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5
315. 진짜 다 끝났다 (2)
20분쯤 뒤에 연결된 화상회의에는 우즈만과 마타르가 함께 등장했다.
[천 회장님에게 신의 능력이 더해진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거대자본의 탐욕을 막아준 덕분에 나와 우즈만 왕세자는 우리 세계의 개혁을 좀 더 앞당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마타르가 동의를 구하는 투로 우즈만을 보았다.
[우리가 투자한 240조 원은 원금만 상환받겠습니다. 우리의 보상은 거대자본을 막아낸 것과 블루크루드의 지분으로 충분합니다.]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우즈만 왕세자.”
[투자금을 모두 소진하더라도 유대 자본의 탐욕만 막을 수 있다면 사실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원금을 돌려받는 것조차 기쁨, 그 자체입니다.]
만족에 겨워 의견을 전하던 우즈만이 넉넉한 미소와 함께 뜸을 들였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중국이 충분한 달러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굳이 미국 국채를 받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중동 특유의 복장을 한, 두 사람이 궁금한 눈으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 자본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그들이 또다시 탐욕을 부린다면 다음의 목표는 미국이 될 거라는 제 나름의 경고였습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우즈만과 마타르의 통쾌한 웃음이 화면 아래의 스피커를 통해 요란스럽게 쏟아져 나왔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짐작했었습니다! 천 회장님이 굳이 달러를 욕심내지 않은 배경에는 탐욕스러운 거대자본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예상했었습니다!]
설명을 덧붙이는 우즈만과 마타르는 만난 이후 처음으로 행복한 느낌마저 전하고 있었다.
[언제 천 회장님을 만나 식사할 수 있을까요?]
“아직 숙제가 하나 남았습니다.”
통역에게 말을 전해 들은 두 사람이 궁금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거대자본의 앞에서 진광효를 꼬드긴 두 사람을 해결한 뒤에 찾아뵙겠습니다.”
예상은 했었으나 설마 그 정도까지 나설까 하는 의문도 함께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나직하게 끄덕이는 우즈만의 표정을 보며 짐작한 내용이었다.
[천 회장님을 만날 날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신의 가호가 천 회장님께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우즈만이 부드럽게 미소 지은 뒤에 화면이 꺼졌다.
천중명은 화상회의의 여운을 즐기듯이 차를 마셨다.
**
아카시아 이파리를 하나씩 뜯어내며 ‘온다. 안 온다.’를 추측하는 심정으로 천호득은 정원에 있었다. 전화라도 해볼까 했던 천호득은 심통 맞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거래를 지휘하고, 새벽같이 협상을 진행했을 천중명이었다. 바쁘겠지. 힘들기도 하겠다. 게다가 다독일 임원과 직원이 어디 한두 명이겠나.
그저 마음 같으면 당장 본사로 달려가 그 자랑스러운 얼굴을 한 번 보겠다만, 그래서야 주책없는 늙은이가 가뜩이나 지쳤을 신임 회장을 힘들게 하는 꼴만 보일 뿐이었다.
중국을 두들겨서 우리 경제를 제자리로 가져다 놓은 신임회장의 공을 늙은이가 훈수라도 두었다는 양 나서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크흠.”
천호득의 불편한 심정을 헛기침을 쏟아낼 때였다.
정문 앞에 승용차가 멈춰서는 소리가 들렸다.
천호득의 고개가 쑥 위로 들린 순간이었다.
정문 안으로 누군가 들어선 뒤에 계단을 올라왔다.
“흐헤헤헤헤헤헤!”
계단을 밟을 때마다 위로 올라오는 천중명의 모습을 보며 천호득은 그만 특유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잘난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웃음이었다. 나이를 먹어 그런가, 눈이 짓물러서 그런가, 왜 눈가에 물이 맺히는 건지.
“저 왔습니다. 왜 그러세요?”
“눈이 짓물러.”
투박하게 나왔어야 할 천호득의 음성이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올게요.”
장만섭과 송달순에게 눈인사를 건넨 천중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인사하고 오는 그 길지 않은 시간을 천호득은 지루하게 기다렸다.
천중명은 잠시 뒤에 나왔다.
그리고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인 김순례가 차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회장이 직접 혼을 냈을 리는 없고?
천호득이 천중명에게 시선으로 물은 직후였다.
“총수님. 회장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못난 제 딸이 오늘 인센티브를…….”
