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지옥에서 죽지 않는 법 (2)
“정글 필드야.”
“선두는 민혁이, 후방은 윤성이 형이 맡아. 몬스터를 발견하면 윤지만 먼저 움직인다.”
“네.”
전장에 있는 그들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고, 긴장감 넘치는 모습은 오싹할 정도였다.
나까지 그들의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가운데에 끼어 있는 나는 움츠린 상태로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연신 눈치를 살폈다.
원래대로라면 정찰하고 공략에 들어가는 게 맞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속도전을 택한 거다.
“전방에 데스나이트 2마리.”
“…블루 라벨인가. 제법 골치 아픈 게이트네. 민혁이랑 윤지가 처리해. 나머지는 앞으로 진행한다.”
“네!”
유지한 아저씨의 오더에 두 사람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두 사람이 데스나이트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 누구도 전투가 벌어지는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건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에서 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동료가 질 리 없다는 확고한 믿음.
잠깐… 데스나이트?
익숙한 이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형씨… 여기 설마……!”
“……!”
내가 있었던 게이트와 똑같이 생긴 지형이었다.
1년 반이나 갇혀 있었던 곳의 지형을 까먹을 리 없다.
심지어 위치를 기억하기 위해 외워 두었던 이상하게 생긴 나무까지 그대로였다.
“아저씨! 잠깐만요.”
“뭐, 지금은 시간이…….”
가장 앞에서 걷고 있던 유지한 아저씨는 내 눈을 보더니 발을 멈췄다.
“…너 이쪽으로 와.”
눈치 빠른 아저씨는 바로 나를 따로 불러내서 팀과 조금 거리를 벌렸다.
“무슨 일이야?”
“여기 제가 갇혀 있었던 게이트랑 똑같이 생겼어요. 만약 그때랑 완전히 같은 곳이라면 데스나이트가 17마리, 오크가 4마리, 오크 궁사가 2마리, 오크 주술사가 2마리 있을 거예요.”
내 말에 아저씨는 놀란 눈으로 가만히 주변을 훑어봤다.
“확실해? 정보가 잘못되면 우리가 모두 위험할 수도 있어.”
“확답은 못 하겠지만, 나무들 모양까지 똑같은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커요.”
아저씨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한다.
팀의 대장으로서 그의 판단은 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정보가 있다면 게이트 공략이 훨씬 수월해지겠지만, 만약 틀린다면 위험 요소가 생길 수도 있다.
“보스 몬스터는 지하에 나오는데, 네이비 라벨인 리치왕이에요.”
“좋아. 알았어. 참고할게.”
다시 팀으로 돌아가자 심윤성 아저씨와 이신예가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 뭘 숨기고 있는 거죠?”
“전장에서 굳이 뒤로 가서 얘기할 정도로 중요한 얘기라는 건가.”
의심을 받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굳이 내가 가진 정보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공략 시간 문제가 아니라, 팀의 안전과도 직관된 문제니까.
“대장! 3시 방향 데스나이트 3마리 발견! 5시 방향에서도 2마리 접근 중.”
“젠장…. 한꺼번에 몰려오는군. 윤성이 형은 신예 지켜 줘. 내가 거리를 벌리고 최대한 시간을 끌 테니까.”
“잠깐…! 이 애송이는?!”
“말했잖아.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잘 살아남을 거라고.”
그렇게 말한 유지한 아저씨가 접근하는 데스나이트 쪽으로 달려갔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민혁이와 차윤지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시간을 버는 것인가.
“아무리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심윤성 아저씨는 힐끔힐끔 나를 바라봤고, 뒤로 물러선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냈다.
라이프 파워를 쓰면 적어도 힘에서 크게 밀리진 않는다.
최대한 안정적으로 싸운다면 이기진 못해도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것이다.
5시 방향에서 접근하던 데스나이트 중 하나가 심윤성 아저씨에게 달려들었다.
쩌엉-!
아저씨의 도끼와 데스나이트의 검이 부딪히며 굉음이 퍼졌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아저씨의 뒤에 있는 이신예에게 향했다.
“라이프 룰렛.”
트드듯- 파앙!
