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지옥에서 죽지 않는 법 (3)
“이걸로 17마리.”
“아무래도 더 이상 없는 거 같은데요?”
민혁이 나무 위에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유지한 아저씨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대충 정리된 거 같다. 슬슬 보스 공략 준비를…….”
“잠깐. 그 전에 할 말은 해야겠어.”
아저씨의 말을 끊고 손을 들고 한 걸음 걸어 나온 이신예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물론 대장이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계속 찝찝하게 있고 싶진 않아.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어느 정도 설명을 해 주던가. 그렇게 외면하고 모른 척하면 우리 기분도 좋진 않잖아.”
맞는 말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팀원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니까.
유지한 아저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다들 넘어가고 있었지만, 계속 숨기기만 하는 건 이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역시 얘기하는 게 좋겠어요.”
내 말에 유지한 아저씨는 내 어깨를 두드려 줬다.
아저씨에게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고, 팀원들은 아저씨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놀란 얼굴.
“그럼 윤지가 처음 말했던 것처럼 정말 초월 헌터라는 거야?!”
“맞아요. 사실 저도 바로 눈치채서 놀랐어요.”
직접 내 입으로 말했지만, 차윤지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렇군.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말대로라면 대충 지금까지 일들이 이해가 가.”
“실력은 최소 B급인데 공식적인 랭크는 E급 헌터인가. 어이가 없군.”
“게임 능력이라니 부럽잖아!”
민혁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도 기왕이면 그런 능력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인벤토리도 엄청 부럽다.”
“하하…. 편하긴 해.”
얘기를 끝내고 나자 이신예가 나를 보며 말했다.
“어째서 말하지 않았는지 어느 정도 이해는 돼. 하지만 너도 우리 상황을 이해해 주면 좋겠어.”
“네. 알고 있어요.”
그녀가 그런 말을 했던 건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그녀 상황이었어도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이었을 테니, 그녀에게 악감정은 없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을 속이면서까지 숨기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2층 데스나이트 사건 때 갇혀서 이제야 나왔다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그러게. 거의 1년 반 동안 게이트 안에 있었던 거잖아.”
이신예와 민혁이 걱정스럽게 날 바라봤다.
“뭐랄까. 하루도 안 쉬고 계속 싸우던 게 일상이라, 이런 상황도 크게 힘들진 않네요.”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안쓰럽다고 해야 하나.”
심윤성 아저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자, 일단 보스 몬스터 공략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혼자서 리치왕을 쓰러뜨린 전적이 있는 현이가 설명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네?! 제… 제가요?!”
깜짝 놀라서 되묻자, 유지한 아저씨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어디까지나 정보를 통해 얻은 게 전부지만, 넌 직접 피부로 느꼈잖아. 그쪽이 훨씬 도움이 되거든. 아무리 우리가 숙련된 헌터들이라고 해도 네이비 라벨부터는 실수 한 번이 바로 목숨과 직결돼. 그러니 잘 부탁한다.”
“…알겠어요. 제가 리치왕과 싸웠을 때 얻은 정보를 전부 알려 드릴게요.”
팀원들이 모두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나뭇가지로 바닥에 1부터 10까지 숫자를 적었다.
“리치왕이 쓰는 마법은 총 10가지예요. 1번과 2번은 보면 쉽게 피할 수 있는 마법이니까 생략하고, 3번부터 설명할게요.”
마법의 이름이나 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서 대충 기억나는 대로 설명해 줬다.
다행히 다들 내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는 것 같았다.
“가장 주의해야 할 마법은 4번인데, 주변 공기가 차갑게 식으면서 단숨에 그곳을 얼려 버리는 마법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아서 피하기 힘들어요. 감각을 세우고 공기가 얼어붙는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그곳을 빠져나가야 해요.”
“그것 외엔 피할 수 없는 거야?”
“정확하진 않지만, 극도로 얼어붙은 공기를 들이마시면 몸의 내부부터 얼기 시작하는 거 같아요. 만약 조금 늦게 눈치채셨더라도 절대 숨을 쉬면 안 돼요.”
그다음엔 쿨타임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다.
물론 나 혼자 리치왕을 상대할 때는 리치왕이 마나를 아끼기 위한 스킬 구조였기 때문에 그때와 같은 구조로 싸우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말해 주는 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쿨타임들이 있었다.
“여기 7번 마법은 쿨타임이 굉장히 길어요. 한 번 쓰고 나면 전투가 끝날 때까진 다시 쓰지 못할 거예요. 10번도 마찬가지고요.”
“확실해? 만약 우리가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있는데 그 마법이 나오면 위험할 수도 있어.”
“확실합니다.”
분명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은 신참 헌터였다.
그래도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데스나이트와 리치왕에 관한 것이다.
지겹도록 많이 싸웠기에 지독하게 잘 알고 있는 놈들이다.
“좋아. 그럼 들어가자.”
유지한 아저씨를 선두로 지하 계단을 통해 걸음을 옮겼다.
이내 낯익은 문이 모습을 드러냈고, 망설임 없이 문을 힘껏 열었다.
끼이익-!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이곳에 발을 들인 걸 후회하게 해 주마.”
“흩어져!”
보스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각자 거리를 벌리고 흩어졌다.
리치왕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마법은 좁은 범위에 타격하는 마법이었다.
즉,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마법 범위에 들어갈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뜻이었다.
“윤지야.”
차윤지가 미리 계획한 대로 선봉으로 나서서 리치왕을 향해 내달렸다.
이 팀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마법은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가 보스 어그로를 가져가면 다른 팀원들은 조금 더 편하게 싸울 수 있다.
