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데이트와 라이프는 한 끗 차이 (2)
“커헉……!”
13층 어딘가에서 부활한 나는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녀가 진심으로 한다는 건 들었지만, 전력으로 오면 이 정도 속도구나.
다행히 A-2 구역과 멀지 않은 숲인 듯했다.
“형씨?! 방금 인간한테 죽은 거야?!”
발렌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의 물음에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베이스캠프를 옮길 때 어느 정도 길을 외워 둔 덕분에 다시 찾아갈 수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차윤지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아니…! 진짜로 죽이는 겁니까?”
“오…! 진짜 살아나네.”
뒤에서 들려오는 민혁의 목소리에 욱했지만, 꾸역꾸역 화를 삼켜냈다.
“검술을 알려 주시는 건 정말 감사하고 고맙지만… 13층에서 죽으면 아직 공략되지 않은 구역에서 부활할 수도 있다고요. 그럼 저는 꼼짝없이 몬스터 밥이나 되겠죠.”
“남은 목숨 몇 개인데?”
잠시 고민하던 그녀의 물음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614개였는데, 이제 613개네요.”
“그럼 100개만 쓸게.”
“…네?”
“지금 100번 죽는 게 나중에 1000번 죽는 것보다 낫잖아.”
어처구니없는 논리였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곤란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SS급 헌터인 그녀에게 검술을 배울 수 있다는 건 영광이다.
단숨에 실력을 늘릴 수 있다면 라이프 100개 정도는 그다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실력 차이가 크게 나는데 과연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미지수였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하기 싫다는 표정 짓지 마. 지금 윤지랑 대련하는 건 분명 네게 큰 경험이 될 거다. 장담하지.”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유지한 아저씨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검을 꺼냈다.
“그래도 동기 부여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동기 부여?”
“100번 안에 제가 한 번이라도 5분을 버티면 저랑 데이트해 주시는 거 어떨까요?”
“좋아.”
말하자마자 바로 대답한 그녀에 나를 비롯한 다른 팀원들도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네?!”
“저… 정말?!”
“어차피 그럴 일은 없으니까 상관없어.”
이건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군.
애초에 어떤 제안이든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다 받을 생각이었던 건가.
어쨌거나 덕분에 동기 부여는 제대로 됐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녀가 이 정도로 얕보고 있다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니까.
검을 꺼내 들어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5분이라는 시간은 짧지만, 급박하게 흘러가는 전투에선 길게 느껴진다.
“시간은 내가 체크해 줄게. 준비, 시작!”
유지한 아저씨의 외침과 함께 그녀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카앙-!
검을 들어서 차윤지의 첫 공격을 튕겨 냈다.
멀리서 도약해 오는 공격은 자세가 커서 어느 쪽으로 들어올지 예측하기 쉬웠다.
그건 데스나이트와 싸울 때부터 지독하게 느꼈던 부분이었다.
물론 그걸 차윤지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노리고 있는 건…….
쌔엑-!
다른 손에 있는 두 번째 검의 공격.
“오오……!”
두 번째 공격까지 피하고 거리를 벌리자 주변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처음 공격은 내 자세를 무너뜨리고 다음 공격을 막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고, 진짜 공격은 두 번째다.
그녀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한참 먼저 움직여야만 겨우 따라갈 수 있을 정도지만, 피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지금처럼 예측해서 움직인다면 5분 정도는…….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 그녀는 다시 거리를 좁히며 검을 뻗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공격은 노골적으로 내게 방어 자세를 강요했다.
카앙-!
이어서 두 번째 공격…….
타악!
“……?!”
다음 공격을 피하려고 그녀의 다른 손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들지 않은 맨손뿐이었다.
아까보다 깊숙이 파고든 그녀는 검을 들고 있는 내 손을 꺾으며, 처음 공격했던 검으로 다시 찌르고 들어왔다.
