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게이트 안의 게이트 (3)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하고 있는 내가 선봉에 서야 하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파티에 들어왔으니까.
대검을 손에 들자마자 앞으로 튕겨 나갔다.
파앙-!
양손의 발톱을 세워 내 검을 막아낸 아이스 잭은 바로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걸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카칵!
묵직하게 수직으로 내리친 검이 아이스 잭의 손톱을 부러뜨리며 어깨를 훑었다.
“오호. 마스터가 관심을 가질 만하군요.”
“저게 이제 막 D급으로 올라온 헌터라니…….”
“혼자 그린 라벨에게도 밀리지 않고 있어요.”
뒤에서 세 사람이 하는 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내심 뿌듯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아이스 잭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놈은 생각보다 영리하게 싸우고 있다.
의도적으로 내 공격을 받아내고 흘리며 체력을 갉아먹을 셈이겠지.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성연이 검을 들고 단숨에 내 옆을 지나 아이스 잭에게 달려들었다.
카앙! 캉!
최상층에서 다른 헌터들이 싸우던 모습을 많이 봐왔기에 이성연의 자세나 움직임이 얼마나 안정적인지 알 수 있었다.
둘이서 같이 공략하니 아이스 잭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앞에서 놈의 움직임을 막고, 다른 사람이 대미지를 입히는 식으로 천천히 체력을 갉아먹었다.
[System : 그린 스톤x1 냉기의 발톱x2를 획득하셨습니다!]
“두 사람 다 훌륭한 실력이군요.”
뒤에서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우리에게로 다가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우리의 검술이 얼마나 귀엽게 보였을지 알기 때문에 나는 순수하게 칭찬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귀검이라 불렸던 남자의 실력을 두 눈으로 보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이 게이트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는 ‘아이스 골렘’, ‘윈터 버드’, ‘아이스 잭’인가.”
아이스 골렘은 옐로우 라벨, 나머지 두 마리는 그린 라벨의 몬스터였다.
4층에서 발생한 게이트라서 그런지 필드에 출현하는 몬스터의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다.
방금처럼 한 마리씩 상대하는 상황이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여러 마리가 덤빈다면 얘기가 달랐다.
결국,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선 몬스터들을 모두 쓰러뜨려야 한다 하더라도 이성연의 오더대로 길목 전투는 피하는 게 좋다.
게이트 중심까지 몬스터들을 피해서 이동한 뒤 그곳에서부터 기후를 확인하며 하나씩 쓰러뜨리는 게 안전한 공략법이었다.
“주변 시야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으니 긴장감을 유지하며 이동하겠습니다.”
설원 지형의 무서움은 단순히 기후의 문제가 아니었다.
새하얀 눈밭에 숨어 있다가 기습해 오는 몬스터들의 존재가 설원 지형의 까다로움이었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점점 눈보라가 심해지기 시작했고, 아까보다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잠시 이쪽에서 쉬었다가 이동하겠습니다.”
이성연이 있는 곳엔 커다란 바위가 자리 잡고 있어 바람을 등지는 쪽으로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우리 그곳에 자리를 잡아 모닥불을 피워 몸을 녹일 수 있게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신다희가 힘겨워 보였다.
“괜찮으세요?”
보온병에서 차를 따라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코가 빨개진 채 빙긋 웃으며 컵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어차피 통신계 헌터고 전투에서 도움도 안 될 텐데 이런 거로 불평하면 안 되죠.”
차를 서둘러 마신 그녀는 능숙하게 젖은 양말을 미리 챙겨 온 다른 양말로 갈아 신었다.
아무래도 내가 걱정할 만큼 약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최현 님은 최상층에서 윤지랑 만났다고 하셨던가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귀검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난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 네! 그리고 괜찮으면 말 편하게 해 주셔도 됩니다.”
“하하하, 그럼 그렇게 하지. 윤지는 잘 지내는 것 같았나.”
처음엔 어색하던 할아버지도 이젠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묘하게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줬다.
이젠 말까지 놓으니 영락없이 동네 할아버지로 보였다.
“잘 지내고 있었어요. 던전이 체질인 것처럼 지내던데요. 그곳에서 제가 수련하는 것까지 도와줬으니…….”
“호오…. 그 아이가 자네의 수련을 도와줬다고?”
할아버지는 잠시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흥미로운 듯 나를 바라봤다.
“무슨 문제라도…….”
“자네는 신기한 능력이 있군. 아마 그건 주변 사람들에게 묘한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그런 능력. 마스터도 그렇고, 자신 외엔 관심이 없는 그 아이까지 그랬다는 건 재밌는 일이야.”
최상층에서 그녀가 내 수련을 도와준다고 했을 때 다른 팀원들의 반응도 지금과 비슷했다.
항상 자신의 실력 향상에만 집착해 오던 차윤지가 다른 사람의 수련을 도와준다고 한다니 아무래도 신기한 광경이겠지.
“그런데 차윤지 씨랑은 친하신가 봐요?”
“하하하, 내가 그 아이의 검술 스승이라네.”
“……?!”
뒤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신다희와 이성연도 깜짝 놀라 고개를 휙 들었다.
확실히 차윤지는 매스컴에도 자주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주변 사람들도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고 들었다.
하지만 귀검이 빨간 망토의 스승이었을 줄이야…….
“워낙 무뚝뚝한 아이라 내게 연락을 하는 것도 쑥스러워하거든. 그래서 이렇게라도 안부를 묻는 게지.”
그는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고 있던 이성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말씀 나누는 중에 죄송하지만, 눈보라가 약해졌으니 지금 다시 이동하도록 하죠.”
