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헌터와 라이프 (1)
[오래된 녹슨 검
데스나이트가 사용하는 검.
크고 무거워서 평범한 사람은 드는 것도 버겁다.
생긴 것과 다르게 검날이 예리하게 다듬어져 있다.
공격력+30 내구도 10/17]
처음에 사용했던 보급형 마력 검이 공격력을 겨우 2만큼 올려줬는데, 30이라는 수치에 입이 쩍 벌어지는 건 당연했다.
아버지가 내게 물려줬던 ‘에렌 셀’이 어느 정도 수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마력 검보다 15배나 높은 수치인 것은 확실했다.
오래된 녹슨 검이라는 설정에 충실한 것인지 내구도가 반절 정도 깎여 있는 걸 보고 표정을 찌푸렸다.
“…굳이 이런 것까지 철저하게 할 필요는 없는데.”
내구도가 30이었던 보급형 마력 검이 금방 망가졌던 걸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렸다.
공격력이라는 수치가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내 예상일 뿐이지만, 능력치에 비례해서 장비의 공격력이 다른 성능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즉, 능력치가 높을수록 장비의 힘을 더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구도가 낮으니 일단은 아껴 둘까.
마지막으로 ‘차가운 심장’으로 눈을 돌렸다.
[차가운 심장
이미 죽어 버린 기사인 데스나이트의 심장.
만지면 동상에 걸릴 것처럼 차갑다.
내구도 15/15]
뭐야, 장비도 아닌데 내구도는 왜 있는 거야?
설마 내 심장에 대신 끼우라는 건… 역시 아니겠지?
잠시 고민을 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심장의 사용법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언젠간 이것도 쓸모가 있겠지.
공짜 아이템은 마다하지 않는 편이었다.
“다시 일을 시작해 볼까.”
역시 아무리 망가져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몽둥이가 최고지.
파란색과 붉은색으로 물든 갑옷을 입고 있는 데스나이트가 저벅저벅 걸어오는 게 보였다.
[7138/7189]
민첩이 오른 덕분에 전보다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해졌다.
호흡에도 여유가 있고, 운이 좋으면 3번째 공격도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선 첫 번째 공격처럼 데스나이트의 다른 공격 패턴도 공략을 찾는 수밖에.
터엉!
바닥을 박차고 달려오는 데스나이트를 보고 숨을 들이마셨다.
할 수 있어!
***
첫 번째 데스나이트를 쓰러뜨린 뒤, 특별히 새로운 일은 없었다.
눈을 뜨면 데스나이트와 싸우고, 죽고, 싸우고, 죽고, 싸우고 죽는 게 일과였다.
죽음이라는 것에도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했는지, 부활했을 때 머리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도 점차 옅어졌다.
물론 여전히 죽는 것도, 죽기 직전에 느끼는 통증도 두렵지만.
“이제 겨우 3마리인가.”
“그러게.”
묘한 기분에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이 게이트에 남아 있는 데스나이트의 숫자는 오크가 말한 것처럼 이제 3마리뿐이었다.
처음 데스나이트를 잡은 이후로 다시 200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나는 14마리의 데스나이트를 쓰러뜨렸다.
[최현 Lv.22
체력: 2250/2250 마나: 220/220 기력: 30/30
힘: 73 민첩: 31 지능: 31
(사용 가능 포인트: 0)
라이프 : 1108개]
7레벨이 더 올라서 지금은 22레벨이 됐다.
아무래도 레벨업을 할 때마다 필요한 경험치가 상당히 많이 늘어나는 모양이다.
물론 지금까지 내가 잡은 데스나이트 수는 14마리밖에 되지 않았으니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만큼 라이프를 많이 소모하긴 했지만, 이젠 전투도 익숙해진 덕분에 라이프 하나로 전보다 많은 대미지를 입히는 게 가능했다.
이곳에 들어와서 거의 8천 번이나 죽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났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오크의 질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여기 있었던 500여 일 동안 오크는 내 친구이자, 가족 같은 존재였다.
