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배신과 감금 (2)
“저…. 저거 혹시…! 데스나이트 아니야?!”
석준의 말에 순간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만 들려왔다.
“에이…. 설마, 이번에 12층에서 발견된 몬스터잖아? 2층 게이트에서 12층 몬스터가 나온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공략팀의 헌터 중 한 사람이 애써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몬스터 무리가 다가올수록 자신이 알고 있는 데스나이트의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일단 튀어!”
민웅의 외침과 함께 모여 있던 헌터들이 다급하게 게이트 출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들 본능적으로 이 상황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도,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쌔엥- 촤악!
앞쪽에서 달리고 있던 민웅의 얼굴에 붉은 피가 잔뜩 튀었고, 멍한 표정의 그가 자신의 얼굴에 묻은 액체를 손으로 닦아냈다.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떨리는 손으로 닦아낸 민웅의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뭐… 뭐야…….”
꿀꺽.
마른침을 삼켜낸 그는 바로 옆에서 달리고 있던 공략팀 중 한 사람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으아아악!”
“아…. 앞에도 있다! 진짜 데스나이트야!”
“흐…. 흩어져!”
앞에서 튀어나온 데스나이트는 고작 한 마리였지만, 그 위압감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왜 2층 게이트에서 12층에서나 나오는 몬스터가 출현했는지 따지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지금은 오직 출구를 향해 도망치는 게 전부였으니까.
사방으로 흩어진 헌터들은 데스나이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 있지 않은 걸 확인하고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멀리서 쫓아오는 데스나이트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앞에 있는 한 마리의 시선만 누군가 끌어준다면 나머지 헌터들은 모두 출구로 나갈 수 있다.
타다닷!
다른 헌터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리던 현은 멀리 보이는 출구를 발견했다.
흩어진 다른 헌터들은 주변에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을 걱정할 틈이 없었다.
게이트 밖으로 나가면 쫓아오진 못하니까 출구까지만 가면 살 수 있다.
푸욱!
“……?!”
출구 앞까지 달려오던 현은, 차가운 검날이 등을 뚫고 튀어나온 게 눈에 보였다.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등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서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어 버렸다.
바닥에 쓰러져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는 사이에 누군가의 신발이 보였다.
몬스터가… 아니야?
그리고 이내 희미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사고였다고. 그치?”
스윽-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현의 검을 들고 아무렇지 않게 출구 쪽으로 멀어져 갔다.
***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오크는 내 눈치를 살피며 멋쩍게 모닥불을 땔감으로 쑤시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초월 헌터가 되어 있었고, 데스나이트들이 미친 듯이 쫓아오더라.”
“흐음…. 누군지 짐작 가는 사람은 없고?”
“잘 모르겠어. 죽기 직전에 들은 말이라 희미했거든.”
처음엔 절대로 우리 팀 사람들이 나를 배신했을 리 없다고 되뇌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둬야만 범인을 찾을 수 있다.
“그 자식한테 복수하기 전엔 여기서 절대 못 죽어. 반드시 나가서 복수한다.”
“…인간이란 무섭구나.”
동감이다.
설마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가 아닌, 사람에게 죽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복수심 덕분에 이를 박박 갈면서 이 지옥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물론 찔리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여기에 없었겠지만.
“내일은 일단 데스나이트 숫자를 좀 세어 봐야겠어.”
“퍼렁 열매는 많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오크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 자리에 누웠다.
퍼렁 열매로 마킹하면서 하나씩 숫자를 세면 이곳에 있는 데스나이트가 몇 마리인지 알 수 있겠지.
그리고 새로 얻은 능력치를 써 볼 필요도 있다.
일단 지금은 어떻게든 살아서 나갈 궁리만 해야 한다.
그것만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
이 게이트 안에 있는 데스나이트의 숫자는 17마리.
많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퍼렁 열매로 세어 본 덕분에 파란색 표식이 되어 있지 않은 데스나이트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단은 도망치면서 숫자를 세느라 레벨업 후에 데스나이트랑 제대로 싸워 보지 못했다.
