여기로 와서 서 보시죠.”
서진욱이 준 목도를 들고 그의 앞으로 이동했다.
“먼저 제1공식, 목란.”
쐐액-! 파앙!
그의 검 끝이 순식간에 내 옆을 스쳐 지나갔고 묵직한 공기가 뒤이어 따라왔다.
“보시다시피 목란은 찌르기 기술입니다. 손목을 접으며 튕겨내듯 단숨에 힘을 토해 내는 게 특징이죠.”
반응은커녕 제대로 기술을 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만약 이런 기술을 쓰는 적을 만났더라면 나는 방금 여기서 한 번 죽었을 것이다.
“다음은 제2수식, 연화”
수식이라는 것에 눈치껏 목도를 들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캉!
“……!”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그의 검 끝이 내 검을 쳐서 움직이는 걸 막아 버렸다.
“연화 역시 찌르기 기술이지만, 연화는 적의 힘의 중심인 부분을 제압해서 공격의 흐름을 끊는 기술이죠. 다음은 제3공식, 앵화입니다.”
서진욱은 마지막 제6수식까지 모두 내게 보여 줬다.
모든 기술이 내게 충격을 안겨 줄 정도로 엄청났다.
아니, 그냥 보기에는 엄청나지 않았기에 더욱 크게 와닿았다.
월하백화식은 멀리서 보면 평범한 검술에 불과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직접 느끼는 검술은 굉장히 섬세하고 예리했으며 확신이 담겨 있었다.
“여기까지가 월하백화식입니다. 몸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지요. 지금부터는 스스로 검술을 익혀야 합니다.”
“네? 그게 무슨…. 아직 한 번밖에 보여 주지 않으셨잖아요!”
“월하백화식을 배우기 위해선 먼저 스스로 익혀야 합니다.”
“무슨 그런 억지가…. 그런 건 검술 천재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요!”
내 말에 빙긋 미소를 지은 그가 대답했다.
“어째서 월하백화식이 최강인지 아시겠습니까? 검술의 내용은 물론이고, 전수하는 방식조차도 최강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애초에 천재가 아니라면 익힐 수 없도록 하는 거군요. 하…. 천재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검술이라는 건가.”
묘하게 짜증이 나서 인상이 구겨졌다.
하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그건 이 검술과 나 사이에 있는 기묘한 투쟁심.
검술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월하백화식은 확실히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검술이었다.
검술 자체는 단순했지만, 그 움직임 속엔 수많은 이유가 담겨 있었다.
“6개의 식 중에서 4개의 식에 성공하면 전수자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 후에는 제가 자세히 다시 가르쳐 드릴 테니 안심하시죠.”
묘하게 히죽거리는 서진욱의 표정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남에게도 안겨 줄 수 있다는 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일단 처음 검술을 본 날은 몸으로 따라 하지 않기로 했다.
내 방으로 돌아와서 눈을 감고 가만히 그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워낙 빠르고 섬세해서 작은 부분이라도 놓치면 기술은 그 힘을 잃을 것 같았다.
내가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최대한 세세하게 기록해야만 했다.
그 후엔 자리에 앉아서 검을 쥔 것처럼 팔을 움직여 봤다.
후웅-!
팔의 각도와 손 모양조차 기술마다 달랐고, 그런 부분이 가장 까다로웠다.
모든 것엔 이유가 존재했기에 그런 걸 놓칠 수 없었다.
“자, 오늘부터는 최현 씨의 수련을 감상하기만 하면 되겠군요.”
그는 내가 훈련한 곳 앞에 테이블을 놓고 차를 마시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가서 테이블을 엎어 버리고 싶은 욕구를 참아 내며 목도를 손에 쥐었다.
처음 내게 보여 줬던 그의 자세를 따라 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의 손 모양, 팔의 각도를 훔쳤다.
“먼저, 목란.”
파앙-!
“……!”
“뭐지…? 다른데…….”
이게 아니다.
그때 내가 코앞에서 느꼈던 목란이라는 기술은 겨우 이 정도의 파괴력이 아니었다.
좀 더 확실하게 모든 걸 꿰뚫을 것만 같은 위압감…….
잠시 자리에 앉아서 다시금 어제 봤던 기술을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했다.
그렇게 내 수련은 똑같은 행동의 반복이었다.
기억하는 대로 기술을 직접 써 보고 느낌이 다르다면 다시 기억을 헤집어 다른 점을 뒤졌다.
