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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x9999-35화 (35/176)

35화 : 게이트 안의 게이트 (2)

한때 S랭크 최강자였으며 주변 헌터들은 그가 일부러 SS랭크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

귀신이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귀검’이라는 이명이 붙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헌터를 은퇴했다고 들었다.

확실히 내가 알고 있는 귀검의 얼굴과는 사뭇 달랐다.

“그럼 이분은 마스터께서 입이 닳도록 말하던 그 초월 헌터님이시겠군요.”

“에?! 할아버지! 왜 그런 걸 얘기하는 거야!”

얼굴을 붉히는 하루는 애써 못 본 척하며 귀검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런 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귀여운 여고생인데 말이지.

“안녕하세요. 최현이라고 합니다.”

“하하. 이제 은퇴한 몸입니다. 편하게 대해 주시지요.”

아무리 편하게 대하라고 해도 귀검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전설처럼 들은 게 많았다.

우리와는 세대가 달라서 매체에서 자주 보진 못했지만, 그런데도 그의 이야기는 입소문으로 들려왔다.

“할아버지도 이번 게이트 공략에 함께해 주시기로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네?! 저… 정말인가요?”

하루의 말에 내 귀를 의심했고, 멍하니 귀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은퇴하신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마스터께서 부르신다면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야죠. 하하핫.”

그녀가 단지 전 길드 마스터의 딸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따르는 것 같진 않았다.

다른 사람과 달리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거겠지.

“마지막으로 이번 게이트를 공략하시면 저희 쪽에서 따로 보상을 드리려고 합니다.”

“게이트 공략 비용인가요?”

“조금 다르네요. 이건 최현 씨를 꼬시기 위한 당근 같은 거죠. 바로 ‘에렌 셀’입니다.”

“……?!”

하루는 큰 상자에서 에렌 셀을 힘겹게 들어 올렸고, 나는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 어떻게…….”

“저희 신월 길드의 정보력과 자금력을 무시하지 마시죠. 자, 이제 남은 건 최현 씨의 선택뿐이네요. 이건 저번 일에 대한 사과의 의미도 있으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미 하루가 쳐 놓은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든 거다.

앞서 말했던 세 가지의 이유, 그리고 귀검과 팀을 이룰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에렌 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공략하기 위해 그녀가 만들어 둔 완벽한 덫이었다.

“이 정도면 제가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네요. 알겠습니다. 저도 공략에 참여할게요.”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공략은 3일 후니까 그때까진 편하게 대기하고 계셔도 좋아요.”

“아, 여기까지 왔으니까 잠깐 커피나 한잔하고 가.”

내 눈치를 살피던 유지한 아저씨가 멋쩍게 웃으며 밖으로 나를 안내해 줬다.

하루가 손을 흔드는 걸 마지막으로 그녀의 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이렇게 당해 버리면 오히려 통쾌하다고 해야 하나…. 기분 나쁘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마스터 성격은 여전하군요.”

옆에 있던 귀검은 우리 모습에 그저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저는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됩니다. ‘지병하’라고 합니다.”

귀검의 이름을 처음 들었기에 생소하면서도 왠지 친숙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저도 잠시 커피 좀 얻어먹고 가겠습니다.”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동네 평범한 할아버지로 보일 것이다.

다른 층에 있는 카페테라스로 이동해서 유지한 아저씨가 따듯한 커피를 타 줬다.

“원래 저렇게 막무가내니까 이해해 달라고 하긴 힘들지만, 이왕 이렇게 됐으니까 잘 부탁한다. 그리고 저번 일은…….”

“괜찮아요. 그땐 저도 감정적이었으니까요.”

물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는 없을 거다.

전에는 진심으로 신월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런 일이 있고 나선 마음이 사라졌으니까.

유지한 아저씨는 내 옆자리에 앉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저 녀석이랑 오래 지냈지만, 가끔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사실 이렇게까지 너한테 집착하는 이유도 모르겠어. 원래 독특한 녀석이지만, 너한테는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갖고 있거든.”

“그런가요……?”

“설마…! 안 돼! 아직 저 녀석은 고등학생이란 말이야! 아니지…! 성인이 돼도 안 돼!”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아저씨에게 뭔가 말하려다가 이내 그만뒀다.

하여간 이 길드 사람 중에서 정상을 찾는 건 무리인 것 같다.

“초월 헌터라고 들었습니다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어 가는 귀검에게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신월 길드의 자문가로 있다 보니 우연히 들었거든요.”

우연은 무슨, 하루 녀석이 다 말한 거겠지.

“영광이네요.”

“…네?”

“아마 저는 이번 게이트 공략을 마지막으로 다신 활동을 하지 못할 겁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유지한 아저씨도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이를 먹으니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군요. 무리한다면 몇 번쯤은 더 가능하겠지만, 만약 제가 실수를 하면 팀원들까지도 위험할 수 있으니 정상적인 상태로는 이번이 마지막일 겁니다.”

“영광이라뇨. 오히려 제가 더 영광이죠.”

“하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하지만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유망주와 마지막으로 함께 싸울 수 있다는 건 제게 각별해요.”