[-221]
활을 꺼낸 나는 데스나이트에게 바로 화살을 명중시켰고, 놈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
심윤성 아저씨가 다른 한 마리를 처리할 때까진 내가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신예 쪽으로 걸어가던 데스나이트는 나에게 고개를 돌리고 다가왔다.
“뭐야?! 너 미쳤어?! 뭐 하는 짓이야!”
깜짝 놀란 이신예가 소리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데스나이트에게 검을 겨누었다.
긴장할 거 없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맞섰던 놈이다.
“라이프 파워.”
스으읍… 후우우…….
어제 사용했던 라이프 파워의 쿨타임이 돌아서 다행이었다.
라이프 파워를 사용하고 검을 꽉 움켜쥐었다.
게이트에 갇혀서 데스나이트와 싸웠을 땐 라이프 파워가 지금처럼 레벨이 높지 않았다.
이 능력치로 맞서는 건 처음이었기에 묘한 기대감이 서렸다.
터엉!
내게 달려드는 데스나이트를 보고 심윤성 아저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애송이!”
쌔엥-!
힘껏 휘두른 데스나이트의 검은 아무것도 베지 못한 채 허공을 훑어 냈다.
안타깝게도 데스나이트의 첫 패턴은 너무나 많이 봐서 이젠 눈을 감고 피할 정도였다.
“……!”
파악!
바로 놈의 머리를 향해 반격하는 데 성공했다.
[-182]
최대 레벨까지 올린 라이프 파워로 싸워 본 건 처음이기에 높은 수치에 나도 놀랄 정도였다.
처음에 썼던 라이프 룰렛의 대미지를 합치면 벌써 400 정도의 대미지를 입혔다.
과거의 나였으면 좋아서 춤을 출 지경이었겠지.
데스나이트가 이어서 바로 다시 공격해 왔지만, 민첩도 2배가 된 탓인지 공격 방향을 조금 늦게 파악해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닿기 직전에 아슬아슬한 정도였지만.
“저 녀석! 데스나이트에 밀리지 않고 있잖아.”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여전히 데스나이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데스나이트의 공격은 위협적이지만, 그렇다고 절대 피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검에 한 번만 맞아도 죽는 건 마찬가지다.
다만 데스나이트와 지금까지 너무 많이 싸워서 전투 방식이 몸에 익은 게 컸다.
그리고 머리로 이해한 것을 속도가 빨라져서 충분히 반응할 수 있었다.
검을 뒤로 당기는 걸 보자마자 데스나이트 쪽으로 힘껏 달려들었다.
찌르기 자세……!
쐐액!
예상대로 데스나이트의 긴 검이 공기를 찢어발기듯 단숨에 뿜어졌다.
긴 팔과 검 때문에 거리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게 찌르기의 강점이었지만, 그만큼 공격이 빗나가면 큰 허점이 생긴다는 약점도 있었다.
옆으로 피한 내가 다시 한번 데스나이트의 머리에 검을 후려쳤다.
[-210]
벌써 놈의 체력의 10분의 1이나 깎았다.
“하아… 하아…….”
숨이 차오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력도 조금 올려 둘걸.
거친 숨을 내뱉으며 긴장감에 굳어 있는 손을 털어 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적어도 앞으로 2번 정도는 어떻게든 공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엔……!
“피해!”
뒤에서 들려온 심윤성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드는 순간, 코앞까지 다가온 데스나이트의 검이 보였다.
젠장…! 어느새……!
카가가각-!
“……!”
아래에서 튀어나온 다른 검이 데스나이트의 검을 흘려보내듯 궤도를 바꾸었다.
촤앗-!
그와 동시에 차윤지의 다른 검이 데스나이트의 가슴 쪽을 훑고 지나갔다.
아니, 이게 동시에 가능한 동작이란 말인가.
바로 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미안, 늦었어.”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데스나이트가 다시 자세를 잡기 전에 단숨에 공격을 퍼부었다.
그 짧은 순간에만 데스나이트에게 3번의 공격이 들어갔다.
카앙-!
다음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검 두 자루로 튕겨낸 그녀는 데스나이트의 갑옷과 투구 사이에 검을 쑤셔 넣었다.
꿀꺽.
무시무시한 속도와 정확도, 그리고 파괴력.
