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월하백화식 (1)
“전 지금 만족하며 살고 있어요.”
“시야가 좁으시군요. 실력이 있는데도 자신의 실력에 맞는 곳에 가지 않는다는 건 결국, 다른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로 인해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건 누구 때문일까요. 훌륭한 실력을 가진 자가 최상층에 가지 않아서 최상층을 공략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사이에 누군가 목숨을 잃는다면… 그건 대체 누구 잘못이냐는 겁니다.”
쿠웅!
이번엔 힘껏 주먹으로 테이블을 후려친 내가 화를 숨기지 않았다.
“그럼 그게 제 잘못이란 말입니까? 저는 그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건가요?”
“…도발한 건 죄송합니다. 지금은 최현 씨가 그런 삶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도,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제가 죽고 나서 최현 씨의 생각이 바뀐다면? 최상위층에 가서 공략을 돕고 싶지만, 그땐 이미 제가 없어서 실력을 기를 수 없다면? 그때 후회하실 건가요?”
서진욱은 내게로 천천히 걸어와 검을 손에 쥐여 주었다.
“만약 제게 검술과 헌터에 대해서 배운 뒤에도 지금과 같다면 계속 그렇게 사시면 됩니다. 그리고 만약 생각이 바뀌신다면 이걸 이용해서 여러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거죠. 저는 그저 당신의 선택지를 늘려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어째서 당신은 이렇게까지 제게 집착하는 건가요?”
유난히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서진욱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저는 아버지에게 검술을 물려받았는데 아버지 역시 저와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기억나네요. ‘내가 없는 세상이 너무나 외롭게 느껴져서 그곳에 내가 살아왔다는 걸 누구보다 크게 소리쳐 줄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저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나는 서진욱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나와 대화하는 동안 거짓말을 하거나 날 속이려고 하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알겠어요. 제가 기대만큼 보여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를 제자로 써 주십시오.”
아직 머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정말 서진욱의 제자가 된다는 것도 낯설게만 느껴졌고, 이 상황 자체가 내겐 너무나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하지만 율이가 내게 했던 말이 자꾸만 등을 떠밀고 있었다.
다시 앞으로 가자고…….
내가 앞으로 갈 수 있다면, 다시 누군가를 잃지 않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바… 바로요?!”
“시간이 없어요. 사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월하백화식’을 전부 가르쳐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서진욱은 내게 검을 들게 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지켜봤다.
“먼저 편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자연스럽게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 주실래요? 현재 최현 씨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야 저도 가르칠 부분을 생길 테니까요.”
“후우우우…….”
최강의 헌터 앞에서 검을 휘두르려는데 어떻게 자연스럽게 휘둘러!
애초에 자연스럽게 검을 휘두르는 건 뭐지? 어떻게 휘둘렀더라…….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다가 문득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게 됐다.
그건 나뭇가지로 수도 없이 바위를 내리쳤을 때와 같았다.
쌔엥-!
“……!”
“이렇게… 하면 되나요?”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서진욱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다시 해 보실래요?”
“아… 네.”
뭐지? 잘못했나? 너무 엉망이라서 제자 취소하는 거 아니야?
쌔엥!
다시금 들고 있던 검이 허공을 갈랐고, 서진욱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래도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자세를 갖고 계시는군요.”
“네? 제가요?”
“기본 검술 자세는 누구한테 배우셨나요? 아주 자연스럽고 자신에게 최적화된 최고의 자세였어요. 훌륭하네요.”
“…지병하 할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자세를 배운 건 아니었지만, 지금의 자세를 만들어준 건 할아버지거든요.”
내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서진욱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 마지막까지 대단한 분이시군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제가 그분을 이기는 그림은 상상이 되질 않네요.”
현재 최강이라고 불리는 헌터가 이런 말을 할 정도라니, 할아버지가 얼마나 굉장한 사람이었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다행이네요. 본인에게 맞는 자세를 잡는 데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최현 씨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세를 갖고 있으니까요. 그만큼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럼 바로 검술을 가르쳐 주시는 건가요?”
“그 이전에 정신력부터 기르는 게 좋겠네요. 아무리 좋은 실력을 갖고 있더라도 정신이 무너지면 꼬맹이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과 다를 바가 없죠.”
과거의 내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어쩐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마 그때의 나는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보다 더 형편없었을 거다.
***
“이곳은 저희가 검술을 수련하기 위해서 만든 특수한 동굴입니다.”
동굴 안까지는 서진욱이 들고 있는 랜턴의 빛에 의지해서 왔지만, 랜턴을 끄자 모든 빛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오직 검은색만이 내게 뒤엉켰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 동굴에서만 자라는 버섯이 있습니다. 생으로 먹을 수 있고 맛도 제법 좋으니 그거면 충분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지금부터 최현 씨는 이 동굴에서 일주일 동안 살아남으시는 겁니다. 그게 검술을 배우기 위한 첫 번째 수련이죠.”
