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309화 (309/315)

# 309

309. 중국을 먹자고? (1)

소문은 무섭다. 그중에도 ‘입소문’이라고 표현하는 광고 효과는 그 어떤 매체를 통한 것보다 파급력이 대단했다.

“어머! 어머!”

환율이 엉망이고, 금리가 치솟아도 평범한 이들이 사는 건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손님과 매출이 줄어든 강남스퀘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뭐야?”

지경화장품 김민희 매니저에게 몰려든 주변 매장 매니저와 직원들의 감탄은 말할 것 없고, 단골손님들조차 그녀의 피부를 보며 놀랐다.

“변했죠?”

“변하다 뿐이야? 뭐야, 뭔데? 시술했어? 아님 백옥 주사? 병원이 어디야?”

“회사 신제품 테스트에 지원했거든요. 그 제품의 효능이에요.”

“어머머머머!”

이건 숫제 얼굴이 마주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고개를 디민 고객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언제 나와?”

“이번 주에 테스트 끝나면 결과 모아서 결정해야 할 테니까 시일이 좀 걸릴 것 같아요.”

“나, 무조건 살 거야! 아 참! 얼만데? 아예 오늘 계산해 놓고 갈게.”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거 없어요. 오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미라클하고 함께 사용해야 하는 건 아시죠?”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함께 다니는 일행들 알지? 다 주문할 거니까 물건 나오는 대로 바로 연락해요!”

호들갑을 떨며 돌아섰던 손님은 미련이 남는지 서너 번이나 김민희를 돌아보았다.

“나 있잖아. 제품 나오면 소문 안 나게 좀 밀어줘.”

심지어 경쟁 회사 매니저들까지 은밀하게 청을 넣을 정도였다.

한가해진 틈을 이용해 김민희는 고개를 기울여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매장에서 확인하는 반응이 가장 정확하다. 이 제품은 미라클보다 더 크게 터진다.

자신할 수 있다.

‘회장님! 잘 되셨으면 좋겠어요!’

복장을 추스른 김민희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매장에 서서 손님들을 맞았다.

**

진광효와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중국어 통역을 내보냈다. 그런 뒤에 황성규의 번호를 눌렀다.

-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방금 진광효와 통화했습니다. 내일 오전에 계좌를 터트릴 거라 알려줬으니 오늘 중으로 움직일 거로 봅니다.”

- 계속 감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에서 내일 오전 전에 일이 있을 겁니다. 확실하게 처리해주세요.”

- 맡겨주십시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책상에서 일어나 창으로 향했다.

마지막 방아쇠야, 진광효.

여기에서 살아나면 인정.

쉽지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 버텨.

그래서 죽음이 다가오는 공포가 어떤 건지 제대로 느껴.

너는 욕심이라도 부렸지.

네 탐욕을 위해 흔들어놓은 한국에서 돈 만 원에 죽음을 고민하던 이들은 그보다 더 심한 고통에 시달렸을 테니까.

이제 벌을 받아라, 진광효.

대가는 한 푼 값어치도 없는 네 목숨과 미국 채권을 내다 판 중국 정부의 돈으로 받겠다.

창을 바라보던 천중명이 옅게 웃었다.

**

지경전자 부회장 기용도는 숨을 길게 내쉰 뒤에 연구소에 들어섰다. 연구소장의 호출이 예사롭지 않았다. 기다렸던 신제품이 나온 것이 분명했다.

“오셨습니까?”

수면과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몰골로 연구소장과 이관수 개발자, 연구원들이 기용도를 맞았다. 완전히 방전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 담긴 빛나는 기대감을 기용도는 분명하게 보았다.

“여기입니다.”

테이블 직경이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둥그런 테이블이었다. 하얀 천을 덮어 놓은 중앙의 테이블로 기용도를 안내한 소장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제품이었다.

테이블에 놓인 하얀 천을 당겨 신제품을 확인하는 것은 지경전자 회장, 또는 부회장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같았다.

기용도는 천천히 하얀 천을 거뒀다.

둥그런 테이블에 놓인 것은 새끼손가락 손톱 크기의 메모리였다. 잠시 메모리를 지켜보던 기용도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시선을 들었다.

“살아 있는 1테라 낸드 플래시 메모리입니다.”

당연하게 짧은 한마디로는 기용도가 지닌 궁금증이 풀리지는 않았다.

“메모리를 구성하는 베이스가 배터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연구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소장이 말을 이었다.

