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월하백화식 (2)
성인이 되고 풋내기 헌터일 때 서진욱은 이미 월하백화식을 전수받은 후였다.
서진욱은 자신이 검술에 압도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이미 상위 헌터만큼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스스로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거만했다.
“이봐, 듣고 있는 거냐?!”
“…….”
“하여간…. 재수 없는 자식.”
서진욱은 주변 헌터들에게 당연히 미움받고 있었다.
그는 거만했지만 그만한 실력을 갖고 있었고, 어느 게이트 공략에 들어가더라도 누구보다 큰 활약을 했다.
아직 헌터 등급이 낮은 탓에 게이트에서 나오는 적들은 하나같이 지루한 녀석들뿐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팀원들의 말은 귓등으로 듣지 않은 채 앞장서서 몬스터를 학살하고 있었다.
“오! 너 엄청 잘 싸우네.”
“……!”
뒤에서 들려온 굵직한 목소리에 서진욱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키도 작으면서 검술은 화려하네.”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덩치가 큰 남자는 갈색빛의 숏컷을 하고 있었다.
갑옷을 두르고 어깨엔 대검을 메고 있는 그의 모습은 든든하게 느껴졌다.
“나도 검술 좀 알려 줘라.”
“뭐?! 내가 왜!”
“뭐야, 쩨쩨하게 굴지 말고 좀 알려 줘. 선배라고 부를 테니까.”
생글생글 웃으면서 다가오는 남자는 서진욱에게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그는 서진욱의 그런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가 선배야! 따라오지 마!”
서진욱은 매번 최준을 피해 다녔지만, 최준은 항상 서진욱을 따라왔다.
처음엔 그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엿 먹이려고 한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어떤 임무에 가도 최준이 같은 팀에 끼어 있었고, 그 특유의 웃는 얼굴로 질척거렸다.
“아 진짜! 그만 좀 하라고! 난 너 같은 새끼 싫으니까 좀 꺼지라고. 약해 빠진 주제에.”
“……!”
참고 참던 서진욱이 소리를 지르자, 최준이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멈춰 섰다.
“잘 들어. 난 겨우 C급 헌터나 하려고 헌터를 시작한 게 아니라고. 빨리 SS까지 등급을 올려야 해서 바쁘다고.”
서진욱은 그렇게 말하고 숨을 돌렸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친한 척 덤비던 녀석들은 이런 말을 하면 대체로 떨어져 나갔다.
자신을 한심한 몽상가, 허세에 찌든 놈이라고 생각하고 알아서 멀어진다.
“오…. 멋있는데? 따라가려면 나도 더 노력해야겠네.”
“…뭐?”
“나 선배 검술에 반했거든. 그러니까 친구 하기로 했어.”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는 최준의 모습에 서진욱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아…. 이제 모르겠다. 그냥 네 맘대로 해.”
“하하! 기운 내라고.”
최준은 보면 볼수록 특이하고 성가신 녀석이었다.
항상 웃으며 주변에 많은 사람과 친하게 지냈고, 그러면서도 미친 듯이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노력파였다.
최진욱은 항상 그를 차갑게 대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선배도 이번에 B급에 도전하는 거지?”
“그놈의 선배라는 호칭은 그만 좀…….”
실제로 프로 헌터가 된 건 4년 전이지만,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에게 헌터에 대해 배웠으니 선배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어떤 헌터도 서진욱을 선배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말했잖아. 나는 SS급 헌터에 도전할 거라고. A급 헌터까진 바로 올릴 수 있으니까.”
다른 C급 헌터가 그렇게 말한다면 모두 코웃음 치겠지만, 서진욱은 달랐다.
명문가에서 자라 엘리트 교육을 받은 그는 이미 A급 헌터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절차대로 승급 시험을 치르는 건 어쩔 수 없어도 다들 그를 A급 헌터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나도 이번 시험에 도전해 볼까.”
“…뭐?!”
서진욱은 최준의 말에 흠칫 놀랐다.
승급 시험을 이렇게 대충 마실 가듯이 도전하는 녀석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물론 최준의 실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서진욱이 보기에도 그는 충분히 B급 헌터의 재능이 있었다.
그 위로 올라간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가끔 보여 주는 전투 센스는 서진욱도 놀랄 정도였다.
“그런데 선배는 왜 헌터 같은 걸 하게 된 거야?”
최준의 물음에 서진욱은 입으로 가져가던 숟가락이 멈췄다.
왜?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 없는 물음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월하백화식의 계승자였고,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헌터를 배우며 탄탄대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서진욱에게 헌터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고,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정해져 있는데, 그 길을 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아?”
서진욱의 말에 최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국밥을 한 숟갈 입에 집어넣었다.
“그럼 너는?”
한참 어린 서진욱이 최준에게 편하게 말하는 건 남이 보기엔 이상하지만, 둘에게는 익숙해져 버렸다.
서진욱은 그토록 질색했던 친구 사이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미소를 지은 최준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어때? 귀엽지?”
그가 보여준 화면에는 공룡 잠옷을 입은 남자아이 사진이 있었다.
“뭐야?! 너 유부남이었어?!”
눈이 동그래진 서진욱이 최준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름 30대 초반이라고. 충분히 결혼할 나이 아니냐? 아니면 내가 이런 미인이랑 결혼한 게 부럽다거나.”
최준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내 사진도 보여 줬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미인이었고, 그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째서 이런 놈이랑…….
“방금 ‘어째서 이런 놈이랑 결혼한 거지?’라고 생각했지?!”
