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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x9999-32화 (32/176)

32화 : 어쨌든 데이트 (1)

“고생했어. 그리 어렵진 않았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하루 씨를 만나게 해 주세요.”

유지한 아저씨는 내 눈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현아, 이건…….”

아저씨는 뭔가 말하려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반대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알았어. 따라와.”

아마 박민웅이 내가 있던 게이트가 어디인지 알게 된 건 하루의 짓일 것이다.

애초에 여기까지 계획하고 나를 혼자서 게이트 안으로 들여보냈던 거겠지.

하루의 방 앞에서 멈춰 선 아저씨를 뒤로하고 혼자 방으로 들어갔다.

덜컥.

문을 열자마자 하루는 내가 올 걸 예상했다는 듯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즐겁나요?”

“어머. 말씀이 심하시네요. 저는 최현 씨의 성장을 촉진시키고 싶을 뿐이에요.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런 지루한 복수 따위는…….”

“지루한 복수…. 당신한테는 내 복수가 그저 시간 낭비로만 보였던 거군.”

콰앙-!

하루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자 그대로 테이블이 내려앉았다.

조금 당황한 하루가 뒤로 물러났고, 밖에 있던 아저씨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내가 아저씨를 쏘아보자, 아저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했다.

“아저씨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제가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니까.”

그 정도는 나도 예상했다.

내가 아는 유지한 아저씨는 정이 많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 아저씨를 움직일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거죠?”

“저는 최현 씨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그리고 더 성장하면 저희 길드에서 크게 활약할 거라고 믿고 있죠. 그런데 그런 별것도 아닌 인간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안타까웠을 뿐이에요.”

그렇게 소리치는 하루의 눈빛이 아까보다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화를 내려는 순간, 하루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있으면 어쩌면 모든 몬스터를 남김없이 없앨 수 있을지도 몰라.”

“…….”

하루의 눈 안에는 내가 있었다.

게이트 안에서 이를 갈며 복수심으로 버티고 있던 내가 있었다.

어리기에 자신 안에 있는 복수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그 사람은 최현 씨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인간이었어요. 자신의 죗값을 받았을 뿐이죠. 그리고…….”

“그건 당신이 판단할 일이 아니야. 만약 2년 전에 당신이 날 만났다면 지금처럼 관심을 줬을 것 같아?”

“…….”

내 물음에 하루는 입술을 들썩거리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당신이 별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그 남자는 내게 아무것도 없었을 때도 옆에 있어 줬었어. 그런 사람을 방금 내 손으로 죽이고 온 거라고.”

꽈악.

움켜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만약 박민웅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내게 빌면서 용서를 구했더라면 나는 그에게 복수할 수 있었을까?

그대로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내게 그 정도의 의미였다.

게이트에 갇혀서 그 오랜 시간 동안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한 원흉이었지만,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저는…….”

“앞으로 볼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말을 마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방에서 빠져나갔다.

문 앞에 서 있는 유지한 아저씨는 여전히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신월 길드 아지트에서 나오고 나서야 내 폐로 공기가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게이트에서 코볼트를 어떻게 잡았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보스인 ‘트롤’까지 쓰러뜨린 뒤였으니까.

“괜찮은 거야? 형씨…….”

“괜찮아. 괜찮아야지.”

그에게 쓰레기라서 고맙다고 했던 건 진심이었다.

몬스터보다 더한 몬스터가 되어 버린 그를 죽이는 건 어떤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머리가 깨질 거 같았다.

D급 헌터 시험을 치르고 바로 합격해 버린 데다가, 유지한 아저씨에게 따로 의뢰를 받아서 혼자서 게이트를 공략하러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도 못한 복수를 끝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하아…. 피곤해.”

집으로 돌아오자 어느 때보다 편안한 감각이 내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줬다.

이곳에 살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마치 오래 살았던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눈을 감은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과 함께 잠이 들었다.

***

띵동-

초인종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는 건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자는 동안 누군가에게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몸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를 보채기라도 하듯 다시금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네…! 나갑니다.”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친 뒤, 문을 열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머. 제가 잠을 깨웠나요?”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건 유지연 대리였다.

전에 봤을 때와 달리, 머리를 풀고 있는 그녀는 갈색빛 곱슬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옷도 정장이 아닌 평상복이었고, 차가웠던 첫인상과 전혀 다른 느낌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저기…. 그렇게 뚫어져라 보시면 조금 민망한데.”

그녀가 어색하게 웃은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생각해 보니 오늘은 평일도 아니라 토요일인데, 그녀가 나를 찾아올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업무 관련 이야기인데, 공식적인 건 아니라서요. 어제저녁부터 연락을 드렸는데 받질 않으셔서 직접 찾아왔어요.”

“음…. 일단 알겠습니다. 금방 준비해서 나올게요.”

