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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x9999-11화 (11/176)

11화 : 던전 생존기 (2)

던전은 바로 앞에서 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솟아 있는 탑이다.

각 층에는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인간은 던전 자체를 정복하기 위해 1층부터 차근차근 몬스터들을 박멸하기 시작했다.

던전에 있는 몬스터를 박멸하고, 게이트를 공략해서 없애며 한 층씩 던전을 올라가고 있다.

그런데…….

“왜 내가 13층에 있는 거냐고!”

내 비명이 동굴 곳곳에 울려 퍼지는 걸 듣고, 앞에 있던 남자가 표정을 잔뜩 찡그렸다.

“미쳤어?! 정신 차려! 13층은 아직 공략 중이라고!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란 말이야. 죽고 싶다면 계속 소리 질러도 상관없지만, 나도 데려가는 건 사양이다.”

그의 말에 나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최현’이라고 합니다. 죄송해요.”

“괜찮아. 나는 ‘유지한’이야. 이래 봬도 S급 헌터다.”

그는 주변을 살펴본 뒤 내 옆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곤 랜턴을 끈 뒤 숨을 크게 내뱉었다.

“후우…. 이쯤이면 안전하겠지. 자, 그럼 어째서 혼자 이곳에 있는지부터 들어볼까? 편하게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

갈색빛의 레더 아머를 입고 있는 유지환은 짧은 숏컷에 지저분하게 수염이 자라 있었다.

확실히 딱 아저씨라고 부를 만한 인상이었다.

“2층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왔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여기였어요.”

“…거짓말하려면 그럴듯하게 해라. 게이트를 공략하면 들어갔던 입구가 있던 곳으로 나오는 게 기본이라고.”

아저씨는 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내 모습은 누가 봐도 13층에서 상위 몬스터와 싸우는 사람의 차림은 아니었다.

갑옷도 입고 있지 않았고, 장비도 다 인벤토리에 넣어 둬서 허름한 옷차림뿐이었다.

심지어 1년 반 동안 게이트에서 같은 옷만 입어서 너덜너덜해진 수준이 가관이었다.

헌터라기보단 거지에 가까운 꼴이었다.

“흐음…. 또 보면 거짓말하는 거 같진 않은데…. 일단 동굴 밖으로 나가자. 다른 동료들이 밖에 있으니까 그쪽이랑 합류하고 얘기하는 것으로 하지.”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필이면 13층이라니!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강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데 13층에선 ‘그린 라벨’이나 ‘블루 라벨’의 몬스터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나온다고 들었다.

아저씨 뒤에 딱 붙어서 천천히 동굴 밖으로 나가자 밤인지 주변이 어두웠다.

“뭐야, 대장! 누구야?”

아저씨를 발견한 남자 한 명이 단숨에 이쪽으로 달려왔다.

“최민혁?!”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자 그는 내 태도에 불쾌했는지 나를 쏘아봤다.

당황한 나는 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워낙 유명한 분이라 저도 모르게.”

“아니에요. 자주 겪는 일입니다. 사과하셨으니 넘어가죠.”

뚜렷한 이목구비에 훤칠한 키, 하얀 피부는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준수했다.

S급 헌터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그는, 나와 같은 25살이었다.

‘신궁’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활 실력을 자랑하며 종횡무진 던전을 누비고 다니는 유명 인사였다.

“문제가 조금 있었나 봐. 다른 팀원들을 불러서 오늘은 정리하고 밤을 보내도록 한다.”

“알겠어요!”

아저씨의 말에 최민혁은 서둘러 어디론가 뛰어갔다.

동굴 밖은 넓은 평야와 숲이 이어져 있었고, 아저씨를 따라가니 나무 바리케이드를 세워둔 임시 막사가 보였다.

“내일 보급팀이 물자를 가지고 올라올 테니, 그때 같이 내려가도록 해.”

“아…. 네. 감사합니다.”

막사 근처에 보이는 나무가 온통 붉은 피에 젖어 있어서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다른 헌터들은 보이지 않았는데, 아저씨는 모닥불 앞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 와서 좀 쉬어. 방금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온 거라며.”

아저씨는 여전히 나를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는 모양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반대 상황이었어도 나 역시 아저씨를 의심했을 것이다.

2층 게이트를 공략하고 갑자기 13층에서 나오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은 얘기였다.

물론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내가 있던 게이트의 존재였다.

2층 게이트에서 데스나이트와 리치왕이 나타난 것도, 게이트 입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도, 그리고 공략 후에 나온 곳이 13층이라는 것도.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과는 달랐다.

“너도 헌터야?”

“네…. 민망하지만, E급 헌터예요.”

내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아저씨가 다시 질문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헌터 장비가 아닌데?”

“저는 정찰팀 소속이거든요. 문제가 좀 있어서 던전 공략까지 그곳에 있었는데 나오고 보니 여기였어요.”

진실을 기반으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일부러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 나를 찌른 범인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알려지면 범인이 도망치거나 손을 쓸지도 모른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살아남아서 범인의 뒤를 쫓는 게 중요하다.

“…그렇군. 솔직히 말해서 완전 수상하거든. 게이트를 공략하고 다른 층으로 이동됐다는 얘기는 이 바닥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옷차림도 몇 년씩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 같고 말이지. 무엇보다…….”

타앗!

갑자기 아저씨는 내 손목을 잡아당겨서 손바닥을 펼쳤다.

“손에 박혀 있는 굳은살이나 손가락 형태만 보면 절대 정찰팀 소속 E급 헌터가 아니야. 이건 무기를 한참 휘두른 손이거든. 특히 이쪽 손가락 끝에 박혀 있는 건 검이나 둔기가 아닌, 활도 오랜 시간 사용했다는 증거지.”