이성연의 말에 우리는 동시에 물건들을 챙겨 준비를 마쳤다.
“첫 번째 목적지는 저쪽에 보이는 숲입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눈보라도 피할 수 있고 몬스터도 한 마리씩 처리하는 게 가능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성연을 선두로 우린 다시 눈보라를 해치며 설원을 걷기 시작했다.
“혹시…. 차윤지 씨는 처음부터 검술 천재였나요?”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에게 차윤지에 대한 걸 물었다.
“천재라…. 천재 이상이었지. 그 아이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몸이 검술을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그게 가능한가요?”
“하하하, 나도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믿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믿지 않을 수 없었지. 그 아이의 무서운 점은 날 스승으로 여기면서도 한 사람의 검사로서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세.”
잠시 그의 말뜻을 곱씹다가 이내 포기를 한 채 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죠?”
“내가 검술을 가르쳐 주면 윤지는 그걸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바꿔서 익혔다네. 내게 배운 걸 곧이곧대로 배우기만 했다면 언제까지나 내 아래에만 있을 테니까.”
차윤지의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 해맑게 웃고 계셨다.
“그런 게 싫진 않았어. 나이를 먹고 젊은 유망주에게 경쟁자로 비친다는 건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었지. 특히 상대가 그 아이라면 말이야.”
할아버지의 말을 전부 순수하게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가 얼마나 차윤지를 아끼는지는 느껴졌다.
그사이 우리는 운이 좋게도 몬스터와 마주치지 않고 첫 목적지인 숲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나무가 울창한 덕분에 주변 눈보라를 어느 정도 막아 줬고, 아까보다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발견하는 몬스터들을 족족 사냥하도록 하죠. 고도도 높으니 주변을 탐색하기엔 가장 좋은 곳일 겁니다.”
이성연의 말에 동감한다.
외부에선 이 숲 내부를 확인하기 힘들지만, 반대로 우리는 밖을 보기에 수월한 조건이었다.
무엇보다 원할 때만 전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우리에게 굉장히 유리했다.
하루가 어째서 이 사람을 리더로 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숲 서쪽에 바로 아이스 골렘이 보이네요. 주변에 다른 몬스터는 없는 것 같은데, 지금 처리할까요?”
“그럼 일단 제가 선두로 나서고, 그 후에…….”
이성연이 말을 하고 있던 도중 우리 사이를 할아버지가 유유히 지나갔다.
주먹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할아버지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귀검이라고 불렸던 노인인데, 이곳에 얹혀 온 이유 정도는 보여 줘야지 않겠나.”
“…네?”
“여기까지 오느라 다들 피곤할 텐데 잠깐 쉬면서 구경하라고.”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숲 밖으로 나가자마자 할아버지를 발견한 아이스 골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앙!
아이스 골렘이 거대한 주먹을 들어 올리자, 주먹 근처에 있는 눈이 위로 솟아오르며 시야를 가렸다.
“미안하지만, 후배들이 보고 있으니 기 좀 살려 주게.”
쌔엥-!
아주 잠깐 번쩍거리는 것과 동시에 어느새 할아버지가 골렘 바로 아래까지 이동해 있었다.
“뭐야…! 대체 어떻게…….”
말문이 막힐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눈이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멍하니 할아버지를 보고 있는 사이에 아이스 골렘의 한쪽 팔이 깔끔하게 잘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감정이나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아이스 골렘은 자신의 팔이 떨어진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다른 주먹을 할아버지를 향해 휘둘렀다.
“후우우…….”
할아버지의 입가에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고, 이내 아이스 골렘의 움직임이 멈춰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보고 있던 우리들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상황을 파악하기 급급했다.
파앙-!
아이스 골렘의 남아 있던 팔도 산산조각이 나며 허공에 흩어졌다.
어째서 그에게 귀검이라는 이명이 붙었는지 알 수 있었다.
검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부터 움직임까지 마치 귀신과 같았으니까.
“허허, 예전 같지 않게 어깨가 결리는구만.”
“…엄청난데요.”
짝짝짝.
멍하니 지켜보던 신다희는 박수를 치고 있었다.
하마터면 나도 그녀를 따라서 박수를 칠 뻔했다.
그는 아이스 골렘 가운데에 있는 핵에 검을 꽂아 넣고 마무리를 지었다.
혼자서 옐로우 라벨인 아이스 골렘을 가지고 놀 정도의 실력, 몸풀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놀라면 오히려 내가 서운한데. 하하하.”
“아…. 그런가요.”
확실히 과거에 전설로 남아 있는 인물이 옐로우 라벨을 쉽게 쓰러뜨렸다고 치켜세워 주기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가지고 있는 물자는 한정적이니 그럼 서둘러서 주변 몬스터들을 정리해 보죠.”
할아버지는 단독으로 숲을 중심에 있는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우리는 따로 팀을 이뤄서 움직이기로 했다.
우리 셋이 모여 있어도 할아버지보다 부족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같은 길드인데도 직접 싸우시는 건 처음 봤어요.”
“아…. 그런가요?”
내 물음에 이성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귀검에 대한 전설은 많이 들었지만, 제가 왔을 땐 이미 은퇴하신 후였으니까요. 직접 보니까 괜히 전설이 아니네요.”
나 역시 그의 말에 동감한다.
족히 60대 후반은 되어 보이는데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것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전성기 때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게 한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까 차윤지의 스승이라는 것이 조금도 의심되지 않았다.
“자. 그럼 저희도 제 몫을 해야겠죠?”
이성연의 말에 인벤토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래요. 은퇴한 분께 지고 있을 수만은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