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지옥에서 죽지 않는 법 (4)
헌터는 반드시 어느 한 단체에 소속되어야 한다.
단체는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는데, 국가에서 운영하는 ‘헌터 협회’와 사설로 운영하는 ‘길드’다.
나는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헌터로 일하고 있던 거라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헌터 협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물론 괜찮은 길드는 실력을 많이 보기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탓도 있다.
수수료가 있긴 하지만, 협회에서 계속 일거리를 잡아 준다는 건 나처럼 허접한 헌터에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 외에도 저렴한 가격에 보험을 들 수 있고, 꾸준히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안정적인 부분에선 물론 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게 좋아. 그래도 길드에 들어오면 전체적인 수익은 분명 증가할 거야. 나름 우리 길드는 이름도 있어서 일도 잘 들어오는 편이거든.”
당연한 말이었다.
사설 길드들도 순위가 있는데, 여기 팀원들이 소속되어 있는 ‘신월’이라는 길드는 손가락에 꼽히는 엄청난 길드였으니까.
날고 기는 헌터들도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길드의 제안을 받은 것이다.
평소라면 울면서 절을 하고 들어갔겠지만, 지금은 그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일이 끝나면 오라는 건…….”
“기다려 준다고. 나라도 등에 칼 찌른 놈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닌다고 하면 못 참을 거다. 복수든 뭐든 정리할 생각이잖아.”
“…….”
난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게이트 안에서 겪은 일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몇 번이나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을 정도로 힘들었다.
적어도 날 그렇게 만든 놈에게 똑같이 복수를 하지 않으면 두 발 뻗고 잠을 잘 수 없을 것만 같다.
아저씨는 그런 것까지 어느 정도 눈치채신 거 같았다.
“잘못하면 길드 전체에 피해를 줄지도 몰라요.”
“후우우…….”
아저씨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천천히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알고 있어. 만약 문제가 생기면 널 데리고 간 내가 책임지면 되는 거야.”
“하지만…….”
“현아. 사람은 가끔 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이것저것 따지다가 결국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너처럼 가능성 있는 젊은 녀석들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인생 선배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아저씨는 품에서 휴대용 재떨이를 꺼내서 담배꽁초를 집어넣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그렇게 말한 아저씨는 다른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짝짝-!
모두의 앞에서 박수를 치며 주목시킨 아저씨가 말했다.
“자. 슬슬 이동하자고. 게이트 공략하고 지친 건 알지만, 조금만 더 고생하자.”
“네.”
“갑시다.”
우리는 그대로 새로 베이스캠프를 만든 A-2 구역으로 이동했다.
미리 말해 둔 대로 다른 팀이 와서 우리 캠프 쪽도 지켜 주고 있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유지한 아저씨는 그쪽 팀의 대장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오늘 하루는 다른 구역으로 전진하지 않을 거야. 여기서 접근하는 몬스터만 처리하고 내일부터 앞쪽 공략 들어간다. A-7 구역을 맡을 팀이 내일 온다고 하거든.”
“알겠어요!”
“드디어 쉬는구만.”
심윤성 아저씨가 자리를 잡고 앉자, 민혁이 투덜거리며 절벽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아…. 나는 쉬지도 못한다고.”
시야가 밝고 발이 빠른 민혁이 주변 정찰과 경계 임무를 맡은 덕분에 다른 팀원들이 마음 놓고 쉴 수 있었다.
내가 민혁을 안쓰럽게 보고 있는데 옆으로 다가온 이신예가 작게 말했다.
“그렇게 가엾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쟤는 우리보다 돈을 더 가져가거든.”
“아…. 그런가요?”
이내 그녀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는데, 평소처럼 심술 난 얼굴이 아니니… 제법 미인…….
크흠…. 아무튼, 잠시 쉬는 시간 동안 나도 이것저것 정리하기로 했다.
먼저 이번에 얻은 장비를 꺼내서 착용했다.
[빙결의 갑옷(상의)
지옥의 냉기를 끌어모아서 가공한 갑옷.
