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데이트와 라이프는 한 끗 차이 (1)
“푸하핫. 가끔 넌 엄청 웃긴 표정을 짓는단 말이지.”
“…놀리지 마요.”
“웃은 건 미안하지만, 우리 길마 얘기는 사실이야. 아직 18살 여고생이거든.”
유지한 아저씨는 고향에 두고 온 딸을 생각하는 듯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랐다.
신월처럼 유명 길드의 마스터가 여고생이라면 당연히 유명 인사일 텐데, 내가 모르고 있다니…….
“모르는 것도 당연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
“아…. 그럼 제가 게이트에 갇혀 있을 때 바뀐 모양이군요. 그런데 어쩌다가 여고생이 길드 마스터가 된 건가요?”
내 물음에 아저씨는 어쩐지 씁쓸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헌터라는 건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살아가는 직업이야. 알고 있지?”
“…….”
“우리 길마는 헌터에는 영 재능이 없어서 겨우 B급 헌터였는데,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길드를 사랑하고, 길드원들을 사랑해서 언제나 행복해 보였거든.”
아저씨는 지금껏 내가 본 표정 중 제일 연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건들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은 그런 표정.
“게이트에서 몬스터랑 싸우다가 발을 삐끗한 게 전부였어. 그 잠깐, 그 작은 실수 하나로 그 녀석은 우릴 두고 떠났지. 그리고 지금 길드 마스터는 그 사람의 딸이야.”
“따… 딸이요?”
“그래. 자기 아버지를 닮아서 길드를 너무나 사랑하는 녀석이지. 물론 우리도 프로 헌터들이고 감정에 휩쓸려서 길마를 정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유지한 아저씨는 잠시 멈춰서 짐을 고쳐 매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녀석은 자기 아버지가 죽은 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곧장 팀을 짜서 아버지가 실패했던 게이트를 공략하고 왔어. 게이트를 그냥 두면 다른 피해가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일주일 동안 눈물을 쏟아 내더군.”
“…대단하네요.”
“그치? 나라면 아마 그렇게 못 했을 거야. 아마 녀석의 그런 강한 모습에 다들 끌렸던 거 같아.”
쿠웅-!
캠프로 돌아온 아저씨와 나는 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 잠깐, 그런데 헌터는 성인부터 할 수 있는 거 아니었나요?!”
“하하핫! 그래서 그 녀석 그때 벌금 엄청 내고 헌터 자격도 1년이나 미뤄졌거든. 21살이 돼야 헌터 활동 시작할 수 있어. 진짜 웃긴 녀석이라니까.”
그렇게 말하는 유지한 아저씨는 어쩐지 슬퍼 보이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그런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길드라면 나도 꼭 들어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오. 보급이야?! 안 그래도 샴푸 떨어졌는데! 다행이다.”
“맨날 네가 한 통씩 쓰니까 그러지! 우리는 너 때문에 비누로 머리 감거든?!”
유지한 아저씨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상자에서 샴푸를 꺼내 가는 이신예였다.
그녀답다면 그녀다운 모습인걸.
보급이 들어오고 나서 다들 분위기가 좋아졌다.
지금까지 라면이나 칼로리바로 식사를 대신 했으니 제대로 된 음식들이 그리운 것도 당연했다.
“또 보급품 막 쓰네? 나중에 징징거리지 말고 적당히 아껴 써.”
아저씨의 말에 민혁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다음 주에 내려가잖아요. 그때까지 먹을 건 다 처리해야죠.”
“야! 너 그 감자칩 내가 먹으려고 했던 거라고! 내 술안주!”
“아저씨는 오징어나 먹으라고요!”
심윤성 아저씨와 민혁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고 유지한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즐거운 팀이었다.
그리고 이 팀에 있을수록 전에 내가 있었던 팀원들이 그리워졌다.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혹시라도 그때 날 찔렀던 게 그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라면…….
아니, 정확히는 그런 의심을 하는 내 표정을 들키는 게 두렵다.
톡톡.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고, 고개를 돌리자 코앞에 차윤지의 얼굴이 보였다.
“으앗……!”
화들짝 놀라서 뒤로 넘어지고 말았고, 주변 팀원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아…. 하하…….”
민망함에 웃음을 흘리며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한테 볼일 있으세요?”
“검…. 가르쳐 줄게.”
“네?”
그렇게 말한 그녀는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걸어갔고, 잠시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따라갔다.
숲에 있는 넓은 공터였는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너무나 뜬금없어서 뭐라고 반응하지도 못했다.
“저기…. 갑자기 왜 저에게 검을 가르쳐 준다고 하신 건지…….”
그나마 내가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바로 그녀였다.
SS급 헌터라 워낙 유명한 것도 있었지만, 솔직하게 그녀를 동경하고 있어서 기사 같은 걸 관심 있게 봤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빨간 망토는 오직 싸우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심지어 길드원들이랑도 깊게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누군가는 4차원인 그녀와 말을 섞는 것조차 행운이라고 할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제안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약해. 강해져야 해.”
“하하…. 혹시 저랑 싸우고 싶으신 건가요? 결투장인가요?”
내가 약한 건 사실이지만… 굳이 저렇게 말하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다.
“제가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당신에게 있나요?”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죽는 건 싫어.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우리 팀원들 강해. 안 죽어. 하지만 넌 약해. 강해져야 해.”
“아….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저는 죽어도 다시…….”
쌔엥-!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검이 섬광처럼 내게 쏘아졌다.
카각!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서 그녀의 검을 피했지만, 묵직한 갑옷을 훑고 지나갔다.
아니, 피한 게 아니라 일부러 빗맞힌 건가.
“으아! 내 갑옷!”
