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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x9999-10화 (10/176)

10화 : 던전 생존기 (1)

“드디어 포기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군.”

일주일 만에 만난 리치왕은 나를 보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붉은색 피부가 삐쩍 말라 있어서 정확히 무슨 표정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싫은 표정이잖아.

“네가 죽을 때까진 포기할 생각 없거든. 라이프 룰렛.”

들어오자마자 바로 스킬을 사용하자 손에 활시위가 생겨났다.

보스룸 입구와 리치왕이 있는 곳은 제법 거리가 멀었는데, 그 점은 내게 썩 반갑지 않았다.

원거리에서 마법으로 공격하는 리치왕에 비해서 나는 공격 사거리가 짧았으니까.

활을 사용한다고 해도 사거리 안까지 들어가려면 어느 정도 거리를 좁혀야만 했다.

무엇보다 가까울수록 명중률이 올라가니 거리는 좁힐수록 좋다.

“저번에 한 번 공격이 성공했다고 무기를 바꾼 건가. 단순하군.”

“신경 꺼라.”

상체를 숙이고 빠르게 리치왕 쪽으로 이동하며 거리를 좁혔다.

이내 주변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걸 느끼자마자, 몸을 앞으로 굴렸다.

“……!”

조금만 망설였어도 이미 내 몸은 얼어붙었을 것이다.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이었고, 리치왕의 스킬 하나를 뺐다는 것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트드듯!

리치왕이 다음 스킬을 발동하기 전에 서둘러 활시위를 당겼다.

파앙-!

번쩍이는 화살은 활시위를 떠나 정확히 리치왕의 가슴에 명중했다.

[-315]

쳇…. 이번엔 낮은 숫자가 걸렸네.

사실 이 정도 수치만 유지해 줘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죽어라!”

스킬을 명중시킨 이상, 여한은 없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얼음 기둥들이 단숨에 나를 찢어발겼다.

내가 얼마나 끈질기고 더럽고, 추잡스러운 놈인지 똑똑히 보여 주마.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

리치왕과의 사투는 열흘이나 계속됐다.

라이프 룰렛의 쿨타임이 40분이라 한 번 전투하고 나면 40분을 기다렸다가 다시 지하로 입장해야만 했다.

그동안은 대부분 활 연습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만약 내가 리치왕이었다면 진작에 멘탈이 무너졌을 거다.”

“지금 리치왕 편드는 거냐?! 나도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네가 죽어 봤어?!”

내 말에 발렌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이제 리치왕의 체력은 200밖에 남지 않았으니 운이 좋으면 이번이 마지막 전투가 되겠지.

라이프 룰렛을 쓰고도 리치왕에게 명중시키지 못한 적도 있었고, 스킬을 쓰기도 전에 리치왕에게 죽은 적도 많았다.

덕분에 60번이나 라이프 룰렛을 썼고, 라이프는 거의 200개나 소모해야만 했다.

“사실 아직 실감이 안 나. 드디어 이 지옥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게…….”

“그러게. 난 여기서 만들어지고 평생을 여기서 살아왔으니 이곳 외에 다른 곳이 조금 무섭긴 해.”

발렌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만 없었으면 발렌은 이곳에서 문제없이 잘 살아갔을 테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발렌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인간의 말을 하는 오크가 이런 곳에서 혼자 외롭게 사는 것보다, 형씨 같은 친구 만나서 보람차게 사는 쪽이 훨씬 좋으니까.”

함께 지낸 시간이 길어진 덕분인지, 발렌은 이제 내 머릿속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다.

“좋아. 그럼 끝내러 가 보자.”

라이프 룰렛의 쿨타임이 돌아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걸 확인하고 지하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재 남아 있는 내 라이프는 611개.

처음 개수가 9999개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줄어든 숫자였다.

하지만 아직 이 정도면 충분하다.

