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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x9999-26화 (26/176)

26화 : 승급 시험 (1)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한동안 조용히 있던 발렌이 오랜만에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에 들어가 있어도 내가 보는 것과 듣는 것을 그 역시 똑같이 느낄 수 있으니 상황이 어떤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모르겠어.”

예나 씨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 머리가 어지러워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그 주인공이 다름 아닌 ‘박민웅’이었으니까.

어째서 예나 씨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는지,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한참이나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보다 쿵쾅거리며 뜨거운 피를 토해 내는 심장과 달리, 머리는 점점 차갑게 변해 가고 있었다.

아직 박민웅이 정말 그랬다는 확증은 없지만, 가능성이 커진 만큼 어느 정도는 그 상황에 대해 미리 생각해 둘 필요가 있었다.

“하아…. 일단 밥부터 먹을까.”

이사 온 집은 기본적인 옵션이 다 달려서 딱히 가구를 사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었다.

율이에게는 밥을 잘 챙겨 먹겠다고 했지만, 집에만 오면 귀찮아서 밥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오! 드디어!”

발렌에게 전에 약속해 둔 것처럼 라면을 실컷 먹여 주기 위해 한 박스나 사 왔다.

라면은 한 박스여도 얼마 하지 않으니 상관없는데, 문제는 언제 이걸 다 끓이고 있느냐다.

어느새 튀어나온 발렌이 눈을 반짝이며 라면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좋아, 지금부터 너에게 라면 끓이는 법을 알려 줄게.”

“뭐?! 형씨가 끓여 주는 거 아니었어?”

게이트 안에서 이 녀석의 먹는 양을 봐 왔기 때문에 내가 매일 끓여 주다간 24시간도 모자랄 거다.

차라리 끓이는 법을 가르쳐 줘서 직접 해 먹게 하는 게 효율적이지.

“이게 냄비. 음식을 조리하기 위한 도구야. 미리 내가 적당한 부분에 선을 그어 둔 거 보이지? 여기까지 물을 받으면 2개를 끓이기 딱 좋아.”

“오오!”

“그리고 여기서 이 수도꼭지를 위로 올리면…….”

솨아아-

“오오오!”

“물이 나오지. 그다음에 이 밸브를 열고 가스레인지를 켜는 거야.”

딸칵- 화르릇!

“오오!”

“…제대로 듣고 있는 거 맞지?”

뭔가 하나를 할 때마다 눈을 반짝이는 발렌의 모습은 생각보다 썩 귀엽게 느껴졌다.

문명 자체를 접한 적이 없는 그였기에 이런 반응이 당연하겠지.

라면을 끓이는 법을 알려 주며 처음으로 제대로 된 라면을 발렌 앞에 꺼내 놓았다.

후각이 사람보다 훨씬 발달한 발렌은 라면을 보고 계속 꿀꺽꿀꺽 침을 삼켜 내고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오랜 가난한 생활로 라면은 누구보다 잘 끓인다고 자신할 수 있다. 아…….”

젓가락을 이상하게 쥐고 있는 발렌을 보고 포크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차라리 이쪽이 먹기 편할 테니까.

엉성하게 라면을 한 입 크게 물은 발렌은 점점 눈이 커지더니 아예 얼굴을 냄비에 파묻었다.

후루루룩!

단숨에 라면을 비우기 시작하는 발렌을 보니 썩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맛있냐?”

“…젠장! 살아 있길 잘했어!”

그는 입에 한가득 라면을 물고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피식 웃으며 그를 지켜보다가 뒤로 벌러덩 누웠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가장 원하지 않던 인물이 범인이라는 얘기를 들었으니까.

“그렇게 머리 싸매고 있지 말고, 직접 찾아가서 얘기해 보는 게 어때?”

벌써 냄비를 거의 다 비운 발렌이 말했다.

“그리고 만약 그 사람이 진짜 범인이라는 게 확실해졌을 때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 둬야지.”

발렌의 말대로다.

막상 복수하려고 하니, 어떻게 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나는 정말… 민웅이 형을…….

띵동.

문득 밖에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건 발렌도 마찬가지였고 서둘러 시스템 창으로 들어갔다.

아직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찾아올 사람이 있나.

철컥.

문을 열자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 둘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시죠?”

“아, 이런 실례 했습니다.”

덩치 큰 남자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젊은 여자가 두 사람을 비집고 앞으로 나왔다.

다른 남자들처럼 그녀 역시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고, 갈색빛의 머리카락은 둥글게 말아서 묶은 상태였다.

“최현 씨 맞으시죠? 저는 헌터 협회의 유지연 대리입니다.”

협회라는 말을 듣자마자 급속도로 내 표정이 굳어졌다.

“저희 쪽 데이터에 따르면 최현 씨는 약 2년 전에 게이트 내에서 실종된 거로 처리가 되어 있는데, 살아 계신 게 확인되어서 찾아왔습니다.”

“…….”

“일단 협회로 가서 이야기하시죠. 여기서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나에겐 가장 좋지 않은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협회에 알려진다면 박민웅에게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닿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순순히 따라가기로 했다.

애초에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나는 한숨을 작게 내뱉고 유지연 대리의 뒤를 따랐다.

***

“최현 씨는 대답 여하에 따라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신중하게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넓은 회의실, 정장을 차려입은 많은 사람이 커다란 테이블 앞에 모여 앉아 있다.