“회장이 그걸 뺏었을 리도 없는데 어째 울어?”
김순례는 코를 훌쩍이며 얼른 눈가를 훔쳤다.
“하아아! 하으으. 하으.”
무언가를 말하려던 김순례가 복받친 울음을 다시 쏟아냈다.
“김순례 씨의 딸인 이명선 과장이 어제 거래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받았길래 울고불고야?”
“원천징수했을 테니 3백5십억 원 조금 넘을 겁니다.”
“허어-! 이제 그만둬야겠네?”
천호득의 탄성을 듣고 난 김순례가 얼른 얼굴을 닦아냈다.
“아닙…니다! 저는 총수님 모시고…….”
“내가 불편해! 내가!”
천호득의 투박한 대꾸에 천중명이 웃었고, 그때쯤 김순례는 감정을 겨우 추슬렀다.
“죄송했습니다, 총수님. 회장님을 뵙는 순간 갑자기…….”
마른침을 삼킨 김순례가 정말이지 곱다랗게 천호득과 천중명을 향해 상체를 굽혔다.
“무엇보다 딸아이의 앞길을 열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 죽어서도 간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너무 그러시면 불편합니다.”
김순례가 다시 고개를 숙인 뒤에 현관을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줘도 돼?”
“조 단위로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뭐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지! 그렇게 썼다가 남는 게 있겠어!”
천호득의 고개가 불쑥 앞으로 나왔다.
“투자라고 생각해 주세요.”
“또 여기에서 뭘 하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뭐?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
“예.”
“흐헤헤헤헤헤! 흐헤헤헤하하하하!”
천호득의 웃음 끝이 묘하게 바뀌었다. 천중명도, 지켜보는 장만섭과 송달순도 상관없었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나온 웃음이라 그랬다.
**
천호득과 점심을 먹은 천중명은 황성규를 벤처사업부 옥상으로 불렀다.
“회장님?”
“어서 오세요.”
역시 꺼칠한 얼굴의 황성규가 그러나 기쁜 얼굴로 천중명에게 고개 숙인 후에 벤치에 앉았다. 그의 양손에 1회용 컵이 들려 있었다.
“매번 본부장이 타주는 커피가 미안해서 오늘은 준비해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천중명은 그가 건네주는 1회용 컵을 고맙게 받아 한 모금을 마셨다.
“오늘 오후에 지난번 송금한 계좌로 2천억 원이 입금될 겁니다.”
황성규가 무슨 일인가 하는 눈으로 천중명을 보았다.
정오를 지난 햇볕이 벤치 위의 넝쿨에 걸려 옥상은 선선한 느낌이었다.
“고생한 팀원들과 적당히 나눠주세요.”
“회장님? 저희는 그런 대가를 바란 적 없습니다. 오히려 저와 팀원들을 믿고 지금까지 지원해 주셨습니다. 저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내 성의입니다. 황 선생님의 의지 덕분에 우리나라 경제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 점에 감사한다는 뜻을 확실하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잠시 멈칫했던 황성규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팀원들에게 지금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겠습니다.”
그의 인사에 천중명이 옅게 웃은 다음이었다.
“쇼더앤톨먼의 계좌는 아직 움직임이 없습니다. 24시간 지켜보고 있어서 어떤 식으로 움직이든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 진행하실 생각입니까?”
빠르게 상황을 전한 황성규가 꼬리를 문 것처럼 질문을 내놓았다.
“테드 케블린과 타일러 케인이 대가를 치를 때까지입니다.”
“혹시 그것 때문에 쇼더앤톨먼의 계좌를 지키라 하셨던 겁니까?”
“대강은요. 다시는 우리 쪽에 발을 못 디디게 해놓은 것으로 1차 목표는 이뤘습니다. 덕분에 1천2백조 원의 수익도 생겼고요. 그렇더라도 앞에서 날뛴 두 사람을 그냥 둘 수는 없죠.”
천중명의 답을 들은 황성규의 표정이 복잡했다.
“유대 자본이 두 사람을 포기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만들어야죠. 유대 자본도 당장 뺨을 얻어맞아 독 오른 중국과는 싸우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두 사람을 돕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내가 움직일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테드 케블린과 타일러 케인의 위치를 알고 있구나!
황성규는 확신이 담긴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윤 실장님이 애써주고 있습니다.”
