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
307. 늦었어. 진광효. (1)
모상굉은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뭐가 이래?’
사람이 그렇다. 냅다 주먹을 휘둘렀으니 뭔가 반응이 있어야 짜릿하지 않겠나. 그런데 모상굉이 주문을 던질 때마다 상대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 주문을 꿀꺽 삼켜버렸다.
심지어 반격도 없었다. 그저 모상굉이 낸 큰 주문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배고픈 아귀처럼 단박에 반대 주문을 내서 먹어버린 뒤에 끝이었다.
‘이것들이 오늘만 살고 죽겠다는 건가?’
지금 환율 거래를 지켜보는 이들은 한국이 굉장히 여유 있다고 판단하기 쉬웠다. 반대로 따지면 공격하는 모상굉이 오히려 급한 모양새였다.
“선물은 어떻게 됐어?”
“221.20입니다!”
평소라면 고함을 버럭 질렀어야 맞다. 그런데 모상굉은 이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남은 자금은?”
“아직 3조 정도 있습니다.”
그나마 좀 낫다. 선물 쪽은 자금의 여유가 있으니까 이렇게 계속 두들기면 될 테고, 환율은 어떻게 하지?
모상굉은 자꾸만 불안해지는 심정을 누르며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이 정도 베팅했으면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짐작하기에 구완섭은 둘 중 하나였다.
이쪽 자금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초반에 강하게 나와서 기를 꺾으려는 것이거나 아니면 정말 자금을 확보해놓고 모상굉을 가지고 노는 것, 그 외는 없다.
당장 모니터에 올라와 있는 원·달러 환율이 1,525에 딱 고정되어 있는 게 그 증거였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 이것도 막아봐.”
이를 악문 모상굉은 빠르게 키보드에서 손을 놀렸다.
우리는 자금력이 충분하니까 막을 테면 막아보라는 자신감을 모상굉은 주문을 통해 외칠 생각이었다.
봐라. 모상굉이 세상에 던지는 3천억 원의 베팅을.
누가 봐도 대놓고 하는 공격이었는데 이 정도까지 와서 감출 것도 없었다.
타다다닥! 타닥!
3천억 원짜리 주문을 넣은 그가 흥미로운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본 직후였다. 세상에! 6천억 원의 반대 주문이 올라와 그가 던진 회심의 한 방을 덮쳤다.
‘뭐야? 더 없어? 이게 다야?’
모니터에 올라온 주문은 함께 보고 있을 전 세계의 헤지펀드들과 딜러들 앞에서 그렇게 모상굉을 약 올리고 있었다.
기가 꺾이면, 수량에서 밀리는 꼴을 보이면 모상굉이 오히려 헤지펀드들의 먹잇감이 된다. 모니터에 올라온 구완섭의 주문에 십억 원에서 몇백억 원 단위의 주문이 달라붙는 것을 본 모상굉은 마음이 급했다.
어디 누가 죽나 보자!
너희가 가진 자금 규모를 모두 알고 있다니까!
지경그룹의 계열사 돈을 이용해서 달려들면 그게 오히려 독이 될 테니까 끝까지 가보자고!
타다다닥! 타다다닥!
모상굉은 과감하게 1조 원의 베팅을 넣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모니터에 당장 반대 주문은 나오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 게!”
그의 혼잣말이 흘러나온 직후였다.
섬뜩하게도 2조 원의 반대 주문이 올라왔다.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이런 주문을 낼 수 있을까?
자금 규모를 알고 있는데? 아닌가? 뭔가 더 있었나?
‘이 정도밖에 안 돼? 그렇다면 실망스러운데?’
그 순간, 엉뚱하게도 모상굉은 영화에서 보았던 후드를 깊게 눌러쓴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렇게 마법사로 변한 구완섭이 거대한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쏟아내서는 멀리 홍콩에 있는 모상굉의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그만둬야 돼! 손해를 보더라도 빠져나와야 해!’
딜러의 본능이 전해주는 본능에 모상굉이 귀를 기울일 때였다.
“자금이 필요합니다!”
황당한 요구가 선물팀에서 터져 나왔다.
“3조 원이 있다고 했잖아!”
“저쪽이 미쳤나 봅니다! 선물지수를 222.05까지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빠져나오든가, 자금을 더 넣어서 버티든가 해야 합니다!”
모상굉은 오늘 두 번째로 목덜미에서 시작한 소름이 볼과 이마를 타고 머리칼로 치솟았다.
여기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팀장님! 자금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끝내야 한다!
대신 새로 받은 40조 원에서 10조 원의 손실을 봐야 하고, 전 세계의 헤지펀드들과 금융사, 개인투자자들에게 모상굉이 밀렸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손을 터는 게 맞다.
40조 원이 누구 돈이게?
진광효의 벌어진 앞니를 떠올린 모상굉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0조 원짜리 물고기 밥이라고 들어봤어?
산 채로 고기 분쇄기에 다리부터 넣거든. 그걸 바로 저기 호수에 뿌리면 물고기들이 신나서 달려들지.
“3조 원을 더 보내줄 테니까 일단 지켜! 절대 포지션 청산하면 안 돼. 얼마까지 버틸 수 있어?”
