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4
314. 진짜 다 끝났다 (1)
아침 보도는 온통 지난밤 중국의 환율과 야간 선물시장의 움직임에 관한 소식으로 가득했다.
[중국 당국은 오전 7시 30분을 전후로 환율과 선물시장이 안정을 찾았다고 발표했습니다. 시장 관계자들은 위안화 안정을 위해 중국 정부가 대략 5백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투입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TV 화면에는 산을 그린 것처럼 뾰족뾰족하게 움직인 차트가 떠올랐고, 그 뒤에서 금화가 우수수 떨어지는 장면이 겹쳐졌다.
[베이징 쇼크라고 불리는 이번 사태는 중국 당국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현재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이번 환율 공격에는 세계 5대 헤지펀드가 모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97년 이후 가장 극적인 수익을 냈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이어서 화면은 베이징의 광장에 서 있는 기자를 보여주었다.
[중국은 이번 환율 공격의 주범으로 진광효 삼합회 총재를 긴급 체포했습니다. 진광효는 헤지펀드들과 손잡고 구간 지정 환율 제도의 약점을 이용해 차익을 노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기자의 설명과 동시에 화면에 악수를 나누는 남자들의 사진이 올라왔고, 그중 진광효를 붉은색 동그라미로 표시해 알려주었다.
[한편 지난밤 베이징 쇼크로 홍콩과 일본, 유럽, 미국 등 세계 각국의 금융시장이 요동쳤습니다. 우리 금융당국은 이번 중국의 사태가 가뜩이나 어려운 우리 경제 상황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침을 먹은 후, 보도 뉴스를 보던 천호득이 인상을 찌푸렸다. 중국 위기가 좀 더 이어졌다면 한국을 노리는 세력이 저쪽에 붙었을 텐데, 이리 쉽게 끝나버리는 바람에 얻을 것이 없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외환의 보유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니…….”
천호득이 혼잣말을 뱉어낼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그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번호를 확인한 그는 얼른 볼륨을 줄이고는 이어셋을 귀에 걸었다.
“여보세요?”
- 윤만석입니다, 총수님.
“그래. 무슨 일이야?”
- 상황이 끝난 것 같습니다.
“상황이 끝나다니? 어떤 상황?”
윤만석의 보고에 천호득은 고개를 갸웃했다.
- 아침에 중국 쇼크에 관한 보도를 보셨습니까?
“벌써 정리됐다고 나오던데? 특별하게 영향받을 일도 없을 것 같고. 뭐야! 뭔데 뜸을 들여!”
윤만석의 질문을 잘 받아주던 천호득이 바로 핵심을 전하지 않는 것에 불뚝 목소리를 높였다.
- 신임 회장이 제게 맡긴 임무가 미국 헤지펀드들의 움직임과 진광효의 위치 파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
- 오늘 새벽 진광효가 마카오에서 체포되었고, 다시 오전 7시쯤 중국 정부 소유의 미국 국채가 홍콩의 계좌로 이관되었습니다. 모두 1조5천억 달러어치입니다.
이어셋을 건 천호득이 눈을 끔벅이며 한화로 얼마인가를 떠올렸다.
- 우리 돈으로 대략 2천조 원입니다. 그중 8백조 원가량이 미국 금융사로 다시 이관되어서 현재 홍콩 계좌에는 1천2백조 원 상당의 미국 국채가 남아 있습니다.
“홍콩 계좌라고 했지?”
원래대로라면 또 한 번 벌컥 짜증을 쏟아냈어야 할 천호득이 맛있는 부위를 아껴두려는 사람처럼 윤만석의 보고에 장단을 맞췄다.
“그 홍콩 계좌라는 게 혹시 우리 회장 소유인가?”
- 예, 총수님. 신임 회장이 관리하는 계좌입니다.
심청이의 “아버지!” 하는 소리에 심봉사가 눈을 떴다더니 천호득은 윤만석의 보고에 휠체어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뭐가 되려고 그래?”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입니다.”
또렷이 기억한다.
천호득의 질문에 별거 아니란 듯, 그러나 강렬한 눈빛으로 답을 하던 천중명을 말이다.
“끄으!”
- 총수님? 총수님?
“괜찮아. 별거 아니야. 갑자기 무릎이 좀 아파서……. 끙. 그래서? 우리 회장이 지금 1천2백조 원 상당의 미국 국채를 가지고 있다?”
- 오늘 아침에 회장이 운영하던 거래팀이 미국 국채를 이관받은 직후에 수익을 반납하고 모두 철수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밤에 중국의 환율 시장을 공격한 것이 사실은 우리 회장이다? 그런데도 중국은 엉뚱한 놈을 잡아들이고 회장에게는 2천조 원어치의 미국 채권을 넘겼다.”
- 진광효가 우리 경제를 파탄 내려 했던 주범입니다, 총수님.
“흐헤헤! 흐헤헤헤헤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려 나오는 천호득의 웃음이 그의 서재를 메운 뒤에 수화기를 타고 건너갔다.
“미국의 국채를 그렇게 가지고 있다면, 우리 경제도 이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지?”