그 직후에 천중명이 힌트처럼 건넨 말을 들으며 황성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회장님! 정말 그 두 사람을 윤 선배가 쫓고 있습니까?”
“윤 실장이 그 두 사람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사드도 알고 있을 겁니다. CIA 출신이 도깨비 대원과 함께 움직입니다. 도움을 주려고 사람을 보내면 오히려 중국 정보국에 제대로 꼬투리를 잡히죠.”
멍한 얼굴로 있는 황성규를 향해 가볍게 웃은 천중명은 그가 건네주었던 커피를 마셨다.
“그렇다면 회장님께선 처음부터 이런 순간까지 미리 짐작하셨었습니까?”
“꼭 그렇지는 않죠. 다만, 윤 실장이 그 두 사람의 흔적을 찾을 거란 확신쯤 있었습니다. 홍콩에서 움직인 것을 황 선생님이 알려주셨잖습니까?”
“도깨비 대원들까지……?”
“준비는 철저한 게 좋죠.”
가볍게 웃은 천중명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옥상의 앞을 향해 움직였다. 그런 뒤에 난간을 짚은 자세로 탄천을 보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계획을 세우고,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을 내세울까?
마법에 묶인 것처럼 움직인 황성규가 옆에 선 다음이었다.
“두 사람이 대가를 치르면 이 일은 거기에서 끝입니다.”
“도깨비 대원이라면 직접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달려드는 적을 상대할 때만 가능합니다. 뭐라 해도 은퇴한 사람들입니다. 조직원이 아니라 정보국이나 특수부대 현역이 달려들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모사드처럼 강한 정보국이 생길 텐데, 그때 대한민국은 진정한 강국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회장님의 꿈은 여기에서 멈춘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그럴 리가요.”
답을 한 천중명은 멀리 탄천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이 돼야죠. 그래서 강국이 될 기틀을 닦아놔야죠.”
“진심으로 그럴 때가 온다고 믿으십니까?”
황성규의 질문에는 답을 듣고 싶은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이번 위기를 이겨내는 과정을 잘 살펴보세요. 힘겨운 위치에 있는 분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기운 내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인터넷에 올린 동영상을 보며 함께 우는 이들이 있는 한, 우리는 반드시 강국이 됩니다.”
천중명의 말을 들은 황성규가 그답지 않게 울컥한 감정의 미소를 보여주었다.
**
하루 사용료가 비싼 만큼 홍콩의 호텔치고는 객실이 꽤 넓었다. 침실과 별도로 있는 거실의 창가에 앉은 테드 케블린은 소음기 달린 권총을 허벅지 올려놓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삶은 포기했다.
위장 죽음으로 처리해주리라 믿었던 조직은 어제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고,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오전에는 중국 정보국이 들이닥칠 정도로 꼬리를 밟혔다.
그뿐인가.
천중명이 보낸 게 분명한 인간들이 어제부터는 아예 대놓고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테드 케블린은 황채산을 먼저 떠올렸다.
그 멍청한 인간이 사실은 첫 번째 힌트였다.
그 인간이 물고기 밥이 되었을 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흠.”
테드 케블린은 쓰디쓴 한숨을 뱉어냈다.
뒷조사야 했다.
개망나니 출신이 느닷없이 사람이 바뀐 것처럼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개망나니가 그룹회장이 되었으니 힘을 쓰고 싶었겠지?
거기까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천중명은 파생거래로 홍콩물고기를 잡더니 삼합회의 조직원을 힘으로 눌러버렸다.
“삼합회 조직원을 죽였던 게 두 번째 힌트였었네.”
테드 케블린이 혼잣말을 뱉어냈을 때였다.
띠루룩.
카드키를 가져다 댄 소리가 들리더니 객실 문이 열렸다.
“다녀왔습니다.”
“상황은?”
“윤만석이라는 인간을 포함해서 커피숍에 두 명, 로비에 두 명, 지하 주차장에 두 명이 더 있습니다.”
타일러 케인의 보고를 들은 테드 케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투신하지 않는 한, 그들의 눈을 피해 객실을 빠져나가기는 틀렸다.
CIA 출신 윤만석도 놀랍지만, 특수부대에서도 가장 잔인하다는 도깨비들은 어떻게 저렇게 긁어모았는지.
“아무래도 조직의 지시에 따라야 할 것 같다.”