내가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들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마치 그녀는 나와 다른 시간에 사는 것처럼 눈을 깜빡이는 동안 몇 번이나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쌔엥-!
데스나이트가 아직도 움직이려고 하는 걸 보고, 그녀의 검이 다시 번쩍였다.
이내 그의 목이 바닥에 뒹굴었다.
“…….”
“우리 SS급 실력이 장난 아니지?”
어느새 데스나이트를 처리한 심윤성 아저씨와 민혁이가 내게 다가왔다.
“아… 네.”
겨우 ‘장난 아니다.’라고 말할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평생 저런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엄청난 실력이었다.
데스나이트를 죽지 않고 쓰러뜨리는 것조차 지금의 나로선 상상하기 힘든데, 그녀는 데스나이트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저는 대장 도와주러 가 볼게요.”
“부탁해!”
데스나이트를 깔끔하게 쓰러뜨린 차윤지가 유지한 아저씨 쪽으로 달려가는 걸 멍하니 보는데, 잔뜩 화난 표정의 이신예가 시야에 확 들어왔다.
“너 미쳤어?! 방금 진짜로 죽을 뻔했다고. 내가 아무리 특수계라고 해도 S급이야. 너한테 도와주라고 한 적 없어. 치유계는 회복 능력 외에도 방어 기술이 있으니까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렇지만…….”
“누군가를 위해 죽어 주는 게 정말 그 사람을 위한 일인지 잘 생각해 봐.”
이신예의 날이 선 목소리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혼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화를 낼 줄 몰랐다.
부상을 당한 민혁이 쪽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떨궜다.
“너무 상심하지 마. 저 녀석도 나름대로 상처가 많은 녀석이거든. 그보다 너 정말 E급 헌터야? 방금 보여 준 실력은 못해도 B급, 어쩌면 A급 헌터 정도였다고!”
“그러게. 누가 봐도 정찰팀 E급 헌터라는 건 거짓말로 보이는데.”
어느새 다가온 민혁이 빙긋 웃으며 심윤성 아저씨 말에 거들었다.
“하하…. 그게…….”
“뭐, 사정이 있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대장도 우리한테 얘기해 주지 않는 걸 보면 우리가 몰라도 되는 문제라는 거겠지.”
“…미안해.”
민혁에게 고개를 숙이자, 그는 빙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냐, 분명 네가 실력이 있는 건 알겠는데, 위험한 행동은 하면 안 돼. 몬스터와 혼자서 싸운 걸 말하는 게 아니야. 무슨 뜻인지 알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는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방금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전투는, 시간을 끌면서 방어 위주로 전투를 이끄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데스나이트의 빈틈이 보일 때마다 공격했고, 다른 동료들을 기다리지 않는 오만한 방식이었다.
그저 내 욕심이었다는 거다.
“이미 잔뜩 혼난 거 같으니 나는 말하지 않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심윤성 아저씨의 작은 배려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내 떨어졌던 유지한 아저씨와 차윤지가 돌아오는 게 보였다.
“방금 7마리 처리했지?”
“네. 7마리…….”
대답하면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렇게 오랜 시간 죽을 고생을 하며 잡았던 데스나이트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7마리라니……. 내가 너무 비참해지잖아.
“12시 방향에서 데스나이트 2마리, 그리고 그 바로 뒤쪽에 오크들이 보여요. 정확히 어떤 오크인지는 아직 확인 불가능.”
민혁의 보고에 유지한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놈들이 걸어오는 건 편하네. 데스나이트는 나랑 윤지가 처리한다. 민혁이는 뒤에 있는 오크들 잡아 주고, 주변 계속 경계해 줘.”
“네!”
아래층에서 봤던 공략 팀들은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각자의 역량과 재량껏 전투를 벌이고 상황에 따라 대처한다.
그렇기에 이런 체계적인 전투 모습은 내게 너무나 생소하면서도 이상적이었다.
“정신 차려. 멍하니 구경하고 있지 마.”
이신예의 말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적어도 여기 있는 동안은 너도 우리 팀원이야. 그러니까 아까처럼 위험한 짓도 하지 말고.”
팀원…….
그렇구나.
어쩌면 반대로 이신예가 나를 지키겠다고 위험한 행동을 했다면 나 역시 화냈을지도 모르겠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 아주 조금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