그래도 찾지 못할 땐 여러 가지 형태로 기술을 써 보는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느낌의 형태를 찾으면 그곳에서 또다시 변화를 준다.
“최현 씨는 천재가 아니군요.”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서진욱의 말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놀리시는 겁니까?”
“사실을 말한 겁니다. 최현 씨는 검술의 천재는 아닌걸요. 하지만 접근 방식은 아주 좋았어요. 제가 보여 줬던 것을 머릿속에 잘 새겨 두셨군요.”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받고 한숨을 내쉰 뒤 다시 검을 쥐었다.
다행히 이 시험에 제한 시간은 없었다.
굳이 제한 시간을 정하자면 서진욱이 내 검술을 볼 수 없게 될 때일까.
“실례합니다, 마스터.”
다음 수련을 이어 가려던 차에 서진욱의 집사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흰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그는 나이가 지긋해 보였지만, 풍채가 좋아서 젊은 느낌이었다.
그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곤 서진욱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잠시 무언가의 대화가 오갔고, 서진욱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 굳어졌다고 하기엔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였다.
대체 무슨 말을 들었길래…….
“죄송하지만,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진욱의 말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같이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서진욱이 나를 가만히 보다가 중얼거렸고, 그 말에 집사는 흠칫 놀라는 듯했다.
“따라오시죠.”
무슨 이유로 어디에 가는지도 모른 채, 나는 그의 고급스러운 차에 몸을 실었다.
집사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백미러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고,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방금 협회에서 S급 이상 헌터들을 소집했습니다.”
“네?! S급 이상 헌터 소집이라니…. 설마…….”
헌터의 역사를 공부할 때 반드시 배우는 사건 중 하나가 바로 ‘브루탈의 밤’이다.
지금처럼 S급 이상 헌터를 소집한 경우는 역사상 단 한 번뿐이었는데, 달이 붉은색으로 바뀌고 몬스터들이 광기에 사로잡혀서 날뛰었던 날이었다.
그날은 ‘브루탈의 밤’이라고 불리며 헌터들에게 있어선 공포의 날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엄마가 죽은 날이기도 했다.
“벌써 10년 전이군요. 그때의 경우가 아니길 바라지만,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해 둬야겠어요.”
아까 서진욱의 표정이 굳어진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브루탈의 밤에는 많은 헌터가 목숨을 잃었다.
아마 그날 참전했던 서진욱도 수많은 동료를 떠나보내야만 했을 것이다.
협회는 그리 멀지 않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차에서 내리며 서진욱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를 데리고 오신 건가요. S급 이상 헌터라면…….”
“제가 데리고 가는 거라면 크게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부럽다.
“헌터는 경험으로 성장하는 법이죠. 혼자서 수련하는 것보다 많은 경험을 쌓는 게 몇 배는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 못하더라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면 그거라도 나쁘지 않죠.”
서진욱이 협회에 들어서자마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얼떨결에 그의 뒤에 따라붙어서 함께 인사를 받았다.
참 묘한 기분이었다.
“오셨군요. 이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한 남자가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을 열자마자 긴장감이 단숨에 나를 집어삼켰다.
다른 헌터들의 위압감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너! 왜…. 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차윤지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장례식에서 봤을 때보다 얼굴이 나아져 다행이다.
그녀 뒤쪽에 있는 유지한 아저씨는 빙긋 웃으며 손을 들었다.
이 상황에 딱히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서진욱을 내게 소개해 준 게 아저씨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SS급이면 아무나 막 데려와도 되는 거야? 이야, 역시 SS급인가. 특혜가 엄청난걸?”
“…진천우.”
서진욱이 차가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쏘아봤다.
S급 헌터로 긴 창을 다루는 헌터였다.
호전적이고 터프한 성격 때문에 이래저래 유명하기도 했다.
“저 역시 이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서진욱 씨가 아무리 관계자라고 해도, S급 헌터들만 소집했는데 D급 헌터라뇨.”
‘신아람’.
짧은 금발 머리인 그녀 역시 S급 헌터였다.
민혁이와 같은 활을 쓰는 헌터로, 사람들은 둘을 라이벌로 자주 언급했다.
“자. 분위기가 좋은데 끊어서 죄송합니다만 시간이 없어서요.”
이내 방으로 들어온 남자가 우리를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는 인터넷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헌터 협회장 ‘윤서훈’.
바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