“연락이 있었습니까?”
반가운 기색으로 타일러 케인이 창가를 향해 다가왔다.
철컥!
“뭐……!”
푸슝! 퍽! 푸슝! 퍽!
허벅지에 있던 권총을 든 테드 케블린이 심장을 향해 두 발을 발사했고,
콰다당! 털썩!
작은 테이블 위로 넘어졌던 타일러 케인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의 셔츠를 적신 피가 쏟아진 물처럼 카펫 위로 흘러나왔다.
“세 번째 힌트가 있었어. 네가 박승양이란 사람을 찾아갔을 때 그의 반응을 알아챘어야 했다. 그들의 탐욕을 이용하려는 싸움이었는데 우린 그의 덤덤한 태도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거지.”
울기 직전의 얼굴로 테드 케블린은 권총의 총구를 입에 넣었다.
지독한 인간!
그는 이 싸움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고마운 마음이 한 조각쯤 발휘해서 적어도 테드 케블린은 살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천중명은 윤만석과 대원들을 시켜 도망갈 곳을 완벽하게 막았다. 그뿐인가. 계좌를 노려보는 것으로 테드 케블린과 타일러 케인을 돕지 말라며 조직에 경고하고 있었다.
“끄으-!”
처절한 울음이었다.
“천중며-엉!”
흉측하게 찌그러진 얼굴로 테드 케블린은 마지막 순간에 천중명의 이름을 불렀다.
푸슝!
펄쩍 튀듯 흔들려던 그의 몸이,
털썩!
의자에 삐뚜름하게 기댄 채 늘어졌다.
감지 못한 그의 눈이 창밖에 펼쳐진 홍콩의 하늘을 슬프게 바라보는 것이 탐욕을 위해 달린 테드 케블린의 마지막이었다.
**
옥상을 내려간 황성규를 대신하는 것처럼 잠시 뒤에 곽대출이 올라왔다.
“뭐하십니까?”
“모처럼 한가하게 시간 보낸다.”
천중명이 있는 것이 행복하다는 듯 그가 히죽거리는 웃음과 함께 벤치로 다가왔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벤치 위에 올려놓은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테드 케블린이 타일러 케인을 살해한 후, 입에 권총을 무는 방식으로 자살했습니다. 두 사람의 사망을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천중명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게 뭐 할 짓이 없어서 다른 이의 피눈물을 담보로 돈을 욕심내?
- 허락하시면 오후 비행기로 돌아갈까 합니다.
“고생하셨어요.”
- 감사합니다, 회장님. 들어가서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내용을 궁금해하는 곽대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짜 다 끝났다.”
“고생하셨습니다.”
“너도 애썼어.”
둘이 픽 웃은 뒤였다.
“믹스 커피 한잔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곽대출이 씩씩하게 커피 테이블로 향했다.
아직 오후의 반쯤 남은 태양이 벤치에 앉은 천중명과 커피를 준비하는 곽대출을 호기롭게 내려다보는 시간이었다.
에필로그
민세조는 전에 만났었던 식당을 예약했다.
환율이 안정되고, 금리가 차분하게 내려앉는 중이어서 힘겨웠던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에서 만난 느낌이었다.
“안쪽으로 앉으십시오.”
“마주 보는 자리에 그런 게 있나요? 편하게 앉으시죠.”
천중명이 웃으며 왼편의 자리로 움직이자 민세조가 어색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았다.
“VIP께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천중명은 덤덤한 표정으로 민세조의 말을 받았다.
“중국에서 두 가지 청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지경전자가 새로 개발한 1테라 메모리의 물량을 확보해 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경리온이 개발한 트럭의 중국 생산입니다.”
“전자는 기용도 부회장, 지경리온은 신상훈 총괄사장이 판단해서 결정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아! 오해하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번 청은 강요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협조를 최대한 요청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지난 거래로 수익이 많았으니 한 번쯤 배려해 줄 수 있지 않으냐는 뜻도 있었습니다.”
천중명은 옅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그룹에서 손을 뗄 계획이라 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뜻밖의 말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민세조가 멍한 얼굴로 눈을 끔벅였다.
“지경그룹은 당분간 천상기 부회장과 유진교 부회장의 투톱 체제로 갈 계획입니다. 대송자동차 그룹은 최만호 회장이, 대송그룹은 윤병지 회장이 관리하는 것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흠.”