“잠깐만요. 정말 아무것도 없이 여기서 살아남으라고요?! 그러다가 제가 죽기라도 하면…….”
정적과 함께 생각에 잠긴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원래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었습니까?”
“뭐, 최현 씨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믿고 있다고요. 그럼 화이팅!”
뭔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서진욱은 바로 동굴에서 빠져나갔다.
그의 말대로 정말 이 동굴에는 나 혼자만이 남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굴은 상상 이상의 공포로 다가왔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어느 때보다 생생했다.
내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우렁차게 귓가에 울렸다.
일주일…. 여기서 아무것도 없이 일주일을 사는 게 가능할까.
또옥- 또옥-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따라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동했고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내 이마를 적셨다.
물은 이걸로 보충하라는 건가…. 하아…….
바닥에 기어 다니며 손을 쭉 뻗어서 앞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렇게 아주 느릿느릿 조금씩 동굴 안쪽으로 이동했다.
서진욱이 말했던 것처럼 동굴 안쪽에는 손만 뻗으면 잡히는 게 버섯일 정도로 버섯이 잔뜩 자라 있었다.
그가 거짓말을 한 게 있다면 버섯의 맛이 제법 좋다고 한 것.
“으아아! 안 돼! 어떻게 여기서 일주일이나 버텨! 벌써 미칠 거 같다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동굴 벽을 타고 다시 내 귀에 들려올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멘탈이 나갈 것만 같았다.
이게 정신력 훈련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조금씩 마음을 진정하고 동굴 벽에 기대앉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 앉아 있으니 머릿속에 여러 가지 잡생각들이 떠올랐다.
처음에 배신당해서 게이트에 갇혔던 것도, 던전 최상층에서 뛰어난 헌터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도, 진급 시험을 보고 게이트들을 공략했던 것도, 할아버지와 만났던 것도 생생하게 머릿속을 훑고 있었다.
“형씨. 괜찮아. 내가 있잖아.”
“발렌! 다행이다. 네가 있었구나.”
말 상대가 있다는 것이 이토록 위로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정말 여기서 일주일이나 버틸 수 있겠어?”
“해 봐야지. 시작한 이상 포기하고 싶진 않아. 율이도 날 걱정하고 있고, 언제까지고 주저앉아서 투정만 부리고 있을 순 없으니까.”
나는 약하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제자리에서 변한 게 없다.
여전히 나는 약하고 누군가를 반드시 지켜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그런 내 스스로가 두렵다.
만약 다시 한번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다면 그땐 내가 망가져 버릴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러니까 강해져야지.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어. 누구보다 강하다는 건 누구라도 지켜 줄 수 있다는 거잖아.”
“형씨라면 할 수 있다고. 9000번이 넘게 죽어도 포기하지 않았던 형씨잖아. 그러니까 지금도 포기하지 말라고!”
“좋아! 알겠어!”
처음엔 단순히 이상한 곳에 갇혀 있다는 것으로 정신적인 대미지를 견뎌 내야 하는 수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동굴 안에서는 자는 시간 외엔 대부분 시간을 가만히 앉아서 보냈다.
그 시간 동안 머릿속에 파고드는 과거의 기억들….
그 기억들과 마주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 괴롭고 힘든 일이었다.
헌터로 살아온 사람에게 과거의 기억 중에서 행복하고 기쁜 기억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으아악…! 하아…. 하아……!”
“형씨!”
그리고 어떤 기억보다 할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는 내 모습이 역겨워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 기억은 불현듯 찾아오지만 어떤 기억보다 생생하고 선명해서 가만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으드득.
이를 꽉 깨문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앞으로…. 나아가라.”
***
어째서 당신은 이렇게까지 제게 집착하는 건가요?
최현이 했던 질문에 대한 진실은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물론 최현에게 했던 말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최현은 충분히 최고의 헌터가 될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진욱은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었다.
자신이 마저 하지 못했던 최상층 공략도 그라면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다만, 서진욱이 최현을 선택한 이유엔 그 외에도 다른 것이 있었다.
“…정말 아저씨랑 꼭 닮았네요.”
‘최강의 헌터’, ‘전투 기계’, ‘천재’.
모두 어렸을 때 서진욱이 들었던 별명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별명은 ‘선배’였다.
“오, 선배!”
입꼬리가 쭉 올라가며 환하게 웃는 그의 특유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줬다.
“…당신 뭐야?”
20대 초였던 서진욱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상한 남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이렇게 살갑게 다가오는 사람은 항상 뻔했으니까.
월하백화식을 물려받고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앞날이 창창한 헌터에게 빌붙으려는 쓰레기들.
“네가 그 서진욱이라는 녀석이구나. 생각보다 작네.”
그에게 유일한 콤플렉스가 있다면 그건 작은 키였다.
서진욱은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붉은빛이 감도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왜 갑자기 시비인데?! 죽고 싶어?!”
남자는 서진욱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다. 나는 ‘최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