이번에도 정확히 내 심장을 꿰뚫었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
대련이 반복될 때마다 압도적인 그녀와의 실력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으로 확률을 계산하고 최대한 그녀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걸 비웃기라도 하듯, 차윤지라는 헌터의 전투 센스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번이 몇 번째지?”
“43번째.”
대답을 마친 민혁은 하품하며 막사로 들어갔다.
우리가 밤새 깨어 있는 탓에 굳이 다른 사람들은 불침번을 서지 않아도 됐다.
아무리 새로운 전술로 그녀를 막으려고 해도 그녀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건 오직 수많은 경험과 센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 몬스터들은 그런 걸 기다려 주지 않아.”
“네!”
대련에서 내게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말해 줬다.
바로 몸으로 체험하면서 그런 조언을 들으면 이론으로 배우는 것보다 훨씬 와닿는 건 사실이었다.
“너무 움직임이 뻔해. 내 공격을 막을 생각뿐이잖아. 시야를 넓혀.”
“알겠습니다!”
처음과 달리 그녀의 지적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카앙-! 캉!
차윤지는 매번 새로운 패턴으로 나를 공격해서 일부러 내가 당황하게 했다.
덕분에 항상 긴장한 상태로 있어야 했고, 전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게 가능했다.
위험한 상황에서 몸이 먼저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래쪽 방어가 부실해. 다리를 너무 넓게 벌리고 있어.”
“네!”
차윤지와의 대련은 밤새 이어졌다.
“뭐야, 저 두 사람 정말 잠도 안 자고 밤새 대련한 거야?”
“내가 허락했어.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유지한 아저씨의 말에 심윤성 아저씨가 미소를 지었다.
“청춘이구만.”
쌔엥-!
그녀의 검이 정확히 내 목을 긋고 지나갔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베이스캠프 뒤쪽에 있는 절벽 위에서 눈을 뜬 나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죽음을 반복해도 그녀와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공격을 먹이기는커녕, 5분을 버티는 것조차 할 수 없다니…….
처음에 차윤지가 했던 말처럼 정말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대련인가.
“…괜찮아? 이제 포기하는 게 어때?”
퀭한 얼굴의 나를 본 민혁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죽고 나면 기력도 원래대로 돌아오기 때문에 크게 피로감을 느끼진 않았지만, 정신적인 대미지가 컸다.
사실 마음 같아선 진즉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위해 이 대련을 이어가고 있었고, 내가 먼저 포기하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아직… 조금만 더 해 볼게.”
무엇보다 난 아직 최후의 수를 꺼내지 않았으니까.
“5분만 버틸 수 있으면 뭘 해도 되는 거죠?”
내 물음에 그녀는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벤토리에서 갑옷을 꺼내 착용한 뒤, 검을 움켜쥐었다.
지금까지 계속 죽어 왔던 건 이 한 번의 대련을 위한 것이다.
이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니까.
“무슨 수를 써도 좋아. 5분을 버티면 네 승리야.”
“흐음…. 지금까지 3분도 넘긴 적이 없는데.”
유지한 아저씨의 말에 힘이 쭉 빠지는 게 느껴졌다.
이번에 실패하면 앞으로도 가능성은 없다.
이건 오직 한 번만 할 수 있는 거니까 이번에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그럼 간다. 준비… 시…….”
“잠깐만요!”
아저씨의 말을 끊고 나는 차윤지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갑자기 이런 질문 해서 죄송하지만, 왜 저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신 건가요?”
“…….”
검을 내게 겨누고 있던 그녀는 살짝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넌 지금이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
항상 무뚝뚝하던 그녀의 얼굴에 처음 보는 슬픈 감정이 담겨 있었다.
“…넌 아직 아무도 잃지 않았잖아.”
우리 둘의 눈치를 살피던 유지한 아저씨는 다시 손을 위로 들었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한다. 준비, 시작!”
아저씨의 말과 함께 차윤지가 지금까지처럼 앞으로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 역시 그녀 쪽으로 달려갔다.
“……!”
“오호.”
