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게이트 안의 게이트 (4)
[System : 그린 스톤x1 아이스 잭의 털 뭉치x1 아이스 잭의 송곳니x1을 획득하셨습니다!]
“자, 이걸로 6마리.”
이성연은 느릿한 말투와 달리, 전투에서는 신속한 움직임을 보여 줬다.
그는 자신을 C급 헌터라고 소개했지만, 그의 실력은 B급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여기서 내가 초월 헌터라는 걸 알고 있는 건 할아버지뿐이었으니 나는 적당히 노력하는 모습만 보여 줬다.
“후우…. 잠깐 쉬도록 하죠.”
“이거 쓰세요.”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다희가 수건을 우리에게 건네줬다.
추운 곳에서 전투하다 보면 땀 때문에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었고, 그런 부분을 신다희가 꼼꼼하게 챙겨 주고 있었다.
“그보다 최현 씨도 굉장하네요. 어째서 마스터가 D급 용병을 구해 왔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C급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하하…. 그런가요.”
이성연이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사실상 4층 게이트 공략치고는 기괴한 조합인 게 사실이었다.
C급, D급 헌터 두 명, 은퇴한 헌터 한 명, 그리고 전투 능력이 없는 통신계 헌터 한 명.
4층 게이트를 공략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순조롭게 게이트를 공략하고 있었지만.
“저희가 잡은 놈들은 아직 일부에 불과하니까 한참이나 더 남았네요.”
“어쩔 수 없죠. 슬슬 해가 지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쉬었다가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할아버지와 헤어질 때 미리 시간을 정해 두었다.
해가 질 때 숲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기에 서둘러 걸음을 돌렸다.
밤에 몬스터들과 싸우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그런 만큼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괜한 걱정이겠지만, 괜찮으시겠죠?”
내심 나와 이성연이 머릿속으로 하던 생각을 신다희가 입 밖으로 꺼냈다.
물론 할아버지가 대단한 실력자라는 건 알고 있지만, 던전에서는 언제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이런 이런, 내가 좀 더 빨리 온 모양이군.”
그런 우리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닥불 앞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계신 할아버지가 보였다.
“아아, 그건 제가 할 일이니까 두세요.”
“하하하. 그런 게 어디 있나. 손이 남으면 하는 거지.”
신다희가 황급히 할아버지 손에 들려 있는 간편식을 뺏으려고 하자, 할아버지는 여유롭게 팔을 돌려 피해냈다.
나 역시 할아버지 옆으로 가서 내가 먹을 간편식을 꺼내 들었고, 신다희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신다희 씨가 서포트해 준 덕분에 편하게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직 그렇게 지치지 않았어요.”
간편식은 말 그대로 조리가 간편해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게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할아버지가 직접 조리를 하고 있는데 남에게 떠넘기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간편식은 밖에서 먹는 요리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맛이었다.
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렇게 추운 곳에서의 스튜는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줬다.
“그럼 나는 다음 불침번이니, 먼저 자도록 하지.”
할아버지는 침낭을 펼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식사를 마친 뒤 모닥불 앞에 잠시 둘러앉았다.
“하아…. 요샌 통 쉴 틈이 없네요.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오면 바로 또 다음 일이 들어오니 휴일은 꿈도 못 꾸겠어요.”
눈이 내리는 설원 위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둘러앉아 있으니, 괜히 신세한탄이 나왔다.
이성연의 피곤한 얼굴을 확인하며 신다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길드라서 더 그런 것도 있겠죠.”
확실히 신월의 게이트 공략 성공률은 말도 안 되게 높았다.
그렇기에 다른 길드나 헌터 협회에서도 신월에 일거리를 많이 가져다줬다.
다른 길드에 비해 업무량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최현 씨는 저희 길드 안 들어오시나요? 들리는 얘기로는 거의 예비 길드원이던데.”
“맞아요. 저는 신예 언니가 그렇게 칭찬하는 건 처음 봤어요.”
예상치 못한 이름에 깜짝 놀랐다.
이신예가 남을 칭찬하고 다니는 성격이 아닌데 그런 일이 있다니 놀라웠다.
뭐, 나도 원래는 신월 길드에 들어오고 싶었던 게 사실이지만…….
“아마 길드에 들어가진 않을 것 같아요.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지금과 같은 관계만 유지하지 않을까 싶네요.”
“흐음…. 그렇군요. 최현 씨를 만났던 분들이 하나같이 좋게 봐줘서 들어오길 바랐는데.”
“그러게요. 아쉬워요.”
두 사람이과 아직 많은 대화를 나눠 보진 않았지만, 배려심이 깊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성연은 무심한 듯 예의 바르며 남을 신경 써 주는 타입이라면, 신다희는 눈치가 빠르고 뭐든 열심히 노력하는 타입이었다.
“두 분도 얼른 주무세요. 제가 첫 번째 불침번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나와 이성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한 건 사실인지라 얼른 어디든 누워서 자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잘 자요.”
모닥불 근처에 침낭을 펼치고 들어가니 어느 때보다 아늑한 느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게이트 속에서 가장 편안한 감각을 느끼다니…….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포근한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
쿠웅!
“……!”
한참 꿀잠을 자고 있는데 굉음과 함께 땅이 요동쳤다.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쌓여 있던 눈이 허공을 뿌옇게 수놓은 탓에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인벤토리에서 갑옷과 무기를 꺼내 바로 착용하며 잠에서 깨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다들 괜찮아요?!”