같이 밥을 먹고, 농담도 하고, 함께 잠도 자는 그런 친구.
이젠 오크를 두고 여기서 나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괜찮아, 형씨. 애초에 나는 몬스터고 형씨는 헌터잖아. 어차피 내 수명은 그렇게 길지 않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손으로 널 죽이라고? 말도 안 되는…….”
“그럼 평생 여기서 살 거야?!”
그의 말에 나는 대꾸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에 있는 모든 몬스터를 쓰러뜨리면 보스 몬스터가 출현하고, 보스 몬스터까지 쓰러뜨려야 게이트 공략이 끝난다.
일반적인 게이트였다면 공략을 포기해서라도 오크를 데리고 출구로 나갔겠지만, 출구도 막힌 탓에 그럴 수 없었다.
“아무튼, 그런 말은 하지 마.”
“형씨도 참 고리타분한 사람이구만.”
능력치가 제법 올라서 이제 100개 정도의 라이프로 데스나이트 하나를 잡을 수 있게 됐다.
지금 라이프가 1100개 정도 남았으니까, 3마리를 잡고 나면 800개.
아마 다른 오크들은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 문제는 보스다.
게이트에 있는 보스는 그곳의 몬스터들보다 높은 수준의 몬스터다.
그렇기에 남은 800개의 라이프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무엇보다 웬만하면 라이프를 최대한 아끼고 싶기에 여전히 고민 중이다.
“잘해 봐야 한 달인가.”
“어쩌면 그것보다 금방 끝날지도 모르지.”
게이트에 들어온 지 512일.
끔찍하게 긴 시간이었고, 끔찍한 일들뿐이었다.
몇 번이나 정신이 무너지고 망가져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다.
남은 몬스터를 모두 쓰러뜨리고, 보스를 잡게 되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그때부터 내 헌터 인생 2막이 시작되는 거다.
“좋아! 내일은 그럼 아껴 뒀던 것들을 써 볼까!”
“뭐?! 그거 나가서 팔겠다며.”
“라이프 하나라도 더 아끼고 싶다고. 그리고 이 지옥에서 하루라도 빨리 나가고 싶기도 하고.”
내 말에 오크는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래된 녹슨 검]
정확한 가격은 모르지만, 이렇게 뛰어난 능력치라면 내구도가 낮아도 제법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것이다.
데스나이트를 쓰러뜨리면 낮은 확률로 나오는 아이템이라 지금 내가 가진 건 겨우 5개뿐이다.
아껴 뒀다가 나가서 팔 생각이었지만, 역시 라이프를 아끼는 게 더 이득인 것 같단 말이지.
“나 먼저 잔다.”
“잘자!”
아이템창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날 보고 오크가 자리에 누웠다.
보통 이런 경우에 금방 끝나지 않는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스킬은 찍지 않았는데… 슬슬 포인트를 써 볼까.
[Active - 라이프 룰렛 Lv.1
남아 있는 라이프의 개수 중 랜덤 수치만큼 적에게 대미지를 준다.
라이프 10개를 소모한다.
능력치에 비례하여 높은 대미지를 입힐 수 있다.
마나-50 쿨타임-1시간]
20레벨을 찍고 새로 얻은 스킬이다.
몇 번 써 보긴 했는데, 흔히 말하는 ‘운빨’ 스킬이라 엄청 좋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내 라이프가 1100개 정도니까 1~1100에서 랜덤 대미지를 상대에게 입힐 수 있다는 의미다.
지금 내가 정면으로 데스나이트와 싸우면 1개의 라이프로 70~80만큼 타격을 입히는 게 가능하다.
즉, 10개의 라이프를 소모하면 평균적으로 700~800의 대미지를 입힐 수 있다는 말인데, 평균 대미지가 550인 저 스킬에 기대는 건 효율이 좋지 않았다.
만약 처음처럼 내 라이프가 9999개였다면 엄청난 스킬이겠지만, 지금 내겐 그다지 메리트가 없었다.
