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여심 헌터 (2)
“하아…. 내가 왜 남 데이트하는 옷을 골라 줘야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해가!”
“다음에 제가 맛있는 거 사 드린다니까요.”
“맛있는 거?! 겨우 맛있는 거로 때울 생각이야?”
잔뜩 화가 나 있는 이신예가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저렇게 툴툴거리는 그녀였지만, 내 부탁에 바로 튀어 나와준 건 너무 고마웠다.
애초에 이런 걸 부탁할 수 있을 만큼 친한 여자도 없었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부탁하는 건 무리잖아.
우리의 내기를 직접 봤던 이신예였기에 말이라도 꺼내 볼 수 있었던 거다.
“걔도 진짜 이상한 애야. 데이트를 전날에 전화해서 잡는 애가 어딨어?!”
“그렇죠?! 역시 그거 이상한 거죠?!”
만족스럽게 되묻는 나를 세상 한심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맞다, 너 데이트 처음이라고 했지?”
바로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
평생 일을 반복하며 살아온 나는 여자친구는커녕 데이트조차 해 본 적 없는 한심한 놈이었다.
그런데 첫 데이트가 전설의 빨간 망토라니….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네가 처음인 건 그럴 수 있지만, 아마 그 애도 처음일걸?”
“네?! 하지만… 차윤지 씨는 얼굴도 예쁘고 주변에 인기 많지 않나요?”
“많으면 뭐 해. 정작 본인은 그런 거에 전혀 관심 없으니까 굳이 나갈 일도 없는 거지.”
이신예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녀는 오직 싸우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 어떻게 하면 자신이 더 강해질 수 있는지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나랑 내일 만나는 것도 결국 내기 때문에 억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까 나만 믿어. 네 그 암울한 옷차림을 내가 바꿔 주도록 하지.”
“그…. 그렇게 암울하진 않은 거 같은데.”
“아니, 쓰레기야. 허수아비도 그렇게 입고 다니진 않겠다.”
유지한 아저씨….
자존심은 버리고 자부심을 가지라고 하셨는데, 제 자부심은 방금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이신예와 찾아온 곳은 근처에 있는 백화점이었다.
다행히 괜찮은 옷을 살 정도의 여유 자금은 있었다.
“너는 조금 마르고 키가 크니까, 음…. 이런 거 잘 어울리겠다. 아, 이것도 좋고.”
그녀는 절대 오기 싫다며 거절했던 거치곤 나름 즐거운 듯 이 옷 저 옷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대 보고 있었다.
인형 놀이하는 기분인 걸까.
“자.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이거 입고 나와 봐.”
“아…. 네!”
탈의실에 들어가서 그녀가 골라 준 옷으로 갈아입었고, 안에 있는 전신 거울을 보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녀가 골라 준 옷들은 내 몸에 잘 어울렸다.
오버핏 맨투맨, 슬랙스, 거기에 롱코트를 걸쳤는데, 나도 놀랄 정도로 괜찮아 보였다.
“오…. 역시 괜찮은데?”
“그럼 이걸로…….”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인데…! 빨리 다시 갈아입고 나와.”
“……?”
“여러 가지 입어 보고 제일 좋은 거로 사야지.”
그땐 알지 못했다.
여기서 말했던 ‘여러 가지’라는 게 100가지가 넘을 거라곤…….
이신예는 나를 끌고 백화점 곳곳을 훑고 다니며 괜찮은 옷들을 다 입혀 보기 시작했다.
원래는 한 벌만 살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골라준 옷들은 대부분 마음에 들어서 양손 가득 사버렸다.
“하아…. 힘들다. 밥 먹고 하자.”
“그래요. 진짜 힘드네…….”
근처에 있는 칼국수 집으로 향해서 해물 칼국수를 주문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칼국수……?”
“싫어?”
“아뇨. 완전 좋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나와서 이 고생을 누구 때문에 하고 있는데! 당연히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이죠. 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그녀의 비위를 맞춰 주기로 했다.
그녀의 말대로 오늘 여기 나와 준 건 오직 나를 도와주기 위해 와 준 거니까, 나 역시 그만큼 배려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뜨끈한 칼국수를 먹자 속이 따듯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데이트라는 건 보통 뭘 하는 거죠?”
“음…. 쇼핑하고 같이 밥 먹고, 영화 보고? 아, 맞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 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이따가 보고 갈까?”
“음……?”
기분 탓인가.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
어쨌든 이신예 덕분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옷을 살 수 있었다.
‘힘내라!’
아침에 그녀에게서 온 문자를 보고 피식 웃음을 머금으며 데이트 준비를 시작했다.
옷이 날개라고, 그럴듯한 옷을 입고 나니 자신감도 상승한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면 사실 어제 했던 것을 다시 반복할 뿐인데, 어쩐지 데이트라는 이름이 붙으니 묘하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약속했던 시간에 합정역 5번 출구로 향했다.
늦지 않게 준비하기 위해 서둘렀더니 20분이나 일찍 왔네.
“어…? 윤지 씨?!”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나를 발견한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신 분이 그런 말을…….”
“그런가. 뭐, 상관없지.”
그렇게 말한 그녀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확실히 전장에서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딱딱하지 않은 사복을 입고 있으니 그냥 미인인 평범한 여자애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좋아.”
나름대로 데이트라는 것을 의식하고 괜찮은 레스토랑을 골라 뒀다.
딱히 양식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 보통 드라마 같은 거 보면 데이트는 맨날 이런 곳에서 하던데.
“저는 이걸로…….”
“나는 이거.”
분위기도 좋았고, 나온 음식들도 예상보다 훨씬 맛있었다.