그의 눈에는 묘한 아쉬움과 기쁨, 그리고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잠시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커피만 홀짝거렸다.

그 시간이 불편하거나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

“다 모이신 것 같으니 던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우리를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어쩐지 힘이 없는 그의 눈은 보고 있으면 나까지 기운이 빠질 것 같았다.

“먼저 저는 이번 게이트 공략팀의 리더를 맡게 된 ‘이성연’이라고 합니다. 뭐, 다른 분들은 같은 길드원이니 알고 계시겠지만, 용병이 한 분 있으니까요.”

그의 시선이 살짝 나를 스쳐 지나갔다.

“저는 ‘신다희’라고 해요. 통신계 헌터예요.”

나보다 조금 연상으로 보이는 그녀는 갈색빛 생머리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이 인상적인 그녀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 저는 최현이라고 합니다. 어쩌다 보니 용병으로 이번 공략에 참여하게 됐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이거 젊은이들 사이에 눈치 없게 늙은이가 껴 버렸구만. 민망하지만, 제 소개는 안 해도 될 것 같군요.”

할아버지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마치고, 이내 이성연이 입을 열었다.

“이번 게이트 공략은 이렇게 저희 네 사람이 맡게 되었습니다. 다들 이 게이트가 어떤 형태인지 알고 계실 테니 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10명 정도가 공략의 적정 인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SS랭크 헌터가 파티에 포함되든지.”

이성연은 이번 공략 파티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빼죽 내밀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 정확하게 들은 이야기는 없지만, 이성적이고 판단력이 뛰어나서 신월에서 나름 신뢰를 받고 있는 헌터라고 한다.

게이트 공략에서 자주 리더 역할을 맡는 것 같다.

“그럼 투덜거리는 건 이쯤 하고, 본격적으로 던전 공략에 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퀭한 눈이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묘한 카리스마가 보였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하자면, 저희의 목적은 게이트를 해석하고 파헤치는 게 아닙니다. 안전하게 게이트를 공략해서 없애는 거죠.”

이성연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건 우리의 역할은 던전을 연구하는 게 아니었다.

게이트의 공략과 던전의 완전 공략.

“지금 저희 앞에 있는 이 게이트를 1번 게이트, 그리고 게이트 안에 있는 다른 게이트를 2번 게이트라고 부르겠습니다. 1번 게이트는 저희 신월 길드의 정찰팀 덕분에 어느 정도 정보가 있습니다. 살펴보셔서 알겠지만, 1번 게이트는 설원 지형입니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말이었다.

사실 설원 지형은 그냥 이동하는 것조차 버거운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몬스터를 경계하고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최악, 그 자체였다.

그나마 내겐 빙결의 갑옷이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다른 팀원들에겐 끔찍한 일이지.

“첫 번째 목표는 1번 게이트를 공략하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지만, 1번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으로 게이트가 없어진다면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 될 겁니다. 만약 1번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서도 게이트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2번 게이트로 들어가야겠죠.”

“혹시 중간에 나올 수도 있나요?”

내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현실적인 물음이었다.

일반적인 게이트는 공략 도중에도 출구를 통해 다시 나오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갇혀 있었던 게이트는 그게 불가능했다.

만약 이 게이트도 그때와 같다면 들어가서 다시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확답을 드리긴 어렵군요. 정찰팀은 정찰 후에 아무 문제 없이 나올 수 있었지만, 저희도 같을지는 모르는 거니까요. 하지만 항상 최악을 가정해야 하니, 못 나온다는 가정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듣던 대로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가만히 이성연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래도 몸의 떨림이 나아지는 걸 느꼈다.

“들어가면 바로 1번 게이트의 목표 지점까지 이동할 겁니다. 안전한 장소를 확보한 뒤에 게이트에 있는 몬스터들을 정리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이성연은 우리를 쭉 훑어보곤 고개를 끄덕인 뒤, 가장 먼저 게이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귀검 할아버지, 신다희가 순서대로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내가 게이트로 몸을 집어넣었다.

약간의 어지러움과 무언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새하얀 설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성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 눈이 내리지 않지만, 금방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겠군요. 서둘러서 이동하도록 하죠.”

다들 갑옷 안에 내의를 껴입고 있었다.

나는 바로 빙결의 갑옷을 착용한 덕에 아무런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쩐지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기분인걸.

조금 이동하자마자 이성연이 말했던 대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변 시야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으니 긴장감을 유지하며 이동하겠습니다.”

쿠르르륵!

이성연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 앞에 눈이 쌓인 바닥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스르릉.

“크에에엑!”

우리 앞에 튀어나온 것은 ‘아이스 잭’이라는 그린 라벨에서도 하위에 랭크돼 있는 몬스터였다.

그다지 강한 놈은 아니었기에 다들 당황하지 않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온몸이 회색 털로 덮여 있고 입에 길쭉한 송곳니가 자라 있었다.

평소에는 네 발로 움직이지만, 전투 때는 일어나서 날카로운 발톱을 무기로 쓴다.

“온다!”

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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