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복수의 서막
“누… 누군지 혹시 기억하세요?!”
“글세…. 젊은 남자였던 거 같은데…. 에렌 셀은 명검이라서 기억하고 있지. 나는 무기를 보는 대장장이라서 누구랑 거래했는지는 잘 기억을 못 한다고.”
할아버지의 말에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그럼 그 후에 언제쯤 팔렸나요?”
“워낙 좋은 검이지만, 보통 가격이 아니잖아. 그래서 파는 데 애를 먹었지. 1년 정도는 여기서 주인을 기다리다, 작년에 누가 사 갔네. 미안하지만 그것도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 다시 무기를 망치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카앙-! 캉!
이곳에서 더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겠는데.
할아버지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의지할 곳은 다른 증인들뿐이었다.
석준이는 그런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 주었고, 헌터 협회로 가서 그날 게이트에 들어갔던 인원들이 누군지 적어 왔다.
“그때 우리 팀이 4명, 공략팀이 10명 들어왔는데, 5명이 사망했어. 그럼 검을 가지고 나온 사람 후보는 총 9명인데, 나는 아니니까 제외하고 8명.”
“민웅이 형 빼고 다른 아는 사람 있어?”
목록을 쭉 훑어보던 석준의 펜이 한 곳에 멈췄다.
“‘최건형’.”
“누군데?”
“공략팀에서 오래 일하신 아저씨인데, 만나면 인사하고 수다를 떨어서 조금 친해졌어. 아직 헌터로 활동하고 계시다고 했으니까, 협회에 있으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석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소에서 가만히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볼까 봐 모자를 꾹 눌러쓰고 낯선 분위기 속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셨다!”
석준은 최건형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반갑게 그에게 다가갔다.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는 빵모자를 쓰고 허접한 레더 아머를 입고 있었다.
“뭐야, 너 헌터 그만뒀다면서. 웬일로 여기 있냐? 다시 복귀하는 거야?”
“아뇨. 사실 일이 있어서 무기를 하나 찾고 있는데요. 혹시 에렌 셀이라고 알고 계세요?”
에렌 셀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박건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검은…. 네 친구가 쓰던 그거 말하는 거냐?”
“맞아요. 친구 부모님 유품이라서…. 친구 여동생에게 돌려주고 싶거든요.”
“하아…. 너도 참…. 오지랖도 넓네. 그날을 떠올리는 건 썩 내키지 않지만…. 사실 누가 에렌 셀을 가지고 있는 걸 본 거 같아.”
박건형의 말에 석준이 눈을 반짝였다.
“정말요?!”
“그래, 미안하지만 정확하게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아. 우리도 직전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까. 다만, 내가 속한 팀원은 아니었어. 그건 확실해. 우리 팀원은 게이트에서 나와서도 같이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
석준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불편할 수 있는 얘긴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됐어요.”
박건형과 이야기를 마친 석준이 내게 돌아왔다.
“들었지? 아저씨 말이 사실이라면 남은 후보는 네 사람이야.”
후보가 좁혀진 건 다행이었지만, 석준이를 포함하면 5명 중 2명이 우리 팀원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명확한 건 없다.
역시 어쩔 수 없이 민웅이 형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민웅이 형은 원래 내 에렌 셀을 알고 있으니 혹시 다른 사람이 들고 가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렌 셀을 찾고 있으세요?”
“네. 에렌 셀을…. 어?!”
고개를 들자, 저번에 만났던 하루의 얼굴이 보였다.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다급히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여긴 어쩐 일로…….”
“길드 마스터라는 게 원래 귀찮은 일이 많거든요. 협회에서도 이것저것 시켜서 자주 방문하고요.”
그녀는 검은색 마이에 빨간 넥타이를 매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새삼 교복이 잘 어울리는 천상 여고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 누구야?”
“신월 길드 마스터.”
내 말에 석준의 표정이 잠시 굳어지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뭐? 길드 마스터? 이 꼬맹이가 길드 마스터라고? 그것도 신월?!”
“…….”
묘한 살기를 느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괜히 나섰다가 나까지 휘말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루는 이내 석준의 귀에 무언가 수군거렸고, 그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지는 게 보였다.
창백해진 얼굴로 떨고 있는 석준을 보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굳이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는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에렌 셀은 왜 찾고 있는 건데요?”
“그때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거든요. 꼭 찾아야만 해요.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워낙 오래된 일이고, 기억하는 사람도 얼마 없어서…….”
“음… 누가 가지고 나갔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누가 가졌는지는 알 수 있어요.”
“정말요?!”
하루의 말에 반색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최현 씨는 저한테 빚이 하나 생긴 거예요.”
“이런 빚이라면 얼마든지 갚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어딘가로 향했다가, 5분쯤 지난 뒤에 다시 돌아왔다.
작게 접은 메모지를 내 손에 쥐여 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가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해요.”
이내 석준의 눈치를 살짝 본 하루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혹시 복수할 때 힘이 필요하면 저를 찾아오세요.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라도 제가 완벽하게… 처리해 드릴 테니까요.”
“하…. 하하…….”
어색하게 웃고 있었지만, 하루가 하는 말은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아서 무서웠다.
