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헌터와 라이프 (3)
“뭔데? 무슨 일이야?”
“너… 뭔가 느껴지는 거 없어? 달라진 점이라던가.”
발렌은 도통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시스템창을 발렌에게 보여 줄 수 없는 게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발렌 Lv.23
체력 4100/4100 마나 50/50 기력 30/30
힘-38 민첩-16 지능-16]
이름을 지어주자 시스템이 동조되었다는 말과 함께 발렌의 레벨이 나와 같아졌다.
주인의 레벨을 따라가는 건가.
아무래도 체력과 마나를 제외한 다른 능력치는 주인인 내 능력치의 반절로 측정되는 모양이다.
“그 몽둥이로 나무를 쳐 봐!”
“뭐? 뜬금없이 그게 무슨…….”
“빨리!”
발렌은 표정을 잔뜩 찌푸리곤 옆에 있는 나무로 걸어갔다.
툴툴거리던 것과 달리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있는 힘껏 몽둥이를 휘둘렀다.
파악!
“……!”
“허억!”
몽둥이가 나무를 후려치자마자 나무가 아작나며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렇군.
시스템 동조가 되기 전에 오크의 능력치는 모두 ‘5’였다.
원래 오크의 힘도 인간과 비교하면 월등히 강한 수준인데, 그 7배가 됐으니 무시무시한 괴력을 갖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즉, 능력치는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내 힘이 76이지만, 실제로 힘을 맞대보면 발렌의 힘이 더 강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나랑 오크 외엔 이 시스템으로 능력치를 확인할 일은 없을 테니 크게 상관없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발렌은 쓰러진 나무와 나를 번갈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서 놀랐으니 발렌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곧 그에게 펫 동조 시스템에 대해 말해 줬고, 그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초월 능력이라는 건 정말 신기하군. 형씨 덕분에 나도 강해질 수 있다니.”
“뭐, 발렌 덕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이름처럼 날 지켜 주려면 이 정도는 강해야지.”
고개를 끄덕거리는 날 보고 그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내가 형씨를 지키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랬으면 좋겠군.”
나 역시 그런 날이 정말로 오길 바란다.
발렌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내 등을 맡길 수 있으니까.
“좋아! 결정했어. 지금부터 남은 몬스터를 처리하고 보스 몬스터랑 싸운다!”
이 지옥에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맨손으로 나갈 순 없지.
반드시 보스 몬스터까지 잡고 공략 보상까지 챙겨서 나간다!
“…좋아. 그럼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내 말을 들은 발렌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남아 있는 몬스터가 발렌과 같은 오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딱히 다른 오크와 어울리지 않았던 발렌이었고, 오크들은 내가 데스나이트의 먹잇감이라고 생각했는지 접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동족이 내 손에 죽는 걸 보고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알았어. 다녀올게.”
오크들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를 모두 쓰러뜨리고 나자 오크들은 슬슬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으니까.
멀리서 보이는 오크 세 마리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오크랑 싸우는 건 처음이네.”
항상 적이 덤비는 걸 기다렸기에 먼저 몬스터를 기습하는 게 기분이 묘했다.
오크들은 내 적의를 느꼈는지 바로 도끼를 꺼내서 자세를 잡았다.
오크는 ‘오렌지 라벨’의 몬스터로 D급 헌터 이상이라면 그다지 어렵게 사냥이 가능한 몬스터였다.
“쿠에엑!”
당연히 말을 하지 못하는 오크는 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커다란 도끼를 휘둘렀다.
카앙-!
“……!”
검을 들어서 오크가 휘두른 도끼를 튕겨 내며 한 걸음 물러났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약하고, 느렸기에 굳이 막을 가치도 없어 보였다.
무기 내구도가 아까울 지경이네.
뒤쪽에서 다른 오크가 깊게 파고들며 달려들었고,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오크의 가슴 가운데에 검을 찔러 넣었다.
[-612]
오크의 체력은 453이었기에 일격으로 오크의 숨통이 끊어졌다.