‘라이프 흡수’ 패시브 스킬이 있으니 이곳을 나가면 안정적인 사냥터에서 천천히 라이프를 늘려 나가면 되니까.

지금은 리치왕을 쓰러뜨리고 공략 보상을 얻어서 나가는 게 최우선이다.

또각…. 또각…….

이젠 어두운 지하 계단도 성큼성큼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이곳에 익숙해졌다.

커다란 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가자 리치왕이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네놈은 대체 뭐냐! 어떻게 인간 따위가 죽지 않는 능력을 얻은 것이냐!”

“죽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죽어도 부활하는 능력이라고. 나도 기왕이면 죽지 않는 쪽이 더 좋은데 말이지.”

“마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화살을 쏘는 것도 네놈의 능력인가?”

라이프 룰렛을 말하나 보군.

확실히 라이프 룰렛은 마법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평범한 화살은 아니었다.

존재하지 않는 화살과 활을 만들어서 쏘는 게 마법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법이라고 하기엔 도박으로 대미지를 넣는 이상한 스킬이다.

“인제 와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닥쳐라! 감히…. 감히 나약한 인간 따위가 이 리치왕을……!”

분노 어린 리치왕의 목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이내 점점 모여든 바람은 폭풍을 이뤘고,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폭풍 사이사이로 날아다녔다.

“아무리 강한 마법으로 날 죽여 봐야 소용없어. 어차피 부활해서 널 죽이러 올 테니까.”

처음 봤을 때 여유 넘치던 리치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그저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추악한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촤아악!

얼음 조각들은 한꺼번에 나한테 날아와 온몸에 꽂혔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굳이 리치왕이 저런 대형 마법을 써 주는데 라이프 룰렛을 써서 부담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실패하면 쿨타임과 라이프를 날리는 것이니, 큰 마법의 쿨타임이 돌고 있을 때 죽이면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10분 뒤에 부활하자마자 곧장 다시 리치왕을 찾아갔다.

리치왕이랑도 계속 싸우다 보니 점점 마법의 패턴에 익숙해져서 단순한 마법들은 피하는 게 가능했다.

예를 들면 주변 공기와 함께 나를 얼리는 마법이나, 얼음 창과 송곳을 날리는 건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죽여라.”

리치왕은 날 발견하고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오직 날 죽이기 위해서만 싸웠고, 이성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수없이 많은 싸움에서도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리치왕은 지능이 있고, 생각이 가능했다.

내 능력을 모르는 리치왕의 입장에선 아무리 죽여도 나는 다시 살아난다고 알고 있으니 정신이 망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누군가 죽여도 죽여도 다시 자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다고 생각하면 공포 영화가 따로 없다.

“라이프 룰렛.”

손에 활을 들고 천천히 리치왕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트드듯.

그는 체념한 듯 계단에 걸터앉아서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있었다.

“재밌는 거 알려 줄까. 사실 난 부활하는 횟수가 정해져 있어서 그걸 다 쓰면 죽어.”

빙긋 미소를 지으며 활시위를 놓았고, 빛나는 화살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치왕의 머리에 꽂혔다.

“이 개……!”

그는 뭔가 소리를 지르다가 화살이 닿는 순간, 그대로 멈춰 버렸다.

[-200]

체력이 200밖에 남지 않았던 리치왕은 그대로 라이프 룰렛에 남은 체력을 잃었다.

조금 인성이 쓰레기 같긴 했지만, 이곳에서 2년 가까이 저 자식이 만든 데스나이트한테 쫓기면서 죽임을 당한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System : 네이비 스톤x1, 리치왕의 지팡이x1, 마력석x7, 빙결의 갑옷(상의)x1을 획득했습니다!]

[System : 새로운 스킬 ‘활 숙련’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 새로운 스킬 ‘검 숙련’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 새로운 스킬 ‘복습’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 사용할 수 있는 스킬 포인트가 있습니다!]