예상대로 보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돌아갔고, 그 틈에 다른 팀원들도 리치왕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리치왕은 원거리에서 마법을 쓰는 마법사 계열의 몬스터였기 때문에 근접전에선 취약했다.
타악!
순간 바로 옆에 있던 민혁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몸을 날리는 게 보였다.
“4번이야!”
젠장… 완전히 차윤지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일부러 연기하면서 이쪽을 노린 건가.
하지만 오히려 리치왕이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습으로 공격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마법을 썼겠지만, 놈의 마법을 알고 있는 우리는 대처할 수 있었다.
쌔엑-!
그사이 리치왕 바로 옆까지 다가간 차윤지가 날카롭게 리치왕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지팡이로 허겁지겁 막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공격이 리치왕에게 대미지를 주고 있었다.
“꺼져라!”
타앙-!
리치왕이 지팡이로 바닥을 치는 순간, 차윤지가 몸을 굴려서 이동했다.
덕분에 바닥에서 솟아오른 얼음송곳은 아무것도 꿰뚫지 못했다.
그리고 뒤에서 달려든 심윤성 아저씨와 민혁의 공격이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크아악! 이 자식들…. 대체 어떻게……!”
묻고 싶겠지.
어떻게 자신의 마법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는지.
게임 속에서 공략집을 보고 던전에 들어가는 것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들어가는 건 차원이 다르다.
후웅!
리치왕을 중심으로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10번! 다들 멀리 떨어져요.”
그가 쓰는 마법 중에서 유일하게 광범위 마법이었다.
커다란 폭풍을 일으켜서 날카로운 얼음 조각을 날리는 마법.
마지막에 나를 죽였던 마법이기도 했다.
뒤로 물러난 팀원들은 모두 이신예 옆으로 붙었고, 그녀가 뭔가 중얼거리자, 반투명한 벽이 우리를 감싸 주었다.
“이게…. 방어 주문…! 직접 들어와 본 건 처음이에요.”
치유계 헌터들 중에서도 뛰어난 실력의 헌터만이 쓸 수 있는 주문이었다.
웬만한 충격은 버틸 수 있는 강력한 방어막이었고, 범위만 넓을 뿐 파괴력은 약한 10번 마법은 이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다.
파앗!
마법이 끝나자마자 방어막을 지웠고, 기다렸다는 듯이 차윤지가 리치왕을 향해 튕겨 나갔다.
정확히 리치왕의 목과 가슴 중앙에 그녀의 검이 꽂혔다.
이내 민혁이 쏜 화살이 리치왕에게 고슴도치처럼 박혔고, 유지한 아저씨의 검이 닿기 직전 리치왕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후우…. 끝났다.”
“나름 보스 몬스터라고 오래 버티네.”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민혁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게 오래 걸린 거라니…. 대체 어떤 세계에 사는 거냐.
가까이서 싸우는 모습을 보니 이들이 얼마나 괴물인지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몬스터가 어떤 공격 패턴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 공략이 훨씬 쉬워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리치왕을 이렇게 빨리 공략하는 건 황당한 수준이었다.
리치왕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곳에는 네이비 스톤과 갑옷, 마력석이 보였다.
내가 혼자서 몬스터를 잡는 게 아니라면 바로 인벤토리로 아이템이 들어가진 않는 모양이었다.
“음…. 생각해 봤는데, 리치왕 공략 보상은 현이가 가져가는 게 좋겠어.”
유지한 아저씨가 나를 보며 말했고 깜짝 놀란 내가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네?! 제가요?! 아니에요! 저는 리치왕에게 대미지를 하나도 넣지 못한걸요. 그냥 피해 다니기 바빴어요.”
“아마 여기 나랑 생각이 다른 사람은 없을걸.”
아저씨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자, 다들 빙긋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네 덕분에 엄청 쉽게 클리어할 수 있었으니까.”
“너무 겸손하면 재수 없어.”
“나도 대장 말대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여전히 떨떠름한 내 표정에 유지한 아저씨가 말을 덧붙였다.
“물론 우리도 헌터라 그냥 다 주는 건 무리고, 데스나이트랑 오크를 잡아서 얻은 보상은 우리끼리 나누는 거로. 알겠지?”
더 이상 내가 얘기한다고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다른 것보다 빙결의 갑옷(하의)이 눈에 밟혀서 내심 욕심이 났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어쨌든 현이 덕분에 빨리 깨서 다행이다. 금방 돌아갈 수 있겠어.”
항상 다른 헌터들의 눈치만 살피고, 민폐라는 얘기를 들어왔었기에 누군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해 준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내가 동경하는 상위 헌터들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System :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곧 게이트 밖으로 이동됩니다!]
전에 봤던 문구와 같은 시스템 창이 나타났고, 잠깐 어지러움과 함께 눈을 떴을 땐 게이트 밖으로 이동된 후였다.
혼자 있었을 땐 10분의 여유 시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뭔가 다른 건가.
“다들 잠깐 쉬다가 다시 우리 구역으로 돌아간다. 게이트 공략하느라 수고했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긴장을 풀고 맘껏 쉴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기력을 회복하고 있는 사이에 유지한 아저씨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고생했어. 어떻게 그런 던전에서 혼자 살아남은 거냐? 나라면 진작 멘탈 깨져서 울다가 끝났을 텐데.”
“그냥 죽으려고 발버둥 쳐도 소용없길래 살려고 발버둥 친 거죠.”
아저씨는 입에 담배를 물고 연기를 쭉 빨아들이고 나서 천천히 허공에 뱉어냈다.
“현아.”
“네……?”
그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나긋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중에 일이 다 끝나면 우리 길드 들어올래?”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