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프x9999-33화 (33/176)

33화 : 어쨌든 데이트 (2)

“헉…. 헉…….”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병실에 들어서자 율이가 나를 보고 빙긋 웃는 게 보였다.

일단 율이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걸 내 눈으로 보자 마음이 놓였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오빠! 폰은 장식이야? 왜 맨날 전화를 안 받아?”

“아…. 그러게…….”

상황 파악을 위해 눈알을 굴리고 있는 사이, 율이가 나를 잠깐 쏘아보고 고개를 돌렸다.

“오빠가 다시 헌터 일하는 거 딱히 말리진 않겠지만, 나는 걱정된다고. 전화로 거짓말한 건 미안해.”

…대충 그렇게 된 거였군.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율이 혼자만 있게 해 놓고, 돌아와서도 전혀 신경을 못 써 주고 있었다.

한심한 오빠네.

죄를 지은 사람처럼 율이 앞에 고개를 떨구고 있자, 율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는 잘할 거라고 믿고 있어. 그래도 내가 걱정하는 건 이해하지?”

“응…. 알겠어.”

율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훨씬 똑똑하고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만약 반대로 율이가 헌터 일을 한다고 하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렸을 거다.

하지만 율이는 우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나를 이해해 줬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는 거야?”

“그렇지, 뭐. 아마 내일부턴 바빠질 거 같아.”

율이는 ‘그렇구나.’라며 혼자 중얼거리며 묘하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항상 혼자인 율이를 찾아오는 건 당연히 나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병원비 때문에 내가 헌터 일을 하는 걸 알고 있는 만큼 율이는 떼를 쓰지 않았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 외출 허가받아 놨으니까 나가자.”

외출이라는 말에 율이의 눈이 바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매일 병실에 갇혀 있으니 답답했겠지.

“다 갈아입었어!”

“버… 벌써?!”

나갈 채비를 마친 율이가 내 팔을 끌고 서둘러 병실 밖으로 걸어갔다.

“시간이 아깝잖아! 빨리 가자!”

율이와 외출을 하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어쩐지 낯선 느낌이었다.

그래도 율이가 마냥 즐거워하는 걸 보니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할 거야?”

“글쎄. 일단 옷부터 살까?”

“옷?!”

“너 옷 산 지 오래됐지? 지금 입고 있는 것도 2년 전에 있었던 옷이잖아.”

내 말에 율이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환자복만 입어서 몇 번 안 입은 옷이야. 난 이 옷 좋은걸.”

배시시 웃는 그녀를 보고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아무튼, 요즘 내가 제법 돈을 많이 벌고 있거든.”

그렇게 말하곤 율이 귀로 고개를 돌려 소곤거렸다.

“율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벌어.”

“저… 정말?”

“이번에 D급 헌터로 진급도 했으니 앞으로 더 많이 벌걸?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옷 잔뜩 사 줄게!”

“…….”

기쁜 표정을 짓던 율이가 금세 어두워지는 걸 보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율이 앞으로 걸어간 나는 율이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진짜야. 그래도 예전부터 너한테 내가 거짓말한 적은 없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오빠 기 좀 세워 줘.”

그제야 편안하게 웃음을 짓는 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비싼 옷으로 잔뜩 사야지! 명품 가자!”

“어? 자… 잠깐만…. 기다려 봐…. 율아……?”

***

불과 4시간 전에 했던 말을 이렇게 후회할 줄이야.

옷이 비싸거나 많이 사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상 율이가 마음에 들어서 옷을 사는 건 5개 중 1개 정도였기에, 그것들을 모두 입어 보는 걸 기다리는 게 고역이었다.

벌써 쇼핑몰을 몇 번 돌았는지 모르겠다.

“오빠! 이건 어때? 너무 짧나?”

“어…. 이쁘다. 완전 잘 어울려.”

“…아직 안 봤잖아!”

뭐, 그래도 율이가 좋아하니까 다행이다.

“오빠 괜찮아? 헌터가 왜 이렇게 체력이 부족해?”

“기다림과 지루함에서 오는 정신적인 피로감이거든?”

“이제 대충 다 산 거 같은데? 이거면 몇 년은 입겠다.”

확실히 양손이 부족할 정도긴 했지만, 2년 만에 사는 옷이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많은 양도 아니었다.

“옷은 잠시 보관함에 넣어 놓고, 밥 먹으러 가자.”

매일 먹는 병원 밥이 얼마나 맛없는지 알고 있는 나는, 이럴 때라도 율이에게 제대로 된 밥을 먹여 주고 싶었다.

어디까지나 오빠로서 내가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걸지도 모르지만…….

“여기 너무 비싸 보이는데? 오빠 진짜 괜찮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지?”

율이와 함께 들어온 곳은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당연히 무리하는 거지만, 지금은 돈이 얼마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맛있는 걸 먹여 주고 싶고, 율이가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내길 바랄 뿐이었다.

