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게이트 안의 게이트 (1)
“여기서 만나다니…. 신기하네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강주성이었다.
그는 나와 이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레모네이드를 빨대로 쭉 빨아들였다.
“협회 바로 앞 카페니까 그렇게 신기한 일은 아니긴 하지만…. 아무튼, 다시 만나서 반갑네요.”
나 역시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당장에라도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같이 차 한잔하자고 한 게 이유리여서 거절할 수 없었다.
찝찝한 기분을 풀고 싶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날은 죄송했어요.”
“아…. 네?”
이유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열었고, 강주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보신 것처럼 저는 실력도 없고 자존심만 강한 한심한 애거든요. 솔직히 최현 씨가 아니었으면 저는 다음 시험에서도 D급으로 진급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럴 리가요. 분명 이유리 씨도…….”
“아뇨. 시험관님이 말한 것처럼 저는 최현 씨를 보고 많은 걸 배웠어요. 헌터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는 것도 없으면서 설치는 애였으니까요.”
갑작스러운 자기 비하에 나는 무어라 말도 못 하고 입만 뻥긋거리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거야?
“뭐, 언젠간 필요한 일이었어요. 단지 형이 기폭제가 되어 줬을 뿐이죠.”
“친한 친구인데 생각보다 담담하시네요.”
강주성은 나와 달리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유리를 보고 있었다.
콰직!
“크아악!”
이유리의 신발이 강주성의 발등을 내리찍었고, 카페에는 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프겠다.
“몬스터에 대한 지식도, 헌터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것도 터무니없이 부족했어요.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애써 외면했던 것뿐이고, 이 자식 말처럼 최현 씨 덕분에 다시 한번 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거든요.”
“저도 죄송해요. 그때 좀 더 제대로 상황을 설명하고 의견을 모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어요.”
진심이었다.
그때 다른 팀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생각하는 걸 전달했다면 나중에 그녀가 나와 비교당하며 모욕감을 느끼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래서 앞으로도 옆에서 더 많이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괜찮으시면 저와 팀을 이뤄 주시면 안 될까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녀가 나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잠… 잠깐…! 뭐 하는 거예요!”
당황한 나도 그녀를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리기 시작했다.
전에 봤던 모습과 달리 진심으로 헌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한 것 같긴 하지만…….
“죄송해요. 거절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진심으로 저 스스로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저 스스로를 챙기는 것도 버거워서 그 부탁은 들어 드릴 수가 없네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무리한 부탁드려서 죄송해요.”
그녀의 얼굴엔 아쉬움이 어려 있었지만, 더 이상 떼를 쓰진 않았다.
나 역시 평범한 헌터들과 팀을 이루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직 부족한 만큼, 낮은 층에서 실력을 다듬고 올라가는 것도 괜찮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온전히 내게만 신경 쓰고 싶었다.
지이잉-
한창 이야기를 하던 중에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밖으로 나온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해?”
전화기 너머의 유지한 아저씨의 목소리는 묘하게 조급해 보였다.
게이트에서 나온 이후로 아저씨와 따로 연락한 적이 없었기에, 조금 긴장감이 서렸다.
“무슨 일이신가요?”
약간 날이 선 내 목소리에 아저씨 역시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얘기라…. 만나서 얘기하면 안 될까? 시간 괜찮아?”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전화를 끊고 다시 두 사람에게 돌아간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뇨. 괜찮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이유리의 말에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같은 팀으로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네, 저도 그렇게 되길 바라요.”
어쩐지 조금 시원해진 얼굴의 이유리를 보니, 내 마음도 편해졌다.
서둘러 인사를 마친 뒤 나는 곧장 신월 아지트로 향했다.
***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아저씨의 전화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건 최소한의 예의였다.
던전 최상층에서 아저씨를 만났을 때, 내가 아저씨에게 진 빚은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것이었다.
아마 더 심각한 일이 있었다고 해도 난 아저씨가 부탁한다면 쉽게 거절하지 못하겠지.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아뇨. 다행히 가까운 곳이어서 괜찮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인가요?”
내 물음에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아저씨의 시선이 향한 곳엔 하루가 있었다.
굳은 표정의 하루는 아무래도 전번의 일 때문인지 나를 상당히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먼저 저번 일을 사과드릴게요. 그땐 제가…….”
“뻔한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네요. 사과는 받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차갑게 받아 내자, 순식간에 주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루는 이내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더 이상 최현 씨의 사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길드에 와 달라는 부탁도 드리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번 일은 신월 길드의 마스터로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내 하루의 손가락 끝이 큰 모니터로 향했다.
“…이건 게이트 내부의 지도인가요? 잘 만들어졌네요.”
전에도 느꼈지만, 신월은 공략뿐만 아니라 게이트 정찰에도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
가만히 지도를 살피던 나는 하루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예상치 못한 표시가 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잠깐…. 왜 여기에 게이트 입구 표시가 있는 거죠?”
분명 내가 보고 있는 건 게이트 지도인데 그곳에 또 게이트 입구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할 수 없었다.