그가 깊은숨을 내쉴 때 노크가 들렸고, 전과 같은 정갈한 반찬과 돌솥밥이 들어왔다.
“드십시오, 회장님.”
“그러시죠.”
그릇에 밥을 덜어낸 두 사람은 돌솥에 물을 부었다. 그런 뒤에 천중명과 민세조는 함께 젓가락을 들었고, 그렇게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당장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세계를 돌며 부족한 점을 배워볼 생각입니다.”
대화가 잠시 끊겼다. 식사에 열중해서라기보다는 민세조에게 꺼내기 어려운 말이 있어 눈치를 보느라 그런 상황이었다.
돌솥이 워낙 작아서 밥의 양이 많지 않았다.
차라리 밥을 먹고 난 뒤에 대화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천중명은 모른 척 식사에 집중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집무실에서 먹는 도시락의 절반 수준이어서 천중명의 속도에 따라 밥을 먹은 민세조는 또 비슷하게 돌솥을 앞으로 옮긴 뒤에 뚜껑을 열었다.
“정부에서 제가 가진 미국 채권의 처리에 관한 말이 있지 않나요? 국내 선물지수와 외환 시장의 거래를 두고 문제 삼을 부분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돌솥이 ‘이번에도 식을 때까지 엉뚱한 소리를 할 셈이요?’ 하는 항의를 하얀 김으로 대신하듯 피워올리는 앞이었다.
씁쓸하게 웃은 민세조가 민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역시 짐작하고 계셨군요. 그렇습니다. 특히 국내 선물과 환율에 투자하신 부분과 홍콩의 계좌를 국내에서 운용한 점에 대해 말이 있었습니다.”
천중명의 눈치를 살핀 민세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부적으로 그 부분에 관해서 더는 의논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혹시 언론이 떠들지 않는다면 조금 전에 말씀하셨던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아서 언론을 다독이라는 뜻을 민세조가 완곡하게 알려주었다.
“그렇더라도 미국 국채의 일부를 국내 계좌에 보관하시는 것은 어떨지 한 번쯤 고민해 주십시오.”
할 말은 다 오간 느낌이었다.
미안함과 후련함이 묻은 숨을 내쉰 민세조가 식어가는 돌솥에서 시선을 들었다.
“개인적으로 회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나섰으면서도 잡음을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한 점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가진 능력의 한계라고 여겨주십시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수석님께서 애써 주셔서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희 노모께서 망고를 더 드실 수 있게 해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대화를 마친 천중명은 그렇게 웃으며 누룽지를 먹었다.
있는 대로 속을 보여준 민세조의 솔직함 덕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커피를 앞에 두었을 때였다.
“그런데 회장님은 분위기가 또 바뀌셨습니다.”
민세조가 건넨 말에 천중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위엄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뭔가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려운 느낌인데…….”
“그런 건 제가 좋지 않은데요. 조언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말조차 쉽게 하기 어려운 분위기라면 오히려 제게는 마이너스가 되는 요소입니다.”
“그렇군요. 회장님은 또 변하실 겁니다. 목표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니까요.”
“감사합니다.”
대화를 마친 천중명은 민세조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생하셨습니다, 수석님.”
“아닙니다, 회장님. 다음 주에 총수님 뵙고 저녁을 모실까 합니다. 그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와는 가능하면 백화점의 떡국을 드세요.”
“참고하겠습니다.”
천중명이 손을 내밀었고, 민세조가 당연하다는 듯 공손한 태도로 맞잡았다. 돈이 많다고 고개 숙일 사람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
강갑수는 바다 비린내가 펄펄 나는 자루를 천상기의 고급 아파트에 낑낑대며 안고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했다. 그거 여기 부어주고 얼른 저녁 먹어.”
거실에 놓인 것은 커다란 고무 대야 두 개였다.
시장에서 산 싸구려 운동복 바지에 비슷한 가격의 면티 차림인 천상기를 강갑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보았다.
“부회장님?”
“집에서는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이 씨……!”
“알았어요, 형! 꼭 이럴 필요가 있어요?”
“시끄럽고! 얼른 부어!”
강갑수는 손에 짧은 칼을 든 천상기가 무섭다기보다 졌다는 얼굴로 대야에 자루를 쏟았다. 딱딱한 껍데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자루에서 쏟아져 나온 굴이 한순간에 대야를 가득 채웠다.