전엔 금방 데스나이트에게 따라잡혔는데 오늘은 한참을 도망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민첩이 오른 덕분에 움직임이 빨라진 것 같다.
“후우우.”
숨을 천천히 내뱉고 정면에 보이는 데스나이트를 향해 ‘뻘건 열매’를 던졌다.
촤악!
그는 자신의 갑옷을 더럽힌 붉은 과즙에 전혀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내게 걸어왔다.
“다음 목표는 너다.”
나무 몽둥이를 꽉 움켜쥐며 침을 꿀꺽 삼켜냈다.
이번에 오른 능력치의 효율에 따라 내가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이젠 너무 많이 반복한 탓에 데스나이트의 첫 공격은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부웅-!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데스나이트의 첫 번째 공격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어…?!”
[-15]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몸이 빠르게 반응했고, 덕분에 데스나이트의 안면을 정통으로 후려칠 수 있었다.
거기다 예상했던 대미지보다 높은 수치가 나와서 연속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몸의 변화에 반응하기도 전에 다시 데스나이트의 검이 나를 노리고 들어왔다.
쌔엥-!
“……!”
깜짝 놀라서 몸을 옆으로 틀었고, 며칠 전만 했어도 반으로 갈라졌어야 할 내 몸은 멀쩡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정확히 반응하고 있다.
빡!
[-10]
다시 자세를 바로잡는 속도도 빨랐고, 덕분에 놈의 다리에 한 번 더 공격을 먹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데스나이트의 발이 거칠게 내 가슴을 후려 찼다.
바닥을 한참이나 구르면서도 내가 이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인상을 찌푸렸다.
“커헉……!”
숨을 쉴 수 없을 듯한 강렬한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내 체력바로 시선을 돌렸다.
[50/1550]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체력을 보며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한 방에 죽지 않은 건가.
진짜 게임이라면 숫자의 계산만으로 손익을 따졌겠지만, 지금은 무조건 이득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통증 때문에 몽둥이를 휘두르기는커녕 제대로 서는 것조차 버거웠다.
숨조차 마음대로 쉬지 못하는 상태에서 꾸역꾸역 팔을 들어 몽둥이를 휘둘렀다.
쌔엥-! 퍽!
데스나이트의 검이 내 목을 베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내 몽둥이도 놈의 어깨를 때렸다.
[-4]
나이스.
목이 베어진 상태로 할 말은 아니지만, 내 기대 이상의 효율이었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라이프 하나로 무려 29의 대미지를 입혔다.
운이 좋았다고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평균 20의 대미지를 입힐 수 있다고 가정하면 1마리를 잡을 때 360개 정도의 라이프만 소모하면 된다.
6천 개 가까이 소모했던 저번 전투를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한 효율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다른 데스나이트에게 죽는다거나, 여러 마리가 한 번에 덤벼서 대미지를 아예 넣지 못한 경우도 태반이었다.
그리고 과거에는 전투 숙련도가 낮았던 것 역시 라이프 소모가 컸던 이유 중 하나였다.
어쨌든 효율이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20마리 가까이 되는 데스나이트를 모두 죽이기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레벨업을 해서 얻은 28개의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데스나이트를 잡을 때마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오! 형씨, 어때? 좀 강해진 거 같아?”
“좀이 아니라고. 훨씬 강해졌어.”
씨익 미소를 짓는 나를 보고 오크도 히죽 웃음을 머금었다.
“그게 정말이야?! 오늘은 고기 파티 해야겠구만?! 힘내라고!”
처음엔 막막하기만 했던 이야기가 이젠 끝이라는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른 생각이겠지만, 게이트를 클리어하려면 게이트에 있는 모든 몬스터를 쓰러뜨려야만 한다.
그리고 거기엔 오크도 포함된다.
그건 내게 어려운 문제였다.
이런 말을 하는 건 헌터로서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그는 내가 지금까지 사귀었던 친구 중 가장 솔직하게 나를 대해 줬다.
어떻게든 저 녀석을 데리고 나갈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일단은 싸움에 집중해 볼까!”