- 확실합니다, 총수님. 게다가 거래팀은 130조 원 정도의 현금도 보유하고 있어서 더는 한국 시장 공략이 어렵습니다. 제 짧은 지식으로 봐도 대략 2주 안에 안정을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흐헤헤헤! 그래. 자네는 지금 어디야?”
- 진광효를 따라 마카오에 갔다가 지금은 홍콩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신임회장이 지시한 일을 마치면 귀국할 예정입니다.
“그래. 조심해.”
생전 해본 적 없던 걱정까지 건넨 천호득이 이어셋을 내려놓았다.
[우리 정부는 안정세를 이룬 원·달러 환율이 조속히 정상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계획입니다.]
“흐헤헤헤헤헤헤!”
보도 방송이 열심히 상황을 전하는 동안, 천호득은 참을 수 없는 기쁨을 웃음으로 토해냈다.
**
오전 9시 30분쯤 송문철이 천중명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그를 맞이한 천중명은 먼저 악수를 나누었고, 이어서 소파를 가리켰다.
“오늘은 쉬시라니까요.”
“보고를 드려야 마음 편히 쉴 것 같았습니다.”
둘이서 자리에 앉았고, 피곤을 잠시라도 쫓아내기 위해 커피를 주문했다.
“회장님. 다른 무엇보다 국내 환율과 금리를 안정시키는데 일조한 것 같아 그 점이 가장 기쁩니다. 구완섭, 강다희, 전지곤 팀장 모두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송문철이 감격한 얼굴로 보고할 때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드세요.”
“예, 회장님. 그리고 거래 내역을 정리한 보고서입니다.”
커피를 권한 천중명은 송문철이 전해준 보고서를 펼쳤다. 계좌 운영 총액, 이익금, 수익률, 마지막으로 인센티브가 적혀 있었다.
“인센티브는 팀별로 가장 큰 수익을 기준으로 정했습니다.”
밤을 새운 탓에 푹 꺼진 얼굴의 송문철이 조심스럽게 내놓은 보고였다.
“말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겠지만, 그렇더라도 너무 큰 금액이라 염려스러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가장 많은 인센티브를 받는 직원은 1천7백억 원 정도를 받는 구완섭 팀장이었다. 천중명은 페이지를 넘겨 이명선의 인센티브를 살핀 뒤에 픽 웃었다.
3백7십억 원이었다. 인센티브를 받으면 평창동에서 일하는 이명선의 모친 김순례가 일을 그만두고 돈을 관리해주어야 할 수준이었다.
“계산이 이상한데요? 원래 퍼센티지로 따지면 1조 원이 넘는 것으로 나오는데요?”
“솔직히 1천억 원 이상 수익의 인센티브 포지션이 없었습니다. 뉴욕의 금융사 비율로 최고 구간을 설정했을 때 나온 금액이고, 다들 만족한 금액이었습니다.”
“직원들은요?”
“오늘부터 사흘간 휴가를 주었는데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서 아직 호텔에 있습니다.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워서 제가 돌아가 함께 식사한 뒤에 헤어질 예정입니다.”
천중명은 모처럼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사람 심정 다 거기서 거기다.
이처럼 엄청난 인센티브를 과연 천중명이 결재해줄까 하는 염려도 있을 테고, 그에 대한 송문철의 답이 있기 전까지, 실제로 통장에 돈이 입금될 때까지 잠을 청하기 어려울 일이었다.
아마 통장에 입금되면 흥분돼서 잠이 안 올 것도 같았다.
“강다희 팀도 함께 있습니까?”
“예. 거래를 마치고, 호텔에 합류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군요. 우리 송 회장님과 최상중 상무는 왜 인센티브가 없습니까?”
“회장님! 저는 그런 걸 바란 적 없습니다. 최 상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천중명은 보고서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 상무가 서운해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이번 송문철 대답은 어쩐지 자신감이 부족했다.
“그렇군요.”
고개를 든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구완섭 팀장 번호가 어떻게 되죠?”
그런 뒤에 송문철에게 질문을 건넸다.
**
스위트룸에 모인 환율팀과 파생팀은 꺼칠한 얼굴에 충혈된 눈으로 지난 거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금융업계에 앞으로 1백 년은 떠돌 완벽한 승리였다.
이 엄청난 승리에 따른 인센티브 역시 역대 대한민국 금융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어서 다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비록 상한선에 대한 비율을 조절해 미국 금융사의 수준으로 맞췄다고 해도 정말 약속한 금액대로 결재해줄까?
미국의 월가가 아닌 한국에서 그런 엄청난 인센티브가 실제로 지급될 수 있을까?
송문철이 그룹 회장인 천중명을 만나 결재를 받아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말이 그렇지 구완섭이 받는 인센티브가 1천7백억 원이니 아무래도 그대로 다 받기 어려운 금액이긴 하겠다.
스위트룸에 앉은 이들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구완섭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고개를 갸웃한 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구완섭 팀장?
“예. 제가 구완섭입니다.”
구완섭이 혹시 하는 얼굴로 최상중을 본 직후였다.
- 나 천중명인데.
“네! 회장님!”