“저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두 사람이 확인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이성연 역시 나와 동시에 잠에서 일어난 듯 보였다.
몬스터의 기습이라면 어째서 신다희가 우리를 깨우지 않은 거지?
시야가 통제된 상태에서 아무리 귀를 기울이고 주변 소리를 잡아내려고 해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내 주변을 뒤덮은 눈이 가라앉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이게 뭐야……!”
“……!”
하얀색 눈에 붉은 물감을 푼 것처럼 사방에 피가 퍼져 있었다.
우리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그 피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허허, 이거 면목 없구만.”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피를 따라 이동한 곳엔 나무에 몸은 기댄 할아버지가 보였다.
부상은 심각한 편이었고, 무엇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신다희 씨는…….”
“제대로 한 방 먹은 거지. 이 게이트의 보스는 ‘펜리르’라는 놈일세.”
펜리르.
예상치 못한 이름에 나와 이성연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블루 라벨이면서도 높은 랭크인 펜리르는 큰 늑대의 형상을 한 몬스터다.
바람 위를 뛰어다니며 차가운 냉기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번거로운 녀석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당혹스러운 건 아직 몬스터들을 다 처리하지도 않았는데 보스라는 놈이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원래 게이트 보스는 모든 몬스터를 쓰러뜨리고 나서야 출현하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후우…. 후우…….”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간 이성연이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게이트의 구조는 우리의 바람과는 다른 모양이야. 이 게이트의 진짜 보스는 다음 게이트 너머에 있는 거지.”
펜리르가 게이트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 이 녀석이 진짜 보스가 아니라는 의미다.
지혈을 마치고 응급 처치를 끝내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괜찮으실까요?”
“일단은 안정된 거 같아요. 피를 너무 많이 흘리신 것 같은데…. 주무시게 내버려 두는 게 좋겠어요.”
“아직도 뭐가 뭔지 제대로 이해가 되질 않네요.”
“할아버지도 저런 상태니 저희끼리 어떻게 해 봐야죠.”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성연은 주변에 흩뿌려져 있는 피를 보고 인상을 구겼다.
“제 예상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네요.”
“신다희 씨가 어디 있는지도요?”
“…아마도요. 일단 펜리르가 우리 냄새를 맡고 이곳을 기습해 온 건 사실일 겁니다. 펜리르는 ‘로우’라는 걸 쓰는데 말 그대로 포효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마법이죠. 거기에 당한 신다희 씨는 저희를 깨울 수 없었을 겁니다.”
나 역시 알고 있는 마법이었다.
상위 몬스터들은 특수한 마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펜리르 같은 비스트 몬스터들이 까다로운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로우’였다.
로우는 그 소리가 상당히 커서 우리가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아마 펜리르는 우리가 아닌, 다른 몬스터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사일런스’라는 마법도 사용한 걸로 보인다.
“경험이 많으신 할아버지는 기척에 일어나신 것 같아요. 상황을 파악하신 뒤에 서둘러 펜리르를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한 마리가 아니었군요.”
주변에 펼쳐져 있는 펜리르의 발자국과 이성연의 추리를 조합해 보면 대충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당황한 할아버지는 이 상황에서 최선의 행동을 했습니다. 자신의 피를 주변에 퍼뜨리는 거죠.”
“…저희 때문인가요.”
펜리르는 후각이 예민하다.
나와 이성연을 지키기 위해 할아버지는 일부러 자신의 피를 사방에 펼쳐서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아마 펜리르 두 마리가 함께 있었다는 건 부부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신다희 씨를 데리고 간 이유도 설명이 되네요.”
내 말에 이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끼가 있는 거군요.”
“생각보다 거친 할아버지의 저항에 계속 맞서 싸우는 건 포기하고 신다희 씨만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간 거겠죠. 노인보단 영양가가 있는 여자만요.”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인간은 몬스터에게 상당히 영양가 있는 음식이라고.
썩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 말이 틀린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이제 저희가 선택할 차례군요.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이성연은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연히 신다희를 구하러 가려고 했던 나와는 달리, 상황을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해서 확실한 답을 떠올리고 있었다.
상대는 펜리르 두 마리, 그리고 새끼도 있다.
이쪽은 귀검 할아버지가 큰 부상을 당한 상태였고, 공식적으로는 D급 헌터와 C급 헌터 둘만이 남아 있다.
누가 봐도 싸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블루 라벨 몬스터를, 그것도 상위 랭크인 펜리르를 우리 둘이서 각자 한 마리 이상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가능합니다.”
“…….”
내 말에 고개를 든 이성연이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제가 가능하게 하겠습니다.”
지금은 내가 초월 헌터라는 걸 숨기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신다희를 찾아서 살리는 게 중요하니까.
“만약 실패하면 우리 팀은 전멸입니다. 그 무게감을 갖고도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이성연의 눈은 처음 봤을 때와 달리 날카롭게 번쩍이고 있었다.
“네. 할 수 있어요.”
“…좋아요. 그럼 더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바로 이동하죠.”
이성연은 내게 더 많은 걸 물어보지 않았다.
바로 펜리르의 발자국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주변은 어두웠고 발자국을 쫓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시야가 부족했다.
게이트에는 처리하지 못한 몬스터가 산더미로 남아 있었고, 언제 어디서 기습해 올지 알 수 없었다.
“형씨, 뒤에서 한 놈 온다.”
카앙-!
거칠게 휘둘러진 아이스 골렘의 주먹을 검으로 튕겨내자 이성연이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바빠서…. 봐주는 거 없이 간다. 라이프 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