마음 같아선 본론부터 듣고 싶었지만, 자다 깬 얼굴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려던 차에, 그녀가 문을 붙잡았다.

“오래 걸리실 거 같은데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도 되나요?”

“아…. 그러세요.”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허락했고, 유지연 대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빙글빙글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구는 거의 없었다.

기본 옵션으로 있는 몇몇 가전제품 외에는 깔린 이불이 전부였으니까.

“…너무 휑하죠? 이제 막 이사 와서요.”

“깔끔해서 좋네요.”

접이식 테이블을 꺼내서 그녀 앞에 펼쳐 주었고, 바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집에 믹스커피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급히 욕실로 들어가서 세면을 시작했다.

잠깐…. 우리 집에 동생 외에 다른 여자가 온 적이 있었던가…….

이건 뭔가 엄청난 이질감이…….

“오래 기다리셨죠.”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주말이라 한가하거든요.”

나름 믹스커피를 맛있게 타는 건 자신이 있었기에 당당하게 그녀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감사해요. 잘 마실게요.”

“그래서, 갑자기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뭔가요?”

그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진급 시험 준비를 할 때 유지연 대리에게 여러 도움을 받긴 했으나, 이렇게 쉬는 날까지 찾아올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저도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최현 씨는… 초월 헌터인가요?”

“……!”

커피를 마시려다가 하마터면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건 제 추론이 아니라, 저번 진급 시험 때 최현 씨 팀을 맡았던 ‘서관웅’ 과장님의 추론입니다. 최현 씨의 과거 데이터를 보면 E급 헌터들 중에서도 굉장히 낮게 평가되어 있어요.”

그렇겠지.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게이트에 계셨고, 나온 뒤에 얼마 안 돼서 바로 진급 시험을 보셨죠. 과장님 말씀에 의하면 최현 씨는 C급…. 전투 능력까지 뛰어나다고 가정했을 땐 B급 정도의 수준이라고 하셨어요.”

“네?! 그건… 아무리 봐도 좀 아닌 거 같은데.”

나 역시 지금 헌터 등급에 비하면 조금 더 높은 수준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B급 헌터는 너무 과분한 평가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과장님 말씀에 의하면 최현 씨가 역으로 공격해 오진 않았지만, 자신의 공격을 피할 때 움직임부터 달랐다고 하시더군요. 적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고 확실하게 피했다고…….”

그녀의 말을 들을 때마다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내가 초월 헌터인 걸 밝히는 게 맞는지,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계속 숨기는 게 맞는지…….

애초에 그걸 숨겼던 이유는 복수 때문이었는데, 이젠 그것마저 끝났으니까 굳이 숨길 필요가 없는 건 사실이다.

어차피 유지연 대리의 말을 들어 보면 그저 추론일 뿐, 확실한 증거나 근거는 없었다.

“이걸 봐 주시죠.”

유지연 대리가 가방에서 꺼낸 건 몇 장을 묶은 서류였다.

“비밀 유지 계약서입니다. 최근에 헌터 수가 과거보다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던전에서 이상 현상의 발생으로 인해 인재를 많이 잃은 것도 있지만, 그로 인해 새로 들어오는 헌터의 수가 줄어든 것도 원인이죠.”

그녀는 내가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더군다나 초월 헌터의 출현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협회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겁니다.”

“죄송한데…. 잘 이해가…….”

“쉽게 말하면 협회가 비공식적으로 스폰이 되어 준다는 것이죠. 초월 헌터가 무사히 성장하여 던전에서 제 몫을 하게 만들 때까지.”

유지연 대리의 말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그건…….”

“특정 대상에 대한 특혜죠. 아마 공식적으로 알려지면 조용히 넘어가지 못할 만한 일이니까요.”

헌터 협회는 국가가 관여하고 있는 국가 조직이었다.

그런 곳에서 누군가에게 특혜를 주고 뒤에서 몰래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그녀 말대로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사실 저도 확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게이트 안에서 몇 등급이 올라서 나올 수 있는 건 초월 외엔 다른 게 떠오르지 않는군요. 굳이 지금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협회의 도움을 받으면 최현 씨는 좀 더 빠르고 확실하게 초월 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을 겁니다.”

남은 커피를 모두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난 유지연 대리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말인데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결정을 내리시는 대로 다시 저에게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갑자기 찾아왔던 유지연 대리는 할 말만 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후우…….”

속에서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깊은 무언가를 내뱉고 나서야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신월 길드의 마스터인 하루도 그렇고, 방금 나를 찾아왔던 유지연 대리도 그렇고.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건 그저 헌터로서의 나였다.

그들이 바라는 건 내 능력일 뿐이었다.

그때 핸드폰 액정에 율이의 이름이 뜨며 전화가 걸려 오는 게 보였다.

“여보세요? 율아?”

“오빠! 큰일 났어! 빨리 병원으로 와 봐!”

다급한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이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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