지금 빠져나와도 죽고, 버티다가 완전히 망쳐도 죽는다.
그렇다면 버티기라도 해 보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3조 원이면 224.60까지 버팁니다!”
“견뎌! 무조건 버텨!”
모상굉은 선물 계좌로 3조 원을 옮겨주었다. 무서웠다. 계좌를 선택하고 금액을 입력하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는 무엇보다 두려웠다.
“구완섭, 이 지독한 인간아!”
타다다닥! 타다다닥!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불안한 심정을 털어내기 위해 모상굉은 미쳐버린 눈빛으로 무려 2조 원의 주문을 찍어 넣었다.
“아……!”
이번은 정말 모상굉의 비명이 입 밖으로 나왔다.
마법사 구완섭이 3조 원의 주문을 바로 내놓아서 그랬다.
**
전지곤은 독거미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필드에서 직접 쌓은 실력과 이명선이 지닌 특별한 감각을 인정해서 그랬다.
“과장님! 230까지요! 단숨에 가야 해요!”
“알았어!”
타다다다닥! 타다다다닥!
전지곤의 손이 무섭게 움직이며 주문을 찍어 넣었고, 대리 두 명은 이명선의 지시에 따른 옵션 포지션을 정하느라 허덕댔다.
전지곤은 냉정한 사람이라 도박 따위 하지 않는다.
“주문을 봐서는 아예 아래로 정해놓은 포지션까지 단숨에 밀어붙일 것 같아요.”
오늘 오전에 나온 매도 주문을 보며 이명선이 내놓은 의견이 시작이었다. 선물포지션을 지키던 전지곤은 퍼뜩 깨달은 게 있었다. 이명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주문을 넣으며 전지곤이 물었고,
“저 같으면 아예 222까지 올릴 거예요. 그럼 반응이 확실하거든요. 저쪽은 하방 216 근처에 포지션을 잡았으니까 누가 먼저 원하는 자리를 찍느냐의 싸움이거든요. 이대로 가면 결국 당해요.”
쫓기다가 당하느니 아예 목을 조르자?
잠시 고민했던 전지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포지션은 이 과장이 정해! 마음 놓고 달려들어서 독거미 실력 보여줘! 너희도 이 과장 지시에 옵션 따라가고!”
그렇게 시작된 싸움이었다.
“물량이 너무 나오는데요?”
겁먹은 김서언의 질문이 터진 직후에,
“준비하세요! 단숨에 225까지 밀어 올릴 거예요! 아까 주문이 주춤했거든요! 오래 끌면 우리가 당해요. 바로 내려오더라도 225까지 갔다 와야 해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감한 이명선의 지시가 내려왔다.
‘과장님! 이러다가 우리 털릴 수도 있습니다. 225까지 가면 우리가 가진 자금을 목까지 사용해야 합니다.’
김서언이 겁에 질린 얼굴로 시선을 돌렸을 때,
“뭐해! 이 과장 지시 못 들었어!”
전지곤의 고함이 버럭 터져 나왔다.
“이 과장! 올라갈 타이밍 알려줘!”
“준비하세요!”
타다다다닥! 타다다다닥! 타다다다다닥!
스위트룸의 거실에 키보드 입력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포지션별로 주문량을 찍어 놓은 뒤에 줄줄이 엔터키만 입력하면 그야말로 주문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다.
“김 대리님! 옵션 콜에 5백억 원씩 넣으세요!”
“30초면 다 됩니다!”
타다다닥! 타다다다닥!
“과장님! 선물 224.60이 고비예요!”
“내가 거기 맡을 테니까 그 위로는 이 과장이 반응 보면서 찔러!”
타다다닥! 타타타타닥!
“이 과장님! 옵션 콜 포지션 확보했습니다!”
“다들 준비하세요!”
타다다닥! 타다닥!
그 바쁜 와중에 이명선은 흘기듯이 모니터 곳곳의 데이터를 살폈다.
“저쪽에서 주문이 나올 거예요!”
주문? 무슨 주문? 매도 주문이라면 지금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쏟아지고 있는데?
김서언이 풋옵션을 방어하느라 바쁘게 손가락을 누를 때였다.
[5,000]
엄청난 선물 매도 주문이 쏟아졌다.
‘뭐야? 아예 죽자는 거야?’
김서언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이에요! 올려요! 225까지! 지금 아니면 기회 없어요!”
이명선의 날카로운 지시가 떨어졌다.
타다다닥! 타다다다다닥! 타다다닥!
미친 듯한 매수주문이 매도 주문을 삼켰고, 선물지수를 위로 쭉 끌어올렸다.
“우와-아!”
김서언은 짜릿함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포지션별로 줄줄이 걸려 있는 매도 주문을 매수주문이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며 선물지수를 단박에 끌어올렸고, 그 덕분에 그래프로 표시된 차트에서 선물지수선이 60일 이동평균선을 뚫고서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어서 그랬다.
**
모상굉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안 돼!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의 책상 앞에서 터져 나온 고함 때문이었다.
콰드등!