“어차!”
대야 앞에 앉은 천상기는 칼을 움직여 투박하게 굴을 까 알멩이를 옆의 대야에 넣었다.
“난 동생회장님처럼 의지가 강하지 못해서 흔들릴 때가 있어. 룸살롱 가고 싶기도 하고, 불쑥 직원들에게 개인적인 화를 터트릴 때도 있고.”
빈 자루를 들고 지켜보는 강갑수를 향해 천상기가 독백처럼 쏟아낸 말이었다.
자각. 자가각.
그러면서도 그는 손을 쉬지 않았다.
“뭐해? 저녁 먹으라니까.”
“형도 안 먹었지?”
“난 이거 다 끝내고 라면 먹을 거다.”
픽 웃은 강갑수가 주방으로 움직여 부엌칼을 들었고, 냉장고를 열어 초장을 들고 왔다.
“뭐하려고? 부엌칼은 커서 힘만 들어!”
“명필이 붓 가려요? 초장에 굴 찍어 먹으면 죽이잖아요! 끝내고 삼겹살 굽고 라면 끓여서 같이 먹읍시다.”
킬킬대며 웃는 천상기의 맞은편에 철퍼덕 앉은 강갑수가 가져온 초장을 빈 대야의 한쪽에 쭉 짜 놓았다.
“냄새 죽이죠?”
“살려주라!”
“하하하하! 형이 섬에서 그 말 할 때 정말 웃기기는 했는데!”
“이게 뭐라는 거야!”
둘이서 킬킬 웃은 뒤에 본격적으로 굴을 까기 시작했다.
자각. 자각. 자가각. 자각.
“푸른 물결 춤추는 그곳. 갈매기 떼 넘나들던 곳. 내 고향 집 오막살이가-.”
심심풀이처럼 부르는 강갑수의 노래가 거실을 메울 때 천상기는 울컥 눈시울을 붉혔다.
‘고맙다, 갑수야. 섬에서 나온 뒤에 아버지를 찾은 게, 다시 아들이 된 게 제일 좋았어. 다 네 덕분이다.’
천상기는 차마 뱉어내지 못한 고마움을 꿀꺽 삼키고 칼을 든 손을 재게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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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양은 명동의 거인으로 통했다.
송도상인이라는 그의 별명이 ‘지경상인’으로 바뀐 것은 이제 세상이 거의 다 아는 일이었는데, 하여간 그는 저축은행과 대부업계의 절대자가 되었다.
운용자금 30조 원의 대부업을 누가 생각이나 해봤나.
저축은행 금리가 은행 금리보다 1퍼센트 높고, 다시 대부업 금리는 그보다 달랑 5퍼센트 높은 수준이어서 사채 시장은 박승양의 눈빛 하나에 좌우로 흔들렸다.
“비가 오는데! 비가 오는데! 바람 부는데! 바람 부는데! 우산도 없이! 감기들겠네! 감기들겠네!”
오늘도 그는 희한한 노래를 부르며 남부증권 회장실 문을 열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저녁 먹어야지?”
“그렇지 않아도 도시락 주문했습니다.”
당연하게 소파의 상석으로 움직인 그가 못마땅한 눈으로 문요양을 노려보았다.
“유동화 증권으로 배부르고, 돈 좀 도니까 갑자기 내가 먹는 저녁이 아까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천중명 총수님이 드신다는 도시락이 하도 궁금해서 제가 직접 사 왔지 않겠습니까?”
“으이?”
놀라는 박승양을 향해 문요양이 검지와 중지, 약지의 손가락 세 개를 과감하게 위로 들었다.
“세 개나?”
“중식, 한식, 일식으로 준비했고, 밥 추가했습니다.”
“캬흐하하하!”
박승양의 만족한 웃음이 터져 나온 직후였다.
[사랑한다 말해주세요. 정신을 못 차릴 거야.]
이제는 정신줄을 놓아버린 듯한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액정을 확인한 박승양이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총수님!”
- 회장이라니까요.
“저희끼리는 이미 총수님이 되셨습니다! 크흑! 이 박승양과의 약속을 잊지 않으셔서 큰 보상을 주셨고, 저를 오늘날 명동의 대부자리에 있게 하시며…….”
- 내일 오전에 잠시 시간이 되실까요?