어쨌든 하루가 준 메모를 보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석준이에게는 계속 부탁하기 미안하다며 그를 떼어 놨지만, 실제로는 내가 좀 더 편하게 움직이고 싶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메모에 적혀져 있던 곳은 오래된 골동품점으로 보였다.
에렌 셀을 사갈 정도로 돈이 많아 보이지 않아서 정말 이곳에 에렌 셀을 산 사람이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딸랑-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방울이 울리며 나를 반겨 주었다.
골동품점 특유의 묘한 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했고, 안에서 방울 소리를 들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나보다 조금 나이가 있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생각보다 젊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세요! 뭐 찾으시는 물건 있으신가요?”
그녀는 식사를 준비하다 왔는지, 손에 주걱을 들고 있었고, 내 시선이 거기에 머문다는 걸 깨달았는지 황급히 뒤쪽으로 주걱을 숨겼다.
“죄송합니다. 뭔가 사려고 찾아온 건 아니고, 혹시 여기에 에렌 셀이라는 대검이 있나요?”
“에렌 셀이라면…. 아…! 잠시만요.”
그녀는 안쪽에 있는 창고로 들어가더니 무언가 부수는 소리와 함께 가끔 작은 비명도 들려왔다.
“오… 오래 기다리셨죠.”
먼지를 잔뜩 끌고 나온 그녀는 손을 휘휘 저으며 자신 앞에 있는 먼지들을 치워 냈다.
“쿨럭…. 쿨럭.”
커다란 검집에 들어 있는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검은 내가 찾던 에렌 셀이 확실했다.
너무 오랜만에 봤지만, 손잡이만 봐도 내가 가지고 다니던 에렌 셀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저기, 혹시 이 에렌 셀을 대장간에서 직접 구매하신 건가요?”
“아, 그건 아니에요. 사실 저는 이 골동품점을 물려받았거든요. 원래는 저희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인데, 나이가 많아지셔서 더 이상 가게를 운영할 형편이 되지 않아서요.”
“…할아버지랑 잠시 뵐 수 있을까요?”
내 부탁에 그녀는 상당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가게와 연결된 방 안쪽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그녀의 할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상체를 쭉 내밀었다.
“엄마! 뭐 해! 밥 줘!”
“…….”
“보시다시피 이런 상황이라….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린 거라 오히려 죄송스럽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 검을 사러 올게요.”
이내 그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소중한 검인 거 같은데 꼭 다시 찾아가시면 좋겠네요.”
가게를 나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날의 기록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건가.
던전에서 나오기만 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범인이 누군지 찾는 것보다 범인에게 어떻게 복수할지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여기서 막혀버리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잉- 지이잉-
그때 전화가 오는 걸 보고 귀로 가져갔다.
모르는 번호……?
“안녕하세요, 혹시 최현 씨 전화번호 맞나요?”
“아…. 네. 맞아요. 누구시죠?”
내 물음에 수화기 너머로 대답이 돌아왔고,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폰을 내렸다.
***
“여기까지 오라고 해서 죄송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오지 못했던 제 잘못이죠.”
그녀는 너무나 삐쩍 말라서 어디 부딪히면 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뼈에 살가죽만 겨우 붙어 있었고, 눈은 초췌하다 못해 무섭게 보일 지경이었다.
“저도 많이 놀랐어요. 최현 씨가 다시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솔직히 조금 기대했어요. 어쩌면 그이도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나보다 조금 연상인 그녀는 하성이 형의 아내였던 ‘김예나’라는 분이었다.
전에 봤을 땐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는 평범한 새신부였는데,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에 안쓰럽게 느껴졌다.
우리는 사람이 없는 봉안당 안으로 들어섰고, 하성이 형의 사진과 아이의 초음파 사진이 들어가 있는 봉안당 앞에 멈춰 섰다.
“사실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아요. 자다가 깨면 갑자기 그이가 돌아올 거 같고, 사실 지금까지 이 모든 게 꿈일 거 같고…. 도저히…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질 않네요.”
“…….”
나는 그녀에게 위로해 줄 수 없었다.
내가 부모님을 잃었을 때 주변에서 해 주었던 어떤 위로의 말도 내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도 괜찮냐고 물어본다면 애써 괜찮은 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허튼 위로를 하지 못 했다.
잠시 하성이 형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사실 석준 씨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최현 씨가 돌아와서 그때 갖고 있던 검을 찾고 있다고… 석준 씨는 그 이전부터 가끔 저에게 연락을 해 주셨거든요.”
“…그랬군요.”
새삼 석준이 녀석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자신의 세계도 무너졌을 텐데 우리가 없어진 곳에서 어떻게든 자신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연락을 드렸어요.”
“네?”
“그날 협회에서 소식을 받고 바로 사무소로 달려갔었거든요.”
그녀의 말에 갑자기 내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이가 최현 씨를 너무 많이 좋아하고 챙겨 줘서, 둘이 찍은 사진도 저에게 많이 보여 줬죠. 질투가 날 만큼요. 그래서 최현 씨가 항상 품에 안고 다니던 검도 저절로 눈에 익었어요.”
“그럼 혹시…….”
“네. 저는 그날 헌터 협회에서 그 검을 가진 사람이 누군지 봤어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