“…….”

S급 헌터라는 칭호가 괜히 붙는 게 아니구나.

“하지만 딱히 악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는 느낌도 없으니 나도 굳이 이 이상 추궁하진 않겠다.”

이미 다 추궁한 거 같은데.

방금 잔뜩 추궁당했거든요?!

“사람은 각자 다들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다만, 자신의 말과 행동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명심할게요.”

빙긋 웃음을 머금은 아저씨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아까 말한 것처럼 보급팀이 내일 올 예정이라 마땅히 줄 게 없네. 이거라도 먹어.”

“감사합니다!”

헌터들이 전투 중에 자주 먹는 칼로리바였다.

거의 2년 만에 먹는 인간 세상의 음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초콜릿과 달콤한 곡물의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흑…. 젠장…….

초콜릿은 원래 이렇게 달콤했던가.

“…그렇게 맛있냐?”

“너무… 맛있습니다.”

눈물 젖은 초코파이…….

아니, 칼로리바를 먹어 봤는가.

“형씨! 나도 먹고 싶다고! 그건 대체 무슨 음식인데?!”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발렌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단숨에 칼로리바를 입에 욱여넣었다.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사이에, 멀리서 아까 봤던 최민혁과 다른 사람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여자……?

그것도 나랑 비슷한 또래의 여자였다.

13층에서 활동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어린 헌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중에서도 둘이나 여기 있다니…….

“다른 두 사람도 금방 올 거예요. 주변에 함정만 설치하고 정리하겠대요.”

“고생했어.”

최민혁 옆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차… 차윤지……!?

헌터들 중에서 최고 랭크인 SS랭크는 겨우 네 사람뿐이다.

그녀는 그중 한 사람으로, 이도류로 유명한 초월 헌터였다.

SS랭크는 워낙 유명해서 웬만한 연예인보다도 인지도가 높았다.

붉은색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봤다.

잠시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던전 미아라고나 할까. 신경 안 써도 돼. 내일 보급팀이 오면 데려갈 거다.”

“…….”

아저씨의 말에 차윤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초월 능력은 ‘간파’라는 것인데, 몬스터와 싸울 때 몬스터의 약점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곳을 공격해서 단숨에 숨통을 끊어 버리던가, 치명적인 대미지를 입히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말이 쉽지, 보이는 것과 몸이 따라 주는 건 다른 얘기다.

애초에 그녀는 무시무시한 전투 능력을 갖고 있어서 초월 능력이 더 빛을 발하는 것이다.

무뚝뚝하고 도도한 차윤지는 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남자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아직 9시밖에 안 됐는데 웬일로 빨리 정리한다 했더니… 손님이야?”

덩치 큰 남자가 어깨에 묵직한 도끼를 걸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걸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나를 이리저리 훑어봤다.

“어디서 또 이상한 녀석을 주워 왔군.”

“하아암…. 졸려…. 난 바로 잘래.”

그리고 그 옆에는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있었다.

“이쪽은 ‘심윤성’. 그리고 방금 막사에 들어간 건 ‘이신예’. 통신계 헌터지.”

“뭐야, 이 허름한 차림의 애송이는?”

키가 2m는 되어 보이는 심윤성은 내 옆으로 다가와 씨익 웃음을 머금었다.

워낙 덩치가 커서 내 위에 그늘이 생길 지경이었다.

“보다시피 원래 이런 성격이라…. 미안하다. 이해해 줘.”

“아… 아뇨, 괜찮아요.”

심윤성의 말에 당황한 아저씨가 사과했다.

허름한 것도 사실이었고, 애송이인 것도 맞으니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어쩐지 심윤성의 말투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던전 미아라니…. 크하하하!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하핫!”

호탕하게 웃은 심윤성은 한쪽에 놓여 있던 박스에서 술병을 두 개 가져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자! 손님도 왔는데 마시자!”

“제발…. 내일 B-3 구역까지 공략하기로 한 거 까먹었어?”

“포기해요, 대장. 어차피 윤성 아저씨는 술 안 마시면 못 자니까, 빨리 먹여서 재우라고.”

최민혁의 말에 심윤성이 표정을 구겼다.

“흥. 술이라도 안 마시면 네 녀석의 코골이를 참을 수가 없다고.”

“뭐라고요?! 저 코 안 골거든요?!”

“즈 크 은글그든으~.”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이 정말 헌터의 최전선이라고 불리는 13층이 맞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지금은 이렇게 부드러운 모습이지만, 분명 몬스터와 싸울 때는 누구보다 강하고 멋진 사람들일 것이다.

가만히 두 사람을 보고 있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아…. 혹시… 할 말 있으신가요?”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차윤지의 눈빛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 질문에도 그녀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보다시피 우리 팀이 조금 특이해. 그래도 다 좋은 녀석들이니까 너무 나쁘게 보진 말아 줘.”

“설마요. 지금도 충분히 멋지다고 생각해요. 팀 분위기가 부럽네요.”

나도 모르게 그들의 모습을 내가 속해 있던 팀과 겹쳐 보고 있었다.

나는 약해 빠진 E급 헌터에 쓸모도 없었지만, 우리 팀은 어느 곳보다 서로를 챙겨 주는 좋은 팀이었으니까.

석준이 녀석… C급 헌터 시험 본다고 했는데, 통과했으려나.

하성이 형 아이는 딸일까, 아들일까.

민웅이 형은 여전히 정찰팀에서 활동하고 있으려나.

…만약 이번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나를 다시 팀원으로 받아 줄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옆에 있던 차윤지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

그녀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혹시 초월 헌터?”

“…….”

그 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고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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