굳이 꼽자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정도?
과거의 나였다면 망설이지 않고 이 스킬을 계속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얼마 후에 이곳에서 나간다고 생각하니 라이프 하나하나가 아까워서 죽을 지경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라이프를 갖고 이곳을 클리어하고 나가는 게 내 목표였다.
***
스르릉.
날이 밝자마자 인벤토리에서 ‘오래된 녹슨 검’을 꺼내 장착했다.
원래 사용하던 나무 몽둥이랑 비교하면 제법 무거웠지만, 힘을 많이 찍은 탓에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어디 시험해 볼까.”
철컥…. 철컥…….
여느 때처럼 나를 향해 걸어오는 데스나이트를 보고 여유롭게 검을 어깨에 걸쳤다.
“이제 그 낯짝도 정들 지경이네. 자, 오늘도 힘차게 죽어 보자고.”
놈을 향해 검 끝을 겨누는 것과 동시에 데스나이트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악!
가볍게 몸을 옆으로 굴려서 뻔한 공격을 피한 뒤, 묵직한 검을 휘둘렀다.
부웅-!
[-86]
뭐……?!
일격에 86?!
데스나이트 머리 위에 떠오른 대미지를 보고 깜짝 놀라 뒤로 거리를 벌렸다.
나무 몽둥이로 싸웠을 땐 정확하게 급소를 공격하면 대략 40~50 정도 대미지를 입힐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그보다 2배 가까운 수치의 대미지를 봤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게 템빨이라는 건가.”
헛웃음을 지은 나는 바로 이어지는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보고 자세를 잡았다.
내 체력은 이제 2250까지 늘어난 상태다.
주먹이나 발차기 같은 타격에는 한 번 버틸 수 있어도 데스나이트의 검에 맞으면 여전히 일격에 목숨을 잃었다.
아직은 회피뿐인가.
쐐액!
데스나이트의 검이 찌르고 들어왔고 몸을 굴려 피했다.
다시 자세를 잡기도 전에 데스나이트의 주먹이 날아왔다.
터엉-!
피할 여유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검을 들어 올렸고, 검의 옆면으로 주먹을 막아 버렸다.
“뭐야……!”
나무 몽둥이였다면 부서졌겠지만, 검은 데스나이트의 주먹을 튕겨낼 수 있었다.
이거 설마……!
카앙-!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데스나이트의 검과 맞대도 망가지지 않았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데스나이트와 검을 부딪쳤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막았다기보단 흘려보낸 느낌이었다.
어쨌든 회피 외에도 적의 공격에 대처할 만한 방법이 있다는 건 희소식이었다.
[-88]
공격을 흘려내고 데스나이트가 자세를 바로잡기 전에 서둘러 놈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여전히 베어 버린다거나 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공격이 들어가면 잠깐 놈의 몸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쳇, 벌써 온 건가.”
뒤쪽으로 다른 데스나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레벨이 올라 길게 싸울수록 다른 데스나이트가 전투에 개입하는 일이 잦아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다지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먼저 싸우고 있던 데스나이트가 다시 내게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뒤쪽에 있던 데스나이트도 단숨에 거리를 좁혀 왔다.
어차피 두 마리를 상대하는 건 절대 불가능.
그렇다면 차라리 확실한 쪽을 선택하는 수밖에.
거리를 벌리며 나중에 나타난 데스나이트 쪽으로 크게 돌아서 놈이 나를 먼저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쌔-엥!
뒤쪽부터 크게 휘두른 검은 뻔한 궤도를 그렸다.
원래 싸우고 있던 놈은 다음 공격을 예상하기 어려우니, 확실한 쪽을 고르는 게 당연했다.
처음엔 한 마리의 데스나이트를 쓰러뜨리고 강해지는 게 최우선 목표였지만, 이제는 어떻게든 데스나이트들에게 많은 대미지를 넣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파악!
[-77]
대미지 수치를 보는 것과 동시에 데스나이트의 검이 내 상체와 하체를 두 동강 냈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