메모리의 몸체를 배터리로 했다고?

추가 설명을 기다리며 기용도가 메모리에 시선을 돌린 직후였다.

“낸드 플래시 메모리는 전원을 꺼도 원하는 데이터를 남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해서 컨트롤러 기능을 자체적으로 해결했습니다.”

제품을 향했던 기용도의 고개가 무척이나 천천히 돌아왔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소장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고, 이관수 개발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터의 입력, 저장순서, 모든 것이 저 작은 메모리 안에서 자체적으로 해결됩니다. 배터리 성능은 전원을 전혀 공급하지 않는 상태에서 25년입니다.”

“소장님?”

이제야 기용도는 놀란 감정을 드러내며 눈을 껌벅였다.

“배터리가 데이터를 이동시키는 방식을 이용해 수직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했습니다. 노어 플래시 메모리의 형태에서 낸드 플래시의 속도를 보장합니다.”

해냈다.

세계 최초로 노어 플래시 메모리 형태의 낸드 플래시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1테라 용량을 말이다.

울컥한 감정이 올라온 기용도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웃었다.

“그룹 회장님께 보고하십시오. 전 세계의 스마트폰 제조사, 게임업체, 노트북 제조사, 그 모든 메모리를 사용하는 모든 기업이 우리 앞에 줄 설 것이라 감히 자신합니다.”

기용도는 여전히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본 소장이 엉뚱하게 울음을 삼켰고, 이관수는 코를 훌쩍였으며, 연구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해내셨네요. 소장님이 해내셨어요!”

“우리가 해낸 겁니다, 부회장님. 이관수 개발자님의 기획, 연구개발비를 신청하고 기다려준 부회장님, 오늘까지 이렇게 노력해준 여기 연구원들, 우리가. 우리가 해낸 겁니다.”

소장과 손을 마주치며 기쁨을 나눈 기용도는 이어서 개발자 이관수를 부둥켜안았다.

“고생하셨어요! 이런 제품을 가져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께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기쁩니다.”

대꾸를 건넨 이관수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지난 세월에 쌓였던 고생과 지금의 성공이 교차하며 그를 울게 한 모양이었다.

“고맙습니다.”

기용도가 그의 어깨를 보듬었고, 지켜보던 소장과 연구원들이 박수로 이관수를 축하했다.

**

금리는 연일 살인적으로 뛰어올랐다. 심지어 자고 일어나면 1퍼센트 이상 위로 치솟아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돈을 움켜쥐고 풀지 않았다. 당장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탓이었다. 평소라면 그럭저럭 도움 청할 수준의 1백만 원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니 솔직히 말 다했다.

“사장님! 필요하실 때 도움받으세요!”

거리를 빠르게 걸어가는 박승양에게 누군가 다가와 광고지를 건네주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박승양이 힐끔 내려다본 광고지에는 하루 1퍼센트의 이자가 파격적 대우라며 적혀 있었다.

“적당히들 해라, 적당히. 그렇게 피 빨고 살다가…….”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던 박승양이 말끝을 흐린 뒤에 입맛을 다셨다. 그는 곧바로 남부증권으로 올라갔다. 그런 뒤에 회장실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남부증권 회장 문요양은 핼쑥해진 얼굴이었다.

“죽겠지?”

“뭐 그렇습니다.”

수익을 내주던 이명선은 훨훨 날아갔고, 경제가 힘겨운 만큼 주식 시장 역시 어려워서 문요양은 세상 살맛을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밥 안 먹어?”

“먹어야죠. 먹습니다. 뭐로 하실까요?”

“한우 갈비?”

문요양이 뾰로통한 눈으로 박승양을 보았다.

“어허! 이렇게! 이렇게! 내가 도움을 좀 줄까 하는데?”

“예?”

“내가 저축은행을 여러 개 가진 건 알지?”

“그야 뭐.”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닌 데다, 박승양이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돕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문요양은 그다지 기대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리츠 회사도 있는데?”

“부동산 매입하신다는 소식은 알고 있습니다.”

“꽤 매입했지. 벌써 한 40조 원 될걸?”

“축하드립니다.”

건성으로 홱 넘어온 답에 박승양이 고개를 갸웃했다.

“끄응! 뭐 이런 대접받으면서 계속 떠들 필요가 있나. 가봐야겠다!”

천하의 박승양이다. 저 양반이 삐딱해져서 마음 독하게 먹으면 문요양은 감당하기 어렵다.