줄줄이 이어지는 식상한 박승양의 대사를 천중명이 짧은 질문 하나로 뚝 잘라버렸다.
“됩니다! 어디로 찾아뵈면 되겠습니까?”
- 집무실이 좋겠습니다.
“찾아뵙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박승양을 문요양이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캬흐하하하! 회장님께서 나를 이리 불러주시네!”
“하아. 정말 대단하십니다.”
문요양의 탄성은 진심이었다. 지금 천중명은 그만큼이나 만나기 어려운 인물이었고, 누구나 한 번쯤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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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평은 중국 삼합회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대송자동차그룹의 현지 공장과 판매시설 유지, 지경리온자동차의 중국 내 생산, 지경화장품의 미라클과 미라클 팩의 수입까지, 그의 영향력을 당국도 무시하지 못했다.
“우리의 첨단산업 발전을 위해 양 총재가 천중명 총수를 만나 새로운 메모리를 수입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총수님께서는 이미 경영에서 물러나셨습니다. 필요하다면 유진교 그룹 부회장과 지경전자 기용도 부회장을 만나보겠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만나만 주시오, 양 총재.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간곡하게 매달린 당의 간부를 배웅한 양서평은 엄지와 검지를 문지르며 정원을 걸었다.
진광효가 남긴 정원에서 물고기들은 사료에 적응한 채 순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총수님께선 삼합회 총재를 중국과의 연결고리로 두실 계획이셨던 거군.”
이렇게 현실을 깨달을 때마다 솔직히 무섭다. 만약, 그가 천중명에게 머리를 치켜들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입맛을 다신 양서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양회 대표에게 연락해서 저녁을 함께할 수 있는지 확인해.”
“예, 총재님.”
한국을 방문할 생각이었다. 모시는 분께 충성을 보이기 위해서이지, 메모리를 조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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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를 살피던 최만호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중국과 미국 시장에서 새롭게 선보인 신차의 이름은 ‘미라클’이었다. 지경화장품의 성공을 따르겠다는 열망이었는데 결과는 완벽한 성공이었다.
딜러들이 물건을 달라며 아우성이고, 대기 고객에게 하루라도 빨리 차를 배정하기 위해 임원들이 골머리를 싸맬 지경이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똑똑똑.
그때 노크가 들리고 최치국이 안으로 들어왔다.
“미라클의 패밀리 룩이 완성되었습니다. 대형차 시장에서도 성공을 거둘 거라 확신합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미소를 지운 최만호는 냉정한 눈으로 최치국이 올린 보고서를 살폈다.
“디자인 평가는?”
“뒤에 설문 결과를 올렸습니다.”
“안전에는 자신 있나? 이번에도 재검토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면 자네나 나는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어.”
“총수님께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승용차입니다.”
최치국을 똑바로 바라보던 최만호는 그만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회장님. 이럴 때는 한 번쯤 시원하게 웃어주셔도 됩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저녁은 도시락 어때?”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최만호가 인터폰에 손을 올렸다. 그가 보여주는 최고의 칭찬인 미소와 도시락을 오늘 최치국은 모두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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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대출은 본의 아니게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렸다.
그가 지켜준 벤처기업의 성공률이 30퍼센트를 넘기면서 벤처사업부는 초대박을 기록했다.
그리고 결혼식이었다.
그동안 도움받았던 관계자들이 몰려왔고, 천중명을 비롯한 지경그룹의 회장단이 대부분 참석 의사를 밝히면서 그의 결혼식은 언론의 관심까지 한 몸에 받았다. 주례를 맡은 사람이 유진교 부회장이니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나.
“총수님이다!”
천중명과 허선영이 등장하는 순간,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하객들과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촤자자자작. 촤자자자자작.
카메라가 쉴 새 없이 터지는 틈을 지난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신랑 대기실에 먼저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어디 싸우러 가?”
“예?”
슬쩍 허선영을 돌아본 천중명이 곽대출의 귀로 상체를 기울였다.
“긴장 좀 풀어라. 보기 애처롭다.”
“제가 그렇습니까?”
“코피 닦고.”
“어?”
하얀 장갑을 낀 곽대출이 놀라 코밑을 문질렀다가 장난처럼 눈을 찌푸렸다.
“축하한다. 곽대출.”
“고맙습니다, 총수님.”
“회장이라니까!”