“오빠 오늘 진짜 이상하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이런 거 보면 나중에 나쁜 일 생기는 플래그던데.”

“…그런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만화 보면 꼭 그러더라…. 무슨 일 생기면 ‘아 그래도 이런 거 해 줘서 다행이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어…….’”

“멀쩡히 살아 있거든?! 앞으로도 살아 있을 거거든?! 재수 없게 그게 무슨 말이냐?!”

메뉴판을 받아서 펼치는 순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금액에 입이 떡 벌어졌다.

“오빠…. 지금이라도 나갈까?”

“무슨 소리야! 간만에 여동생님과 데이트인데 이 정도 밥도 못 사 줄 거 같아?!”

이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너무나 큰 금액이었다.

스테이크 하나에 거의 10만 원 정도라니….

이 돈이면 라면을 몇 박스나 살 수 있는데!

“오빠? 최현 씨? 식은땀이 흐르는데요?”

“아냐! 괜찮아.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내가 다시 이런 레스토랑에 올 일이 있을까 싶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 죄송한데 혹시 추천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 처음 와 봐서.”

“저희가 추천드리는 메뉴는…. 이거랑…. 이게 가장 잘나가고요.”

“그럼 그렇게 주세요.

손님이 적어서인지 메뉴는 금방 나왔고, 우리는 어색하게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으음…….”

“음…….”

우리 둘은 밥을 먹는 동안 딱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맛이 어떤지 말하진 않았지만,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게 정말 맛있는 건가? 이 가격에 먹는 게 맞는 걸까?

“…먹을 만하네.”

“그러게.”

한동안 열심히 먹는 것에 열중하다가 율이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다음부턴 삼겹살 먹자.”

“푸흡…….”

우리 입맛에는 삼겹살이 가장 훌륭해 보인다.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나니 어느새 병원 통금 시간이 되었다.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옷을 정리해서 율이에게 넘겨줬다.

“오늘 너무 재밌었어. 고마워, 오빠.”

“고맙긴, 항상 제대로 해 주는 것도 없는데…….”

“그렇지 않은걸! 오빠가 평소에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고 있어. 나도 헌터라는 직업에 대해서 많이 공부했거든.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오늘도 옷도 너무 마음에 들고 저녁에 먹은 스테이크도 신기했어! 그다음에 봤던 영화도 재밌었고.”

“맛있진 않았구나.”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율이의 모습에 역시 내가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말에 위로를 받고 있으니…….

“다음에 또 데리고 나와 줘. 알았지?”

“알겠어. 너도 들어가면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손을 흔들고 병원으로 들어가는 율이를 보고 묘하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율이가 건강해지면 같이 살 수 있는 날도 오겠지.

그리고 그때 율이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주려면 내가 좀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

조용한 카페에서 만난 유지연과 서관웅은 내게 여러 가지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 서류들을 다 읽기도 전에 다시 말을 걸어왔다.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최현 씨도 다른 유명한 헌터들처럼 이름을 날릴 수 있도록 저희가 적극적으로 도와드릴게요.”

“좋아. 그럼 먼저 자네 초월 능력에 대해 들어 보도록 하지.”

서관웅은 까무잡잡한 피부, 큰 덩치의 40대 정도의 중년 남자였다.

짧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피부색과 잘 어울렸고, 척 봐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의 살벌한 눈빛 때문에 묘하게 나까지 기가 죽었다.

“설명하기 조금 어려운데…. 쉽게 말하면 게임 캐릭터의 능력을 얻었어요.”

“게임… 캐릭터요?”

유지연은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과 함께 나와 서관웅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말 그대로 RPG 캐릭터처럼 게임 능력을 갖게 된 겁니다. 예를 들면 인벤토리를 쓸 수 있다든지, 레벨이 생겨서 몬스터를 쓰러뜨리면 더 강해진다든지…. 그런 겁니다.”

“정말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건가?”

“네, 심지어는… 목숨도 하나가 아니죠.”

“……!”

두 사람은 나를 보고 입을 벌린 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나왔던 어떤 초월 능력보다 좋은 능력일지도 모르겠군.”

“그러게요. 믿기 힘드네요.”

내 표정을 살피는 둘은 여전히 내 말을 완벽하게 신뢰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보통 초월 능력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하나의 능력을 갖게 되는 걸 말하지. 그런데 자네 말만 들어 보면 복합적으로 여러 능력을 한 번에 얻은 건데…….”

그는 조금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서관웅의 말을 들어 보니 내 능력이 다른 초월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쉽게 말하면, 다른 초월은 인벤토리 능력을 얻는다거나, 레벨이라는 능력을 얻는다거나, 혹은 게임처럼 목숨이 여러 개 생기는 능력 중 하나만 갖게 되겠지. 그런데 자네는 그 능력들을 한 번에 갖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초월 능력 중에서 가장 사기적인 능력이야.”