[System : 사용할 수 있는 스텟 포인트가 있습니다!]

후우…. 진짜 끝났다.

내가…. 나 혼자…! 이 지옥 같은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고!

“흐아아앗!”

“형씨…? 괜찮은 거 맞지? 혹시 정신 공격을 당한 건 아니지?”

“해냈다! 해냈다고! 으아앗!”

[System :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곧 게이트 밖으로 이동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위쪽에 커다란 전자시계가 나타났다.

[9:59]

10분 정도 여유가 있는 건가.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일단 지금 얻은 보상들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드디어 나도 라면을 맛볼 수 있는 건가?!”

“그럼 그럼! 라면이 문제일까! 더 맛있는 것도 잔뜩 먹여 줄 테니까.”

“오오! 벌써 기대되잖아!”

여기서 얻은 아이템만 팔아도 율의 병원비는 물론이고 집도 살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아이템부터 확인해 볼까.

인벤토리를 열자, 지금까지 얻은 아이템들이 보였다.

[오래된 녹슨 검x2, 차가운 심장x10, 블루 스톤x22, 네이비 스톤x1, 리치왕의 지팡이x1, 마력석x7, 빙결의 갑옷(상의)x1, 오렌지 스톤x8, 오크 가죽x5 오크 엑스x2]

16칸인 인벤토리가 반 이상 차 있는 걸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오래된 녹슨 검은 데스나이트와 싸울 때 몇 자루가 부러진 탓에 이제 2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번에 얻은 리치왕의 지팡이와 빙결의 갑옷에 먼저 눈이 갔다.

[리치왕의 지팡이

리치왕이 사용한 지팡이.

세계수의 뿌리로 몸체를 엮고, 여신의 눈물로 장식을 한 최고급 지팡이다.

마력+70 내구도 60/60]

[빙결의 갑옷(상의)

지옥의 냉기를 끌어모아서 가공한 갑옷.

착용 시 추위에 대한 내성이 생기며 얼음 속성 공격에 대한 피해가 줄어든다.

방어력+30 내구도 100/100]

설명만 읽어 보면 게임에서 최종 장비라고 해도 될 정도로 화려했다.

세계수? 여신의 눈물? 지옥의 냉기?

나랑 다른 세계에서 온 아이템들인가.

지팡이는 내가 쓰는 장비가 아니니까 팔면 될 거 같고, 갑옷은 써도 괜찮을지도.

어두운 푸른색이 감도는 갑옷은 묘하게 광이 나서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어디…. 한번 껴 볼까?”

무거운 갑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기에 쩔쩔매면서 겨우 갑옷을 착용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발렌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핫!”

“웃지 마라.”

상체에는 큼지막한 갑옷을 둘렀지만, 하체는 허전해서 기묘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민망해진 난 서둘러 갑옷을 벗어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System : 게이트가 사라지며 밖으로 이동됩니다.]

시스템창과 함께 발아래에 푸른색 마법진이 생겨났고, 내 몸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게 보였다.

드디어… 절대 나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이 무간지옥에서 나가는구나.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눈을 지그시 감았고, 몸이 가벼워지며 잠시 정신이 어지러웠다.

***

털썩.

다시 눈을 떴을 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러서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또옥…. 또옥…….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습한 공기, 그리고 게이트에선 겪어 보지 못한 추위가 나를 덮쳐 왔다.

“후우…. 뭐야, 여긴 어디지?”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커다란 동굴 안인 듯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시야가 보였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조심해! 여기 몬스터다!”

사람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손을 번쩍 들었고, 밝은 랜턴이 동굴 내부를 비췄다.

“아뇨! 사… 사람입니다!”

“뭐?!”

내 목소리에 황급히 다가온 중년의 남자는 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당신, 어떻게 여기 있는 겁니까?”

“네? 게이트를 공략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였습니다.”

“그럴 리가…. 여긴… 13층이라고!”

“……1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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