그들 앞에 서 있는 나는 포식자 앞의 초라한 먹잇감처럼 보였다.

“정말 2년 동안 게이트 안에서 살아남은 겁니까?”

“…맞습니다. 저는 게이트 안에 갇혔고, 출구를 통해서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그 안에 숨어 살았습니다.”

내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그들은 서로 소곤거리며 무언가 이야기를 나눴고, 이내 다른 사람이 다시 질문해 왔다.

“2년 전에 그 사건은 수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층에서 발생한 게이트에 데스나이트가 출현했으니까요. 그런데 겨우 E급 헌터인 최현 씨가 거기서 어떻게 살아남으셨죠?”

“데스나이트는 정해진 곳만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고, 저는 그들이 오지 않는 곳에 숨어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충분했으니까요.”

어차피 들켜 버린 이상, 최대한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초월 헌터라는 것까지 밝혀진다면 세간에 공식적으로 발표하게 되어, 박민웅도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기에 머리를 굴리며 거짓말을 하는 중이다.

“나중엔 어떻게 탈출한 건가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게이트에 갇힌 이후로는 출구를 통해서도 나갈 수 없었는데, 어느 순간 제가 지내던 곳에 새로운 출구가 생겨났습니다. 덕분에 던전 내부로 나올 수 있었죠. 2층이 아닌 13층이었지만.”

다시 한번 내 대답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그들 역시 믿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내 말들은 2년 전에 함께 게이트에 있었던 다른 헌터들의 이야기와 맞춰 보아도 어긋남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높은 사람들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최현 씨는 어째서 던전 밖으로 나올 때 다른 헌터팀에 숨어서 나온 건가요? 역시 보험금이나 보상금 때문인가요?”

직접적인 질문에 내 눈가가 살짝 떨렸다.

“네. 저는 E급 헌터니까요. 지금도 돈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복수를 위해서 숨어서 나왔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밝혀진 이상, 보상금에 대해서는 회수 조치가 들어갈 것이다.

각오하고 있었던 부분이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팔면 충분히 낼 수 있는 금액이었다.

“…만약 최현 씨가 게이트에 관한 내용을 자세하게 보고해 준다면 저희도 보상금 회수 외엔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겠습니다.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이들에게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게이트의 변화는 상당히 두려울 것이다.

2층 게이트에서 데스나이트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헌터가 게이트 공략을 피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인력이 부족해진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13층의 던전 공략은커녕 아래층에서 발생하는 게이트조차 처리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돌연변이 게이트에서 2년 가까이 갇혀 있었던 나는 귀중한 샘플이 되는 것이다.

“안내해 드려.”

“네, 알겠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말하자, 나를 여기로 데려온 유지연 대리가 다시금 날 이끌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무거웠던 공기에서 벗어나자마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수고하셨어요. 협회 정보팀에 가셔서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하게 될 거예요.”

“아…. 그렇군요.”

“아마 하루 만에 끝나진 않을 거고, 당분간 협회에 자주 들리셔야 할 것 같네요.”

귀찮아 죽겠다.

어차피 이전까지 표본이 없기 때문에 내가 대충 지어내서 말한다고 해도 이들은 거짓말인지 밝혀낼 방법이 없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협회에 계속 와야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이제 헌터는 그만두시는 건가요?”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걸음을 멈추자, 앞서 걸어가고 있던 유지연 대리가 고개를 돌렸다.

“아. 뜬금없는 질문을 해서 죄송해요. 별다른 의미는 없고, 그냥 여쭤본 거예요.”

오히려 나보다 당황한 유지연 대리가 적의가 없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지 미소를 지었다.

“그만두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러진 못할 거 같네요.”

“네?”

게이트에 5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갇혀 있었고, 그곳에서 다른 동료까지 목숨을 잃었다.

이런 일을 겪었는데도 다시 헌터 일을 계속하겠다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닐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게 헌터밖에 없거든요.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죠.”

아무 능력이 없는 인간에게 게이트 정찰만으로 15만 원이라는 돈을 주는 건 목숨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헌터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니까.

“괜한 질문을 해서 죄송해요. 괜찮으시다면 협회 쪽에서 정신 상담을 하고 있으니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헌터를 그만두는 이유 중에선 육체적인 부상도 많지만, 대부분의 헌터는 정신적인 부상으로 인해 그만두게 된다.

동료를 잃거나, 그곳에서 겪은 끔찍한 일들 때문에 다시 던전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어서 헌터로 살아가는 걸 포기한다.

그녀는 그런 걸 걱정해서 한 말이었다.

다시 긴 복도를 따라서 유지연 대리와 함께 이동했고, 한참을 걸은 후에야 정보팀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옆에 붙어 있는 글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건…….”

앞에서 걸어가던 유지연 대리는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벌써 다음 승급 시험이군요.”

헌터 승급 시험.

말 그대로 헌터 등급을 올릴 수 있는 시험이었다.

이 테스트를 통해서 헌터들은 자신의 기량을 확인하고 등급을 높여서 좀 더 좋은 조건의 의뢰를 받는 게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건 당연히 내게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혹시… 승급 시험은 어디로 지원하면 되는 건가요?”

“네?!”

내 질문에 유지연 대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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