착용 시 추위에 대한 내성이 생기며 얼음 속성 공격에 대한 피해가 줄어든다.
방어력+30 내구도 100/100]
[빙결의 갑옷(하의)
지옥의 냉기를 끌어모아서 가공한 갑옷.
착용 시 추위에 대한 내성이 생기며 얼음 속성 공격에 대한 피해가 줄어든다.
방어력+20 내구도 80/80]
위아래로 착용하니 전보다는 제법 봐 줄 만했다.
푸른색으로 기묘한 광이 흐르는 갑옷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 잘 어울리는데?”
“전에 거지처럼 다니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낫다.”
심윤성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딱히 당장 갑옷의 필요성을 느낀 건 아니지만, 미리 갑옷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힘을 많이 올려서 플레이트 아머도 크게 무겁진 않았으나, 움직임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어색하지? 한동안 입고 생활하다 보면 금방 익숙해져.”
유지한 아저씨가 내 갑옷을 통통 두드리더니 씨익 웃음을 머금었다.
“불사신인 녀석이 갑옷은 엄청 좋은 거 입네.”
생각해 보니까 그렇잖아?!
난 어차피 죽어도 금방 부활하지만, 갑옷은 망가지면 끝이다.
흐음…. 그렇게 생각하니까 엄청 아까운데.
앞으로 근접 전투를 단련할 생각이라 어차피 갑옷이 필요하긴 했다.
[최현 Lv.26
체력: 2650/2650 마나: 260/260 기력: 14/30
힘: 76 민첩: 32 지능: 32
(사용 가능 포인트: 6)
라이프 : 614개]
혼자서 게이트를 공략하고 리치왕을 쓰러뜨렸을 때 25레벨이 됐었다.
그리고 이번에 팀원들과 함께 다시 던전을 깨고 26레벨.
라이프 흡수는 아무래도 몬스터를 쓰러뜨릴 때 전투에 개입하면 효과를 받는 모양이다.
쓰러뜨린 데스나이트와 리치왕의 수만큼 라이프가 올랐지만, 라이프 룰렛과 라이프 파워를 한 번씩 써서 그런지 그만큼 라이프를 소모했다.
지금까지는 힘을 찍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제 마냥 하나의 능력치에만 투자할 수 없었다.
민첩도 조금 올려 볼까.
무거운 갑옷을 입으니 몸이 둔해진 것 같아 찝찝한 기분이었다.
일단 포인트는 좀 더 고민해 보고, 스킬을 확인해야지.
이 스킬들도 25레벨이 되면서 얻은 것들인데, 그때 정신없이 바쁜 탓에 이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Passive - 활 숙련 Lv.1
활을 무기로 사용 시, 대미지가 3% 증가한다.]
[Passive - 검 숙련 Lv.1
검을 무기로 사용 시, 대미지가 3% 증가한다.]
먼저 두 가지 스킬은 둔기 숙련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활은 라이프 룰렛을 위해서 억지로 수련해서 패시브 스킬을 얻은 것 같다.
그 후로는 계속 검만 쓰고 있으니 검 숙련도 자연스럽게 획득했다.
그리고 전혀 예상이 안 되는 ‘복습’이라는 녀석이 가장 궁금했다.
[Active – 복습 Lv.1
마지막에 죽은 모습을 3자의 눈으로 볼 수 있다.
범위-10m 쿨타임-6시간 마나-100]
……?
이건 무슨 스킬이지.
아니, 애초에 스킬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죽었던 걸 다시 확인해서 내 맨탈을 부수고 싶은 거라면 정말 완벽한 스킬이다.
하지만 스킬 이름부터 ‘복습’이라는 거지 같은 이름으로 지어 놓고 3자의 눈으로 내가 죽는 모습을 되감기 해서 보라는 건데…….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꾸역꾸역 삼켜 냈다.
뭐… 언젠간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이렇게 생각하며 애써 기분을 달랬지만, 솔직히 전혀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라이프 룰렛’과 ‘라이프 파워’에 스킬 포인트를 4개씩 써서 남은 포인트는 17개.