다른 하객들은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신랑 대기실에서 천중명과 곽대출이 함께 킬킬거렸다.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사모님.”
그런 뒤에 곽대출은 허선영과 공손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신혼여행을 못 가서 어쩌냐?”
“아닙니다. 내일 스웨덴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어머, 본부장님? 정말요?”
“예! 사모님! 스웨덴에 14박 15일로 갑니다. 멋진 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긴장이 풀렸는지 지금 곽대출은 뻔뻔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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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도운 개발자는 입술 끝을 아래로 내린 얼굴로 서러워 보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 심정을 왜 모르겠나.
부작용 치료에 1백억 원을 내놓겠다며 달려든 신제품이었고, 무엇보다 천중명에게 도움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매달렸던 ‘미라클 마스크 팩’이었다.
미라클 마스크 팩은 출시와 동시에 엄청난 반응을 얻었고, 생산한 제품을 가져가겠다며 대리점 트럭이 공장 앞에서 버틸 정도의 흥행을 기록했다.
첫 제품이 출고되는 날, 손도운은 공장에 들어서는 천중명을 보며 왜 그런지 바보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고맙습니다, 개발자님.”
“흐으. 도움을 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받은 걸 조금이라도 갚아드리려고……. 흐으으.”
“가장 힘들 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총수님! 제가……. 흐으으.”
여자처럼 날카로운 음성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그의 어깨를 천중명이 안아주었을 때였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지켜보던 직원들이 눈시울을 붉힌 채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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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전자는 꿈을 이루었다.
세계적인 제조사들이 팀을 파견해 호텔에 진을 치고서 기용도를 면담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그 증거였다.
속도, 크기, 저장용량의 세 가지를 해결한 메모리를 확보하는 것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출근하기 무섭게 기용도의 집무실로 상무 두 명이 들어왔다.
“부회장님. 세 팀이 방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거절만 하면 우리는 적을 너무 많이 두게 됩니다.”
해외 파트 상무가 하소연처럼 보고를 내놓았고,
“우리 전자에서 생산하는 제품에 충당하기에도 물량이 달립니다.”
생산 파트를 맡은 상무가 고충을 털어놓았다.
“앉으세요. 커피 괜찮으세요?”
“감사합니다.”
지금 기용도는 어쩐지 천중명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좋아하는 사람을 닮아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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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천중명이 보았던 고성에 천중명과 마주 앉은 신상훈은 행복한 얼굴이었다.
지경그룹 비서실이 이 성을 매입했고, 대대적으로 수리했으며, 마침내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멋진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비서실에서는 메이드를 파견했는데 절반은 또 현지에서 고용했다.
“비서실에서 성을 이렇게 바꿔놓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이렇게까지 해낼 줄은 몰랐는데 알다시피 디자인을 전공해서…….”
천중명이 위층을 검지로 가리키면서 둘이 함께 웃었다.
“총수님께서는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으십니다.”
적당하게 인사를 마친 신상훈이 아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경리온자동차의 트럭인 신화가 폭발적인 매출을 기록하고 있어서 그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신상훈을 배웅한 천중명은 널따란 계단을 올라가 탑의 중간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까 해서 먼저 일어났던 건데 벌써 갔어요?”
“인사차 온 거야. 눈치를 봐선 조만간 또 들를 것 같고.”
“중명 씨! 눈 와요!”
장작이 타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벽난로를 지난 허선영이 창에 매달렸다. 천중명이 다가갔을 때 녹색의 숲과 성 주변으로 하얀 눈발이 탐스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방에 들어오면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나 왕비가 된 느낌이에요. 전에 멋진 결혼식을 선물하겠다는 게 여기였어요?”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처음 이 성을 보았을 때 선영 씨가 생각났었거든. 이건 우리 두 사람에게 주는 상이야.”
행복한 얼굴의 허선영을 천중명이 부드럽게 안았다.
“계속 여기서 사는 건 아니죠?”
“왜?”
“가끔은 도시의 화려함도 보고 싶어서요.”
“하하하하!”
천중명은 정말이지 커다랗게 웃었다.
“다음 주에 결혼식 마치고 나면 세계 일주, 그 뒤에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잖아.”
“그다음은요?”
“지금처럼 열심히 살아야지. 다음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허선영이 다시 천중명의 품을 파고들었다.
안을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보고 싶은 눈발이 바람에 의지한 채 버티다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