지금까지 데스나이트랑만 싸워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정말 많이 강해진 것인지 모르겠다.
다른 두 마리의 오크를 쓰러뜨리는 데에도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System : 오렌지 스톤x4, 오크 가죽x2 오크 엑스x1을 획득하셨습니다!]
오크랑 싸우는 동안 계속 발렌이 떠올라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다른 오크들을 찾아서 쓰러뜨리는 것도 순식간에 끝날 정도로 쉬웠다.
처음 이곳에 정찰 팀으로 왔을 때 봤던 ‘오크 궁사’와 ‘오크 주술사’도 너무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예전에 헌터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면 한 마리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을 테지.
“이제 끝인가.”
쿠우우웅-!
발렌은 이제 몬스터가 아니라 내 펫으로 인식되어서인지, 마지막 오크를 쓰러뜨리고 나자 땅이 흔들렸다.
“무… 무슨 일이야!”
“보스 몬스터가 나오는 거 같아. 넌 들어가 있는 게 좋겠어.”
허겁지겁 뛰어온 발렌은 내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딱히 조작 없이도 내가 발렌을 집어넣고 싶다고 생각하자 발렌이 푸른빛과 함께 사라졌다.
자, 얼마나 괴물 같은 놈이 나오는지 확인해 볼까.
긴장감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걸 느꼈다.
쿠구궁!
바로 앞의 바닥이 갈라지더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지하는 싫다고.
잔뜩 표정을 일그러뜨린 나는 어쩔 수 없이 계단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지하로 내려갈수록 점점 어두워져서 발을 내딛기 힘들었다.
여기서 어떤 놈이 등장하는지에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
남아 있는 923개의 라이프로 보스를 쓰러뜨리고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 아니면 여기까지가 한계였던 것인지.
“빛?”
어느 정도 내려오다 보니 계단이 아닌 커다란 문이 보였고, 문틈 사이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찰팀으로만 활동했었지만, 게이트 공략에 대한 지식은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게이트 보스를 직접 만나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제발 약한 놈이 나오게 해 주세요.
누군지 모를 신에게 기도를 드린 뒤,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끼이익-
나보다 2배 커다란 문은 생긴 거랑 달리 쉽게 밀렸고, 희미하던 빛이 점점 내 눈을 적셨다.
“호오…. 인간이 혼자서 내 소중한 인형들을 망가뜨린 건가.”
“……!”
보스 몬스터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인상이 구겨졌다.
리치왕.
최근에 헌터 협회 몬스터 목록에 새로 갱신된 몬스터 중 하나였다.
미라처럼 뼈에 살가죽만 붙어 있는 것 같은 외모였다.
붉은색 피부에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그는, 날 보고 씨익 음흉한 웃음을 머금었다.
기왕이면 데스나이트와 같은 블루 라벨 몬스터가 나오길 바랐는데, 리치왕은 그다음 단계인 ‘네이비 라벨’이었다.
“흥미롭군. 대체 어떻게 죽어도 계속 살아날 수 있는 거지?”
“…남을 엿보는 취미라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분이 그러면 안 되지.”
리치왕은 날 가만히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한 인간이군. 내게 그 힘을 어떻게 얻었는지 알려 준다면, 나도 네게 늙지 않는 법을 알려 주지. 서로에게 좋은 거래 아닌가?”
“정말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지만, 안타깝게도 나도 어떻게 이 능력을 얻었는지 모르거든.”
“…그렇다면 살려둘 가치가 없군.”
오싹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리치왕은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를 내게 겨누었다.
새로 갱신된 몬스터인 리치왕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결국, 몸으로 부딪쳐서 정보를 얻어 내는 수밖에.
파악!
“……?!”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바닥에서 솟아오른 큼지막한 얼음송곳이 나를 관통해 있었다.
“커… 헉……!”
분명 차디찬 얼음송곳인데도 뚫려 있는 내 가슴팍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젠장.