패시브 스킬에 투자하는 건 어쩐지 아깝단 말이지.
일단 이쪽도 급한 게 아니니 남겨 두는 게 좋겠다.
검 숙련은 찍어 두고 싶지만, 앞으로 계속 검을 쓴다는 보장은 없다.
“민혁이랑 윤지는 주변 경계 부탁해. 아무래도 아래층에서 보급이 오는 것 같거든.”
그렇게 말한 유지한 아저씨가 뒤쪽 계단으로 걸음을 돌렸다.
조심스럽게 아저씨를 따라나선 나는, 전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보급이라는 건 뭔가요?”
“말 그대로 우리가 이곳에서 싸울 수 있도록 물품을 지원받는 거야. 헌터 협회 소속 헌터들은 협회에서 물품을 보내 주지만, 우리 사설 길드는 길드에서 따로 보급만 관리하는 보급팀이 있지.”
“그렇구나.”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입는 것, 씻는 것, 그리고 이곳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생활용품들을 보내 줘.”
게이트에서만 생활했던 내 입장에선 이곳의 구조 체계 모든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게이트는 공략하는 동안만 열심히 싸우고 공략에 성공하면 다음 게이트에 들어갈 때까지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공략층은 언제 전투가 일어날지 몰라서 편히 쉴 수도 없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전장이었다.
“호오…. 오랜만이네, 캡틴.”
“그러게. 잘 지냈냐?”
대략 5명 정도가 커다란 가방과 상자를 갖고 올라왔는데, 그들을 보자마자 유지한 아저씨가 버선발로 나가서 인사를 나누었다.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새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남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호오. 좋아 보이는데 캡틴!”
“놀리는 거라면 그만둬라. 힘들어 죽겠으니까. 다른 애들은 잘 지내?”
“뭐, 캡틴 덕분에 다들 잘 지내지. 그보다 길마가 맨날 캡틴 보고 싶다고 징징대니까 그거나 어떻게 좀 해 줘.”
“…벌써 돌아가기 싫어지는데.”
반갑게 인사를 하던 도중, 그 남자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캡틴 아는 사람인가?”
“던전에서 사귄 친구지. 괜찮은 녀석이야.”
유지한 아저씨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우리 길드에 오라고 제안했는데, 튕기더라고. 비싼 녀석인가 봐.”
“호오…. 호오…….”
턱을 매만지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따가웠다.
“여긴 우리 길드 보급팀 팀장, ‘이태휘’. 나랑 동갑 친구야.”
“만나서 반갑습니다, 비싼 분.”
그가 손을 내밀었고, 멋쩍게 웃으며 악수를 받았다.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이태휘 아저씨는 다시 유지한 아저씨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음 주에는 내려오는 거지?”
“가야지. 우리 애들도 많이 지쳤으니까 슬슬 내려가서 휴가를 즐길 때가 됐어.”
“얼른 오라고, 길마 투정이 날로 늘어 가고 있어.”
“…그건 나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데.”
두 사람은 그 후에도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은 뒤, 인사를 나눴다.
“그럼 우리는 이제 내려간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했어. 다음에 술 한잔하자고.”
다른 보급 팀원들도 유지한 아저씨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보급팀이 다시 아래층 계단으로 사라지고 난 후에 심윤성 아저씨가 뒤에서 나타났다.
“오! 보급인가!”
“일찍 와서 인사 좀 하지 그랬어.”
“…나 태휘 녀석이랑 어색한 거 알잖아.”
그렇게 말한 심윤성 아저씨는 커다란 짐 두 개를 어깨에 걸치고 다시 베이스캠프로 이동했다.
“자. 너도 하나 들어.”
“커억……!”
유지한 아저씨가 짐을 하나 등에 올려 줬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무거워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갑옷 벗을걸.
“그런데 저는 아저씨가 길드 마스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음…. 사실 대부분 실무를 내가 처리하고 있긴 한데, 길마는 따로 있어. 재밌는 녀석이지.”
“그렇구나, 어떤 분인데요?”
“18살 여고생.”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