“…….”
“크하하하! 선배는 그런 점이 귀엽다니까.”
“닥쳐!”
시끄러운 탓에 주변의 시선이 모인 걸 느낀 서진욱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가족 때문인 거야?”
“그렇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쪽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렸을 때부터 잘하는 건 쌈박질뿐이었는걸.”
피식 웃음을 흘리는 최준을 보고 서진욱은 눈을 돌렸다.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헌터에 대한 자부심도, 자존심도 없는 이런 남자와 함께 있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준은 다른 헌터들과 달랐다.
서진욱을 아무런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한 사람으로 봐 줬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심 최준에게 마음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그에게 실력만 있었다면 훗날 자신의 등 뒤를 맡길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먼저 일어난다.”
재능이 있고 천재라는 말을 들어왔던 서진욱이지만, 그는 호숫가의 백조 같은 삶을 살아왔다.
처음부터 만들어진 완벽한 레일을 따라 걷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물속에서 열심히 헤엄치고 있었다.
죽을 만큼 노력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아버지에게 죽었으니까.
S급 헌터이자 월하백화식의 계승자였던 아버지는 자신의 천장이 어디인지 너무 빨리 느껴 버렸다.
그는 스스로 SS급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자신이 아닌, 아들에게 이루지 못한 것을 물려주기로 했다.
덕분에 서진욱은 어렸을 때부터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지독한 교육과 수련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 그였기에 아무런 노력도 목표도 없는 최준이 한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 자… 잠깐만! 어차피 우리 같은 게이트 가잖아! 기다려!”
허겁지겁 일어난 최준이 먹은 걸 정리하고 서진욱을 따라갔다.
***
“당신도 대단해. 어떻게 저런 녀석이랑 같이 다녀?”
오민선의 말에 최준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성격은 조금 더럽지만, 나쁜 애는 아니야. 남들 눈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엘리트지만, 난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져.”
“…당신도 괴짜구나. 끼리끼리 어울리네.”
짙은 검은색 곱슬머리를 허리까지 늘어트린 그녀는 머리와 비슷한 까무잡잡한 탄탄한 피부를 갖고 있었다.
키도 크고 근육도 있는 그녀는 터프한 헌터였다.
오민선은 통신계 B급 헌터로, 업계에선 제법 유명했다.
그녀는 통신계였지만, 전투 실력도 뛰어나서 많은 헌터가 그녀를 탐내고 있었다.
20대 후반인 그녀는 아직 젊은 나이였기에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인재였다.
“그러는 너도 항상 우리랑 게이트 공략을 하러 와 주잖아? 다른 좋은 곳에서도 많이 부를 텐데 굳이 우리를 고르는 거 보면…. 혹시 내가 마음에 든 건가?!”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장작이나 구해 와. 난 귀찮은 게 싫어서 얹혀 가고 싶은 것뿐이니까.”
오민선의 말은 진심이었다.
헌터로서 실력이 좋은 건 둘째치고 그녀는 귀찮은 거라면 딱 질색이었다.
그다지 높은 곳을 목표로 헌터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큰돈을 벌고 싶다는 야망도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벌 수 있는 만큼만 벌면서 자신의 인생을 즐기자는 게 그녀의 모토였다.
“뭐, 괴짜 둘을 따라오면 내가 할 일이 없단 말이지.”
세 사람이 들어가는 게이트는 보통 7~8층이었다.
이 정도 난이도는 최준과 서진욱의 실력으로 가벼운 수준이었다.
굳이 전투까지 할 필요가 없었으니 당연히 그녀 입장에선 편할 수밖에.
“하하하! 그것도 그렇지.”
“자기를 이용한다는데 뭐가 좋다고 웃는지.”
물론 최준이랑 서진욱이 마음에 든 것도 사실이었다.
오직 일적으로만 만났으니 번거로운 겉치레도 필요 없었다.
서진욱이 좀 까칠하긴 했지만, 오히려 솔직한 모습이 안심됐다.
“주변은 대충 정리된 것 같아. 이 정도면 몬스터가 밤에 기습해 올 일은 없겠지.”
대나무 숲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세 사람은 밤을 보낼 준비 중이었다.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인원이 적으니 시간이 소모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진욱이 거만하긴 했지만, 경솔한 성격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에도 정석으로 안전하게 게이트를 공략하는 게 그의 장점이었다.
“그런데 선배는 SS급 헌터가 되면 뭘 하고 싶은데?”
갑작스러운 최준의 질문에 서진욱이 당황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답을 모를 수밖에.
“뭐야? 없는 거야? 그럼 넌 SS급 헌터가 되면 인생의 목표를 잃는 거냐?”
“무… 무슨 소리야! SS급 헌터도 내겐 과정일 뿐이라고.”
“오! 역시 선배!”
서진욱이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사이, 최준과 오민선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서진욱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던전 최상층을 공략하겠어. 15층까지!”
“……!”
두 사람의 놀란 표정을 보던 서진욱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그저 놀란 것이 아니라, 둘의 얼굴은 경악에 물들어 있었으니까.
이내 서진욱은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의 뒤에 머물고 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휙 돌렸다.
촤아악!
그와 동시에 붉은 피가 그를 덮쳤다.
그 피의 주인이 최준이라는 걸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
털썩.
최준이 쓰러지고 나서야 그 앞에 있던 데스나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저… 저건 뭐야! 저런 몬스터는 들어본 적 없다고.”
묵색의 갑옷을 두른 몬스터는 붉은 눈을 번쩍이며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쌔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