[내구도 98/100]
바로 내구도가 깎여 나간 걸 보고 깜짝 놀라서 인상을 찌푸렸다.
“갑옷 벗어.”
“…네?”
“어차피 죽어도 다시 살아나잖아.”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굳이…….”
나는 답답함에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히려 내 입장에선 절을 하고 그녀에게 검을 배워야 할 정도로 좋은 기회였다.
헌터들 중에서 네 손가락에 꼽히는 SS급 헌터에게 검을 배울 수 있다니….
이것만큼 환상적인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전혀 의사소통되지 않는 게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난 진심으로 죽일 각오로 덤빌 거야. 넌 나한테서 살아남아야 해. 그게 첫 번째야.”
그녀의 눈은 진지했다.
몬스터들과 싸울 때보다도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살아남으면 아무한테도 안 죽을 수 있어. 그럼 넌 강해.”
말이 이상하긴 하지만, 대충 알아들을 순 있었다.
자신에게 죽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 되면 누구에게도 죽지 않게 된다는 말인 것 같다.
확실히 현재만 본다면 어차피 죽어도 다시 살아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만약 저번처럼 게이트에 갇힌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솔직히 말하면 게이트에서 내가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운이 좋아서였다.
데스나이트가 언데드라 체력 회복이 되지 않았던 것도, 놈들이 이성이 없는 몬스터였던 것도, 내 초월 능력이 게임 성장 시스템과 9999개의 라이프였던 것도, 처음 데스나이트를 잡고 나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던 것도 순전히 운이었다.
만약 라이프를 모두 써도 적을 쓰러뜨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지금 이곳에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부디… 한 수 가르쳐 주세요.”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옷을 벗어서 인벤토리에 넣고, ‘오래된 녹슨 검’을 꺼내 들었다.
꿀꺽.
SS급 헌터의 실력을 제대로 볼 수 있다니…….
제대로 집중하고 자세를 잡으니 긴장감이 단숨에 커졌다.
“그럼 간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쐐액-!
“……!”
그녀의 검 끝이 정확히 눈앞에 와 있었다.
1cm만 더 가까이 왔더라도 내 눈은 더 이상 제구실을 할 수 없게 됐을 것이다.
“나는 장난하는 게 아니야. 다음엔 널 죽일 거야.”
“…넵!”
뒤로 물러났던 차윤지는 다시 검 끝을 내게 겨누었다.
진심이라고 하기엔 그녀는 평소 이도류를 쓰는 것과 달리 한 자루의 검만 들고 있었다.
마치 펜싱 자세처럼 단숨에 파고들어서 거리를 좁히는 특이한 검술이었다.
상대는 거리가 멀다고 방심하다가 예상보다 빠르게 좁아진 거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선공을 허용하게 된다.
이런 속공의 약점은 그만큼 파괴력이 약하다는 점인데, 그녀의 초월 능력은 그걸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상대의 약점을 파악해서 큰 대미지를 입히는 ‘간파’라는 스킬과 그녀 특유의 빠른 움직임은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완벽한 궁합이었다.
쌔엥-!
조금 전과 비슷한 속도로 그녀의 검이 쏘아졌고, 검을 들어 찌르기를 튕겨냈다.
카앙-!
첫 공격이 막힌 것에 신경도 쓰지 않고 그녀는 허리춤의 다른 검을 뽑으며 달려들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오히려 내 쪽에서 거리를 좁혀 그녀가 공격하기 어려운 구도로 만들었다.
덕분에 차윤지의 자세가 무너져서 역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퍼억!
“컥……!”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그녀의 무릎이 정확히 내 복부를 후려쳤다.
[-1751]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통증에 바닥에 쓰러진 나는 배를 부여잡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전투는 스포츠가 아니야.”
“쿨럭쿨럭…! 알겠습니다.”
그녀 말대로다.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든 간에 적을 쓰러뜨리면 승리한다.
그게 죽음과 맞닿아 있는 전장의 유일한 규칙이다.
다시 일어난 내가 자세를 잡았고, 뒤로 거리를 벌린 차윤지도 다시금 검을 들었다.
“뭐야, 여기서 둘이 뭐 하고 있어?”
이제야 우리를 발견한 민혁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다.
“나도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검술 교육받는 중이야.”
“오…. 신기한 일이네. 누나가 다른 사람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는 건 본 적 없는데.”
“그러게. 이건 또 새로운 재미군.”
어느새 다가온 유지한 아저씨도 턱을 만지작거리며 흥미롭게 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괜히 구경꾼들이 생기니까 몸이 더 긴장해서 뻣뻣해지는 거 같았다.
“저는 누나가 3분 안에 쓰러뜨린다는 것에 걸겠어요.”
“뭐?! 나도 그쪽에 걸고 싶은데. 그럼 나는 2분 안에 쓰러뜨린다.”
“저는 그럼 1분.”
“두 사람 다 꺼져 주면 안 될까요? 혼자 있고 싶어졌어요.”
저런 얘기를 들으니 마음속에서 오기가 생겨났다.
아무리 그녀가 SS급 헌터라고 해도 제대로 정신만 차리면 5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다.
“제가 저한테 걸어도 되나요? 저는 5분 버틴다에 걸죠.”
“오오!”
“자신감 넘치는걸?”
민혁과 유지한 아저씨는 즐거운 듯 웃음을 지었지만, 차윤지는 오히려 표정이 굳어졌다.
“…난 장난치는 게 아니야. 진심으로 네 실력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도 두 번째 공격까지 제대로 받아쳤다.
방심하지 않는다면 분명 더 버틸 수 있을 거다.
“본인 위치부터 알아야겠네. 간다.”
“네!”
쒜앳-!
순식간이었다.
정확히 그녀의 검이 내 심장을 꿰뚫고 지나간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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