그런 뒤에 그가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고, 얼결에 그의 팀 막내가 함께 몸을 일으켰다.
- 고생들 많았어. 거기 다들 모여있다면서?
“그렇습니다, 회장님.”
강다희가 의아한 눈으로 구완섭을 보았다. 마법사라 불리는 그가 저토록 존경하는 눈빛과 태도를 갖추고 통화하는 것을 처음 보아서였다.
- 구 팀장 인센티브가 1천7백억 원이 조금 넘어. 요율이 바뀌었는데?
“예, 회장님. 최고 수익으로 정하라는 지시에 따라서 산정했고, 이전에 이 구간 요율이 따로 없어서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가뜩이나 그에게 쏠려 있던 시선에 긴장이 감돌 때였다.
- 고생했고, 오늘 중으로 회계팀에 정리하게 할 테니까 세금 제대로 신고해서 문제 되는 일이 없도록 해.
“감사합니다! 회장님!”
얼굴이 붉게 물든 구완섭이 실제로 상체를 숙여 가며 인사했다. 그런 뒤에 그는 왼손 주먹을 꽉 움켜쥐어서 지켜보던 팀원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았다.
- 최상중 상무 있지?
“예.”
- 바꿔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회장님.”
최상중에게 전화기를 건넨 구완섭이 ‘보고 올린 대로 모두 지급하신대!’라는 입 모양을 그려냈다.
양팔을 높이든 직원,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몸을 떠는 직원들로 스위트룸의 거실이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볼륨을 완벽하게 줄여놓은 TV처럼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트린 이명선을 비켜난 최상중은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전화 바꿨습니다. 최상중입니다.”
- 최 상무.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회장님. 할 일을 했고, 좋은 결과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내가 잠깐 고민했는데.
“예, 회장님.”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지? 혹시 구완섭에게 지급하는 인센티브로 팀원들 전체를 나눠주라는 건가?
최상중은 얼른 테라스 안을 들여다보았다.
- 송 회장과 최 상무에게도 구 팀장이 받는 인센티브 수준으로 포상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최상중은 갑자기 울컥 쏟아진 울음 때문에 고맙다는 말도 못한 채 변태처럼 이상한 숨소리를 쏟아냈다.
“흐으. 흐으으.”
돈 좋지. 그런데 이렇게 고생한 점을 잊지 않는 마음도 돈만큼이나 좋았다.
최상중의 감정을 알아챈 것처럼 천중명의 웃음이 건너왔다.
- 고생 많았어요. 푹 쉬고 사흘 뒤에 봅시다.
“감사…합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휴대 전화기를 내린 최상중은 손바닥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
송문철을 보낸 천중명은 유진교를 불렀다.
“회장님?”
“이리 앉으세요.”
소파의 앞에 앉은 유진교는 확실히 뭔가 짐작한 눈치였다.
“어제 있었던 중국의 위안화를 공격한 것이 우리 팀이었습니다.”
놀라기는 했는데 이 정도 소식쯤 짐작했던지 유진교는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국의 외환 시장을 원래대로 돌려주는 조건으로 미국 국채 1조5천억 달러어치를 받았습니다.”
“예에?”
그러나 이어진 소식에 천하의 유진교도 놀란 소리를 내고 말았다.
“5대 헤지펀드에 8백조 원가량 건너가서 현재 홍콩 계좌에 1천2백조 원가량이 남아 있습니다. 이 정도면 국내는 충분히 안정을 찾을 겁니다.”
오미자차를 놓아준 부속실 직원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유진교가 해임 통지를 받은 듯한 얼굴로 넋을 잃은 채 앉아 있어 그런 모양이었다.
“차 드세요.”
“회장님? 그렇다면 제게 지시하신 내용을 이행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행해도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셔야죠.”
실없는 사람처럼 웃은 유진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세상에!
대한민국의 외환위기를 완벽하게 틀어막은 것으로 모자라 중국 외환 시장을 두들겼고, 거기에 다시 1천2백조 원이라는 가늠조차 안 되는 미국 채권을 손에 넣다니.
유진교는 어쩐지 천중명이 인간의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5대 헤지펀드들을 상대해 중재한 사람이 김준후 씨입니다. 오전에 모두 끝났고, 이 소문은 반드시 돕니다. 오늘부터 환율이 가라앉을 테고, 이자율도 내려갈 테니 안정화 정책을 시작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마른 침을 삼켰던 유진교가 목을 축이기 위해 차를 마셨다.
“나는 마타르 청장과 화상회의만 하고 평창동에 들를 생각입니다. 그 뒤에 오늘 밖에서 퇴근하겠습니다. 내일부터 지경그룹은 두 번째 도약을 시작합니다. 마침 신제품이 나오고 있으니 올바른 기업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제대로 보여주세요.”
“예, 회장님.”
유진교의 단단한 답을 들은 천중명은 협탁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네, 회장님.]
“마타르 청장과 화상회의를 하고 싶은데 연락해서 가능한 시간을 알려줘.”
[확인하겠습니다, 회장님.]
인터폰에서 손을 뗀 천중명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긴 싸움이 끝난 뒤 후련함이 그 무엇보다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