물론 무시무시한 가격이 붙어 있긴 했지만, 나 역시 즐거웠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밥은 내가 사도 되는데.”
“그럼, 영화 보여 주세요. 영화 좋아하세요?”
“글쎄, 보면 보는 정도?”
그녀가 고른 영화는 터프한 남자가 혼자서 괴물들과 싸우는 내용의 영화였다.
어떻게 보면 정말 그녀가 좋아할 만한 내용이라 웃음이 나왔다.
예상대로 관객은 우리밖에 없었고, 덕분에 영화관을 전세 낸 것처럼 마음 편히 볼 수 있었다.
조금 유치하긴 했지만, 액션 신이 좋아서 재밌게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았죠?”
“너무 현실감이 떨어져. 남자 주인공은 전투의 기본도 모르는 아마추어였어.”
당연하지, 저분은 배우니까.
영화를 다 보고 나왔지만, 뭔가 차윤지는 썩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저기… 혹시 저랑 했던 내기 때문에 억지로 나오신 건가요?”
“…응?”
“그럼 이제 돌아가도 돼요. 저 때문에 무리하지 않으셔도…….”
내 말을 듣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어딘가로 향했다.
“윤지 씨?”
“따라와.”
그녀가 들어간 곳은 ‘헌터 샵’이었다.
헌터의 장비와 무기, 헌터들이 사용하는 소모품을 파는 가게였다.
도심가라서 그런지 내가 봤던 어떤 곳보다 큰 매장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반짝이는 무기들과 장비들이 있었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녀의 눈도 빛나고 있었다.
“이거 봐! 하급 포션을 알약으로 정제한 거야! 전투 중에도 바로 사용할 수 있겠는데?”
“그… 그런가요?”
“그리고 이 방패! 앞에 무기가 많이 닿는 부분만 ‘그린 스톤’을 가공해서 방패의 가성비를 최대로 끌어올렸어. 확실히 이렇게 하면 쓸모없는 재료 낭비가 없지.”
쉬지 않고 이것저것 살펴보며 내게 설명해 주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장난감 가게에 온 어린 소녀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고 재밌어서 한참을 들어주다가 나왔다.
“좋아하시더니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으셨네요?”
“아이템은 전문 대장장이에게 맡기는 게 질이 좋거든.”
“…그렇군요. 아, 이건 제 선물이에요.”
그녀에게 건네준 건 작은 머리핀이었는데, 반짝거리는 비즈가 박혀 있었다.
“난 머리핀 안 하는데?”
“이건 평범한 머리핀이 아닙니다. 착용하면 마법 저항을 높여 주는 뛰어난 방어구죠.”
“…이게?”
“제 초월 능력 아시잖아요. 장비에 숨은 효과도 알 수 있다니까요.”
내 말에 그녀는 머리핀을 바로 머리카락에 꽂았다.
[머리핀
평범한 머리핀이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녀의 헌터 아이템 설명회를 들었으니 이 정도 거짓말 정도는 해도 되는 거겠지.
어쨌든 머리핀이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 나름 만족스러웠다.
“오늘 고마웠어요. 윤지 씨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전 정말 재밌었어요.”
“나도 재밌었던 거 같아.”
같아… 인가.
그녀답다는 생각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몸을 돌렸다.
“…다음에…….”
“네?”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살짝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다음에 또 봐.”
“네. 다음에 봐요.”
옅은 미소를 짓는 그녀와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헤어질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 놀 만큼 놀았으니,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때다.
가장 먼저 내 등에 칼을 꽂은 놈이 누군지 알아내려면 내가 갖고 있던 ‘에렌 셀’의 행방부터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나 혼자로는 역부족이다.
“여보세요?”
“아, 석준아. 혹시 바쁘냐?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석준이의 도움을 받으면 정말 석준이가 범인이 아닌지도 확인할 수 있고, 검의 행방을 찾는 것도 훨씬 편할 것이다.
지금 나는 헌터 협회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몸이니까.
***
“웬일로 네가 날 불렀어?”
“쉬는 날인데 불러서 미안하다.”
석준이에겐 아버지의 유품을 함께 찾아 달라고 부탁해 뒀다.
“그런데 어쩌다가 잃어버린 거야? 평소에 자기보다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던 녀석이…….”
“그때 워낙 난장판이었잖아.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떨어뜨렸나 봐. 혹시 누가 내 검을 갖고 출구로 나갔는지 못 봤어?”
잠시 고민하던 석준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렇고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땐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녔으니까 잘 기억나지 않을 거야.”
“흐음…. 그런가.”
“어차피 누군가가 검을 팔았다면, 협회 주변 대장간에 물어보면 알지 않을까.”
석준의 말처럼 우린 일단 주변 대장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장비를 사거나 파는 곳은 보통 대장간에서 이루어지기에 정보를 얻기 가장 쉬운 곳이었다.
“흐음…. 글쎄. 2년이나 지난 일이면 기억 못 하지.”
“그런 검은 받은 적이 없는데.”
“2년? 한 달 전도 기억 안 나는데 무슨.”
여러 대장간을 돌아다녔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지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힘들었다.
에렌 셀은 외형이 특별하게 생기진 않아서 보고 지나쳤다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다른 방법으로 찾아야 하나.
협회와 조금 떨어져 있는 외진 대장간에 들어갔고, 그곳에 있는 할아버지가 우릴 반겨 주셨다.
“죄송한데, 혹시 2년 전쯤에 이렇게 생긴 검을 여기 누가 팔러 온 적 있나요?”
에렌 셀의 사진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에렌 셀이구만. 그렇지. 좋은 검이라 내가 바로 매입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