오크 주술사가 던지던 불덩이랑은 차원이 다르잖아.
부활한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마력계 헌터들이 마법을 쓰는 걸 본 적 있지만, 이런 식으로 직접 맞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보통 사람에게 마법이라는 건 상당히 생소한 능력이니까.
“형씨! 괜찮아?!”
“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렌의 목소리에 급히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어떻게 한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여기 안에서도 형씨한테 말을 걸 수 있는 거 같아.”
“그렇구나. 뭐, 괜찮진 않지만… 인제 와서 징징댈 순 없지.”
내게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치왕을 돌파하고 이곳을 나가든지, 아니면 여기서 생을 마감하든지 둘 중 하나니까.
데스나이트보다 상위 라벨인 리치왕의 공격은 당연히 나를 일격에 죽이는 게 가능했다.
문제는 데스나이트처럼 이성이 없는 인형도 아니고, 마법이 어떻게 나를 노릴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바닥에 있는 돌을 주워서 지하 계단 입구 벽 쪽에 글자를 적었다.
기익- 기이익-
긴 전투가 될 테니 최대한 정보를 기록해 둬야 한다.
일단 정보가 너무 적다는 게 심각한 문제군.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 바로 가는 거야?!”
다시 지하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는 날 보고 발렌이 당황하며 물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똑같은 죽음을 반복하려고 하니 이상하게 보는 게 당연하다.
“놈이 어떤 마법을 쓰는지, 마법은 얼마나 자주, 많이 쓸 수 있는지, 내 공격이 들어가면 얼마나 대미지를 입힐 수 있는지… 모든 정보가 필요해. 그걸 알기 위해선 직접 가서 경험하는 수밖에 없어.”
네이비 라벨에 보스 몬스터라 아마 체력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놈에게 대미지를 입힐 수 있다고 해도 라이프의 수가 부족할지도 모른다.
끼이익-!
씁쓸하지만, 이제 죽는 건 어느 정도 적응했거든.
“…절대적인 힘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 건가?”
리치왕은 나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건 데스나이트랑 싸울 때부터 충분히 느끼고 있었거든.”
이번엔 내가 먼저 움직여서 리치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악!
바닥을 박차고 리치왕을 향해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면서 눈은 주변을 훑어봤다.
주변 지형은 완전한 평지, 바닥은 돌로 만든 사각의 타일로 이루어져 있다.
벽이 있는 룸의 형태였지만, 상당히 넓어서 공간의 제약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다.
리치왕이 있는 곳은 계단 5개 정도로 만든 낮은 단상이었다.
따악-
리치왕이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그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차가운 공기가 내 주변을 차가운 공기가 휘감았다.
“읍……!”
숨을 들이마시자 냉기가 단숨에 내 온몸을 집어삼키며 몸의 끝부분부터 얼어붙었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처음 갔을 땐 손가락을 튕기는 행동은 없었다.
지팡이로 나를 겨누자마자 마법이 발동되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마법마다 다른 행동을 취해야 사용할 수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아무런 모션도 필요하지 않은데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속셈인지도 모른다.
역시 계속 덤비면서 관찰하는 수밖에 없겠군.
“정말 저 괴물을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없다고 해도 별수 없지. 놈을 죽이는 것만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지금 생각해야 할 건 정말 놈을 죽일 수 있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놈을 죽일 수 있느냐다.
아까처럼 다시 벽에 글자를 적었다.
‘손가락 튕기기, 공기 빙결.’
이 정도만 적어 둬도 충분하다.
그리고 바로 다시 리치왕을 향해 달려갔다.
“인간은 학습 능력이 뛰어난 동물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틀렸나 보군.”
“그 학습 능력을 쌓기 위해서 여기 온 거다.”
리치왕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개수는 한정적일 것이다.
지금부터 그 마법들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관찰하면서 어떤 마법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몇천 번을 와도 결과는 같다.”
“……!”
타앙!
리치왕이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자, 어느새 내 머리 위에 만들어진 얼음송곳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파바바박!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