의자가 넘어지도록 급하게 몸을 일으킨 모상굉이 달려갔을 때 차트에 올라온 선물지수선은 60일 이동평균선을 뚫고 올라선 뒤에 배가 잔뜩 부른 뱀처럼 천천히 고개를 떨구는 상태였다.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됐어?”
그의 질문에 답은 없었다. 비명을 질렀던 딜러는 멍한 얼굴로 모니터만 바라보았고, 그 옆의 다른 선물 팀원도 표정은 비슷했다.
“비켜봐!”
모상굉은 거칠게 팀원을 밀쳐내고 마우스를 눌렀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털렸다. 거래증거금을 깨끗하게 털려서 선물 계좌와 옵션 계좌에 남은 돈은 없었다.
“어어?”
그리고 잔인하게도 그 직후에 환율을 보조하던 팀원의 입에서 놀란 소리가 나왔다. 책상의 모니터를 향해 움직이는 모상굉은 울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불안해서 그랬다.
모상굉은 빠르게 본인 자리의 모니터를 확인했다.
“뭐, 뭐, 뭐야?”
그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원·달러 환율이 1,470을 찍은 뒤에 1,525에 돌아와 있었다.
“우리! 우리 마진콜은?”
레버리지를 10배나 사용했다.
이익도 10배, 대신 손실도 10배.
팀원들의 대답이 없는 것을 느낀 모상굉이 두려움 가득한 손짓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선물과 환율에 베팅했던 돈이 단숨에 모두 털리다니.
콰다다-당! 철퍼덕!
웃기는 모습이었다.
아까 의자가 넘어졌던 것을 잊어버린 모상굉이 책상 앞에 앉으려다가 그대로 뒤로 넘어졌으니 평소라며 서로 낄낄댔을 모습이었다. 그러나 바닥에 넋이 나간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모상굉과 그걸 지켜보는 팀원들 누구도 웃거나 움직이지 못했다.
**
모니터를 보던 강다희가 최근 보름 사이에 가장 예쁘게 웃었다.
[1,004] [1,004] [1,004]
연속 세 번의 주문이었다.
봤지? 저쪽 다 털린 것 같다.
우리 배 터졌어.
모니터를 향해 상큼하게 웃어준 강다희가 이어셋을 귀에 걸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떻게 됐어? 먹었지?”
세상 참, 강다희의 저 깜찍한 목소리는 확실히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종류였다.
“우리? 우리는 죽여줬지! 이번 달 우리 팀원들 보너스가 대략 천억 원 근처일걸?”
팀원들이 진짜야, 뻥이야, 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강다희의 무서운 눈을 보고는 얼른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 음성에 속은 직원들 여러 명이 경을 쳤으니까 뭐.
“이제 믿겠어?”
상대의 말을 들은 강다희가 재미있다는 투로 까르르 웃었다. TV에 방영되었던 애니메이션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음성의 주인공처럼 맑고 투명한 웃음이었다.
이럴 때 고개 돌리면 상상했던 그림 다 깨지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 몸서리를 치게 된다. 독한 눈빛의 강다희는 그 정도로 무섭다.
“다음 작업은 풀베팅. 콜?”
상대의 답을 들은 강다희가 또 까르르 웃은 뒤에 통화를 마쳤다.
“아! 오늘도 저녁은 추어탕!”
딜링팀의 오늘 저녁 메뉴는 모두 추어탕일 게 분명했다. 징크스라는 게 있어서 강다희가 어제 먹고 나서 이렇게 큰 건이 터졌다면 당분간은 그 메뉴를 쭉 밀고 나간다. 늘 불확실하고 불안한 거래를 책임지는 직원들의 간절함이 때론 그렇게 엉뚱하게 나오곤 해서 그렇다.
**
스위트룸 거실은 광란의 현장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전지곤이 달려가 이명선과 양손을 높게 들어 마주쳤고,
“우와-아! 해냈어요!”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대리 둘과 막내 사원인 박대교까지 번갈아 하이파이브를 나누면서 괴성을 질러댔다.
미칠 일이다.
어제 포지션을 설정한 것을 포함해 오늘 거래로 올린 수익이 무려 11조 원을 넘는다.
“이 과장. 대단했어.”
“아니에요, 과장님. 모두 과장님께서 마음껏 해보라고 배려해주신 덕분입니다.”
대리 둘과 박대교가, 갑자기 분위기가 왜 저렇게 진지해?, 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전지곤은 전에 없이 부드러운 미소로 이명선을 칭찬했다.
뭐 워낙 큰 수익이 났으니까.
“후! 아직 거래 안 끝났으니까 방심하지 말고. 박대교! 커피 부탁해.”
전지곤의 지시에 다들 자리에 앉았고, 박대교는 커피를 준비했다.
가만? 11조 원 수익이 이대로 굳으면 얼마를 받는 거지?
‘캑!’
커피를 준비하던 박 대교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물론 거래가 모두 끝나봐야 하는 일이지만, 오늘만 계산하면 막내인 박 대교가 받는 인센티브가 1백억 원이어서 그랬다.
‘파생계의 독거미 만세!’
커피를 타며 박대교는 바보처럼 울기 직전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