“뭘 또 그렇게 가십니까? 그저 제가 요즘 경영이 너무 힘겨워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리 천중명 회장님의 큰 뜻을 받든답시고 감원 없이 버텨왔는데 다음 달에는……. 크흑.”

“에헤이! 그걸 또 뭘 그래?”

어쩐 일인지 박승양은 과장된 문요양의 슬픔을 차분하게 다독여주었다.

“내가 말이지. 40조 원의 부동산으로 ABS를 발행할 생각인데 남부증권이 주관사가 될 수 있을까?”

“예에-에?”

“자격이 돼?”

“됩니다! 되지요! 일단 일어서십시오!”

박승양 앞에서 문요양은 불룩한 배 때문에 앞섶이 벌어진 셔츠 위에 급하게 재킷을 걸쳤다.

“서두를 게 아니라니까! 부동산 40조 원을 담보로 10억 원짜리 채권을 만들면 모두 4만 장이야. 함부로 덤벼들 게 아니라 팔 자신도 있어야지.”

박승양의 걱정에도 문요양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지난번에 한우 갈비가 좀 질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더 잘하는 집을 알아놨습니다.”

“가만있자! 40조 원을 담보로 유동화 증권을 발행하면 남부증권은 얼마나 먹을까나?”

박승양의 한 마디에 문요양의 얼굴에 희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떠올랐다.

“간단하게 계산해도 2천억 원인데 한우 갈비라?”

“회장님! 골프채 교체하실 때 안 되셨습니까?”

“요즘 끊었어.”

“아, 맞다! 차! 승용차가 좀 오래되셨던 거 같은데?”

“회사 차가 나오네?”

“일단 저녁부터 드시면서! 제가 이렇게 모시겠습니다!”

문요양은 아예 박승양을 안다시피 챙겨서 회장실을 나섰다.

**

삶이 그렇듯 그룹의 일도 멈추는 법은 없었다. 게다가 금리와 환율이 널뛰면서 경영이 힘든 계열사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퇴근 시간 전이었다.

노크와 함께 결재판을 든 유진교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잠시 뵙자고 할 참이었는데 무슨 일인가요?”

“늦게 올라온 보고서를 전해드릴까 해서 왔습니다.”

“저녁은요? 괜찮으시면 도시락 함께 할까요?”

“제가 지시하고 오겠습니다.”

“그럼 커피는 나중에 마시기로 하고, 차를 달라고 전해주세요.”

“예, 회장님.”

유진교가 부속실로 향한 사이 천중명은 보고서를 확인했다.

가장 앞에 있는 것은 지경전자의 신제품이었다.

앞으로 최소 10년은 시장을 독점할 기술이고, 기대 매출이 1백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메모리를 개발했다는 보고였다.

다음은 지경화장품의 신제품에 관한 보고서였다.

보고서를 보던 천중명은 집무실에 들어서는 유진교를 향해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예, 회장님.”

환율과 금리가 요동치는 계열사를 관리하며 많이 힘겨웠던 모양이었다. 최근에 보는 이들은 모두 얼굴이 핼쑥했는데 그중 유진교가 가장 힘겨워 보였다.

그 사이 부속실 직원이 차를 놓아주었다.

“휴식이 필요해 보이시는데요?”

“아직 견딜 만합니다. 임원이 된 이후로 이렇게 보람 있는 날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보고서에 담긴 직원들의 의지를 대할 때면 뿌듯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한계에 도달한 느낌입니다.”

늦은 시간에 보고서를 들고 올라온 이유를 설명하는 것처럼 유진교는 조심스럽게 대꾸를 내놓았다.

감원 안 되지, 오히려 임시직 직원 더 뽑았지.

보고서를 통해 이미 심각한 상황에 놓인 계열사가 있다는 것쯤 천중명도 알고 있었다.

“차드세요.”

천중명은 오미자차를 권한 뒤에 함께 잔을 들었다.

차를 마시고 난 다음이었다.

“우리 계열사 몇 곳도 그렇고, 서민 자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승양 회장이 대부업체를 통해 계속 자금을 풀고는 있는데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돌이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또 엉뚱하게 서민 자금을 뭉텅 지원하라는 지시는 아닐까?

긴장한 기색의 유진교를 향해 천중명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우리에게 향한 외환위기를 중국으로 돌릴 생각입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말뜻을 제대로…….”

“우리를 노린 환율 공격을 중국으로 돌릴 생각입니다. 그 일을 위해 부회장님이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유진교는 아직 정확하게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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