“확실히 그렇네요.”

“물론… 사실일 때 얘기지만.”

서관웅의 눈빛이 차갑게 나를 훑었다.

“당장 보여 드릴 수 있는 능력은 인벤토리뿐이네요.”

시야에 보이는 가방 모양의 아이콘을 눌러 인벤토리 창을 열었고, 내 앞에 있는 커피를 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현실에서는 커피가 사라지고 인벤토리 한편에 커피 모양의 아이콘이 생겨났다.

“이렇게 물건을 집어넣거나 빼는 게 가능합니다.”

다시 커피를 인벤토리에서 테이블 위로 잡아당겼다.

“확실히 신기한 능력이군요. 보급팀에서 활약해도 좋을 거 같네요.”

어디선가 들었던 얘기 같은데.

“일단 이걸로 초월 능력을 가진 헌터라는 건 증명됐군. 의심하는 것도 이해해 주길 바라네. 어쨌든 우리는 위쪽에서 보낸 사람일 뿐이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거치려면 필요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약을 하게 되면 저는 정확히 어떤 혜택을 받게 되는 건가요?”

“가장 큰 혜택이라고 하면 성장할수록 거기에 맞는 장비를 지원해 줘요. 아시다시피 상위 헌터들이 착용하는 장비는 그 가격이 집값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나죠. 그것만으로도 저희와 계약하는 이점은 충분할 겁니다.”

유지연의 말처럼 장비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5만 원도 채 되지 않는 허름한 장비가 있는 반면에, 억 단위가 넘어가는 엄청난 장비도 존재한다.

그걸 공짜로 지원해 준다는 건 확실히 엄청난 혜택이긴 했다.

“그리고 최대한 최현 씨가 원하는 팀을 만들어 드릴 수도 있어요. 게이트 의뢰도 최현 씨가 우선적으로 선점할 수 있는 특권도 갖게 되죠.”

“…그렇군요.”

그녀의 말은 반가우면서도 묘하게 불쾌했다.

지금까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다른 초월 헌터들이 그런 혜택을 받고 있었다는 거잖아.

특히 게이트 의뢰를 선점할 수 있다는 건 헌터에게 있어서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뛰어난 정찰팀이 정찰을 한 게이트는 정보도 많고 그 안전성도 보장된다.

같은 등급의 몬스터라도 강함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기왕이면 등급은 높고 약한 몬스터를 잡는 게 헌터에겐 유리하다.

게이트 의뢰를 선점할 수 있다는 건 그런 걸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는 의미다.

“분명 나중에 저희 협회에 큰 힘이 되어 주실 거예요.”

유지연은 조심스럽게 내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

가만히 계약서를 내려다보고 있는 내게 서관웅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하는 건 나도 이해하네. 이런 관행이 좋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단순히 개개인의 공정함보다 공익적인 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인재를 찾아서 키우고, 그 인재가 던전에서 활약하는 건 전체에게 중요한 문젤세.”

“알고 있습니다. 헌터의 최종 목적은 던전의 완전 공략이니까요.”

위층을 공략할수록 새로 지켜야 하는 층수가 많아진다.

예를 들면 최종 공략층이 3층이라면 1, 2층에 생기는 게이트만 공략하면 되지만, 최종 공략층이 높아질수록 게이트를 공략해야 하는 층수가 많아진다.

즉, 점점 헌터의 일손이 부족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협회가 조금이라도 많은 인재를 확보하려는 건 당연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역시 저는 안될 것 같습니다.”

“네? 어째서요? 저한테는 하고 싶다고 연락을…….”

“만약 제가 S급 헌터가 될 재능이 있다면 조금 시간은 더 걸리더라도 결국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제게 와야 할 장비나 혜택들을 다른 헌터들에게 나눠 준다면 좀 더 다수에게 이로운 결정이 되지 않을까요?”

“그건…….”

유지연이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서관웅이 손을 살짝 들어서 그녀를 막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알고 있다.

약한 헌터는 금방 목숨을 잃는 일이 많으니까 초월 헌터에 비해 투자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겠지.

그렇기에 서관웅이 그녀를 막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억지로 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부디 이번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해 주게.”

자리에서 일어난 서관웅이 카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자네 같은 인재가 있다는 걸 알아서 기쁘군. 이건 진심이야.”

서관웅이 카페에서 나갔고, 옆에 있던 유지연은 황급히 서류들을 정리해서 가방에 집어넣고 그녀를 따라갔다.

“자… 잠깐만요! 같이 가요, 과장님!”

확실히 나중을 생각하면 안정적인 일이 필요했지만, 이렇게 억지로 하고 싶진 않다.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만큼 내가 더 노력해서 메꾸면 되는 거니까.

율이를 핑계 삼아서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는 건 잘못된 거겠지.

“어…? 최현 씨?”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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