아까 싸웠던 데스나이트 쪽으로 이동하며 능력치창을 열었다.
[최현 Lv.15
체력: 1550/1550 마나: 150/150 기력: 30/30
힘: 24 민첩: 24 지능: 24
(사용 가능 포인트: 28)
라이프 : 4415개]
일단 힘을 올려서 대미지를 높이는 게 가장 이상적으로 보인다.
민첩을 올려서 좀 더 빨리 반응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쪽은 변수가 크다.
포인트를 모두 힘에 찍으니 ‘52’까지 올라갔다.
수치만 놓고 보면 어제보다 무려 5배나 강해진 게 된다.
그럼 어디 실험해 볼까.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근처에 와 있던 데스나이트가 내게 단숨에 도약했다.
파악!
이젠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반복적인 놈의 공격을 옆으로 가볍게 피했다.
바닥에 꽂힌 데스나이트의 검이 다시 나를 노리기 전에, 내가 먼저 데스나이트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쳤다.
빠악-!
[-22]
“오…!”
아까보다 무려 1.5배나 높은 수치였다.
역시 자세나 힘, 그리고 타격 부위에 따라서 대미지는 항상 달라지는 건가.
머릿속으로 대미지를 계산하고 있던 차에 등 뒤에서 묵직한 힘이 나를 짓눌렀다.
어느새 뒤에서 다른 데스나이트가 검을 쑤셔 넣고 있었다.
“커… 억!”
젠장…. 어느 틈에…….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마리가 덤비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편이다.
표시를 남겨둔 놈을 찾다가 다른 녀석에게 죽는 일도 자주 있었고…….
그런 건 운이라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저 놈을 만나서 싸울 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지.
아릿한 통증과 함께 라이프 1개를 소모해서 부활한 나는, 잠시 자리에 앉아 숨을 돌렸다.
“…스킬 포인트는 일단 둘까.”
유일한 액티브 스킬인 ‘라이프 파워’를 써 보고 싶긴 했지만, 10개의 라이프를 소모해서 1.5배의 능력치를 얻는 건 지금 상황에서 썩 효율적이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효율을 따지지 않았는데… 목숨이 걸리니 나도 모르게 계산적인 사람이 되는군.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오크와 대화를 하다가 잠들어서 획득한 아이템을 확인하지 못했다.
가방 모양이 그려진 인벤토리를 열자, 푸른색의 보석 2개와 같은 색의 심장, 그리고 데스나이트가 들고 다니던 검과 같은 검이 보였다.
[블루스톤
블루 라벨의 몬스터를 사냥해서 얻은 보석.
강력한 에너지를 내뿜고 있다.
헌터의 장비를 제작하거나, 강화할 때 쓰인다.
비싼 값에 거래된다.]
몬스터를 사냥하면 몬스터의 등급과 같은 색의 보석이 나온다.
보통 1개나 2개 중 랜덤으로 드랍되는데 운이 좋았군.
블루스톤을 보고 있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몬스터의 등급은 빨주노초파남보 순으로, 뒤쪽에 있는 색일수록 강한 몬스터를 의미한다.
즉, 블루라벨의 몬스터는 굉장히 상위 몬스터였고, 당연히 그 보석의 가치도 높다.
밖에서 팔면 개당 500만 원은 받을 수 있을 정도니까.
만약 여기 있는 놈들을 다 잡고 나간다면…….
“후…. 후후…. 후후후후!”
부자….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이내 데스나이트의 검과 같은 모양의 ‘오래된 녹슨 검’이라는 아이템으로 시선을 옮겼다.
몬스터를 사냥하면 몬스터의 특징적인 아이템이 나오기에 데스나이트는 자신의 검을 드랍하는 것 같다.
어디 보자…….
[오래된 녹슨 검
데스나이트가 사용하는 검.
크고 무거워서 평범한 사람은 드는 것도 버겁다.
생긴 것과 다르게 검날이 예리하게 다듬어져 있다.
공격력+30 내구도 10/17]
잠깐! 고…. ‘공격력+30’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