갑자기 거리가 좁아지자 그녀는 검을 휘두를 범위를 예측하지 못했고, 그대로 나와 부딪혔다.
쿠웅-!
갑옷을 입고 있어서 무게가 더해져 충격이 훨씬 컸을 거다.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쓰러진 채로 몸을 굴려 거리를 벌린 차윤지는 단숨에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내게 거리를 좁혀 오는 걸 경계한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한다.
이번엔 천천히 내 주변을 돌면서 다가왔고, 커다란 나무를 등진 채로 그녀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라이프 파워.”
내 비장의 수다.
쌔엥- 캉!
그녀가 재빠르게 검을 쏘았지만, 가볍게 튕겨 냈다.
모든 능력치가 2배나 올라가는 라이프 파워를 쓰면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여 줄 수 있다.
이미 몇십 번의 대련으로 차윤지는 내 원래 능력치에 적응되어 있을 것이고, 힘과 속도가 2배만 빨라져도 그녀를 충분히 당황하게 만들 수 있겠지.
카앙- 캉! 카칵!
둘의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뭐야?!”
“윤지 속도를 따라가고 있잖아?!”
구경하고 있던 유지한 아저씨와 민혁이의 눈이 커졌다.
아니, 전혀 아니다.
억지로 꾸역꾸역 그녀 움직임에 맞춰서 반응하고 있을 뿐, 여전히 그녀의 속도가 나를 훨씬 웃도록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적응하기 시작한 건 차윤지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슬슬 몸이 그녀에게 익숙해져서 그녀의 공격에 어느 정도 반응할 수 있었다.
라이프 파워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따라가는 게 가능하다.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거야?”
“아뇨. 저는 항상 전력으로 상대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4분 경과!”
남은 시간 1분!
“후우…. 나도 그럼 진심으로 갈게.”
파앙-!
그녀의 눈이 섬광처럼 번쩍이는 순간, 어느새 그녀의 검이 내 갑옷에 닿아 있었다.
캉!
“……!”
갑옷을 꿰뚫고 들어온 검은 내 어깨를 관통했다.
[-1681]
젠장…! 저렇게 얇은 검으로 이런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내다니…….
반사적으로 몸을 꺾어서 어깨에 닿은 것이지, 제대로 공격을 맞았더라면 저 칼은 지금쯤 내 목에 박혀 있을 것이다.
타앗!
유효타가 들어왔지만, 이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갑옷이 없었더라면 어깨 쪽이 통째로 뜯겨 나갔을지도 모른다.
차윤지가 어깨에 박힌 검을 빼기 전 그녀의 손목을 잡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속도가 빨라진 것도 있지만, 힘도 2배가 됐으니 그녀도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좋아…. 이대로 넘어뜨리면 충분히 힘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할 수…….
우두둑……!
“……!”
뼈 소리와 함께 그녀의 팔이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지금 자세로는 불가능한 각도에서 그녀의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검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게 보였다
“그만!”
팟-!
코앞에서 멈춘 검 끝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5분…! 현이 승!”
“차윤지를 상대로 진짜 버티다니…….”
타악!
바로 갑옷을 벗어서 내팽개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팔 괜찮아요?! 아니…! 자기 팔을 꺾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어. 난 항상 진심으로 싸웠으니까.”
“하아…. 그건 알고 있지만… 죄송해요.”
내 사과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최선을 다했잖아. 그런데 왜 사과해?”
“자, 이상한 로맨스 그만 찍고 비켜.”
어느새 등장한 이신예가 우리 가운데로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밀어내고 차윤지의 팔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대련하는 건 좋은데, 이렇게 큰 부상은 금지야. 내 정신력을 소모하는 건 팀 전체에 피해라는 거 몰라?”
“…미안해.”
“죄송합니다.”
따악-! 딱!
그렇게 우리의 대련은 이신예의 꿀밤으로 끝을 맺었고, 나는 영광스러운 데이트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차윤지가 나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여전히 엄청 약하지만, 그래도 이제 좀 쓸 만해진 거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