“보고 있는 그대로야. 이번에 우리가 4층에서 발견한 게이트다. 게이트 내부에 또 다른 게이트 입구를 발견했어. 지금까지는 없었던 형태의 게이트지.”
하루 옆에 있던 유지한 아저씨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협회에는 보고해 둔 상태지만, 아무래도 그쪽에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 우리에게 게이트 공략을 의뢰해 왔거든.”
“위험 부담을 안고 싶지 않다는 것이군요.”
“그렇겠죠. 전에 최현 씨가 갇혀 있었던 게이트 사건 때문에 협회는 상당한 곤욕을 겪었으니까요.”
확실히 헌터 협회는 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려 있는 곳이다.
사건이 터지면 항상 질책을 받는 곳이니 이런 위험한 일에서 발을 빼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이 게이트 공략에 최현 씨도 참가해 주셨으면 해요.”
“…어째서 저죠?”
내 질문에 잠시 방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으니까.
잠시 하루의 눈치를 살피던 유지한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네가 그런 반응을 보일 만하다는 거. 이건…….”
“제가 말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하루가 아저씨의 말을 끊고 내게 다가왔다.
“이유는 3가지예요. 첫째, 저희 쪽 전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게이트의 수가 많이 늘어난 것에 비해서 헌터의 수가 턱없이 모자라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최현 씨의 실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충분히 전력을 채워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두 번째는 최현 씨의 초월 능력 때문이에요. 게이트의 안전도, 상황도 알 수 없다면 목숨이 여러 개 있는 최현 씨의 초월 능력은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건 저를 도구로써 이용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라이프가 많은 내가 위험한 곳에 먼저 들어가서 확인할 수 있다는 건 파티의 안정감이 높아진다는 걸 의미했다.
유지한 아저씨가 내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하루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하지만 여러 가지 변명을 억지로 만들어 내면서 거짓말로 이용하는 것보단 솔직한 게 낫지 않나요?”
기형 게이트에 2년이나 갇혀 있었던 내게 기형인 걸 알면서도 게이트 공략팀에 합류하라는 것은 내 기억 속 트라우마를 난도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녀는 나를 피하지 않고 직접 맞부딪히고 있었다.
“마지막은 뭐죠?”
“사실 마지막 이유가 가장 커요. 최현 씨의 트라우마 극복이죠.”
예상치 못한 말에 입만 뻥긋거리고 있으니 하루가 다시 말할 타이밍을 채 갔다.
“현재 던전은 이상할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예요. 저번에 최현 씨가 갇혔던 형태의 게이트가 다시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고, 지금 저희 공략하려는 게이트처럼 새로운 형태의 던전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죠. 그럴 때마다 최현 씨의 트라우마가 발목을 잡는다면 최현 씨는 물론이고 팀원들에게까지 치명적인 위험 요소가 될 거예요. 기왕이면 미리 대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극복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에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앞으로 제 사적인 일에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렇네요. 그럼 마지막은 패스.”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미 저런 말을 들어 버렸으니 이제 나도 모르게 트라우마라는 것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할 텐데, 이제 와서 패스라니.
도저히 못 당하겠네.
물론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저번에 혼자서 게이트에 들어갈 때도 온몸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떨렸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번 제안도 여러 가지 핑계를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무섭다는 게 가장 컸다.
어쩌면 내가 쉬운 게이트에서 수련한다고 했던 것도 다시 위험에 빠지는 게 두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절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만약 최현 씨가 거절하신다면 저는 직접 게이트를 공략하러 들어갈 겁니다.”
“뭐?!”
“네?!”
하루의 말에 나는 물론, 유지한 아저씨까지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농담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더더욱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건 협박인가요?”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하루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이죠. 이 정도면 제 의지를 충분히 보여 드리는 거겠죠.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할 겁니다. 돈 같은 건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하지만 제 소중한 길드원들이 무사히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는 확률이 오른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 드리죠.”
어떻게 보면 하루만큼 헌터 길드장이라는 자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솔직하면서도 대담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고 말하면서도 누구보다 아끼고 있다.
우습게도 나는 그녀가 말한 세 가지 이유 중 하나도 반박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열심히 외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인정했으니까.
똑똑.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이런,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작은 키의 백발노인은 하루를 보자마자 따듯하게 웃었다.
하루는 노인에게 달려가 바로 품 안에 안겼고, 방금까지 냉소적이던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하하, 여전히 어리광쟁이시군요.”
“자주 보러 온다며! 자주 온다고 했으면서……!”
천천히 부드럽게 하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노인의 모습은 영락없이 귀여운 손녀를 보는 할아버지였다.
“혹시 ‘귀검’이라는 이명을 들은 적 있어?”
두 사람의 애틋한 만남을 보고 있던 내게 유지한 아저씨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예상치 못한 이름에 놀라서 고개를 휙 돌렸다.
헌터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으니까.
“설마…….”
“그래. 저분이 그 귀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