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
306. 타고난 건가? (2)
급격하게 오른 달러가 목을 조르고, 직장을 잃은 이들이 빤히 내려다보일 텐데도 옥상에서 바라보는 저녁 하늘은 행복했던 날과 같은 붉은빛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왔어. 아무렴 눈알이나 파겠다고 덤비는 시커먼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을까?”
커피를 담은 종이컵을 건넨 곽대출이 킬킬거리는 웃음과 함께 천중명의 옆에 앉았다.
“뭐냐? 많이 피곤해 보인다?”
“죽겠습니다.”
“내가 너, 코피 흘릴 때 알아봤다.”
“아, 그건 좀!”
둘이서 헛소리를 주고받다가 함께 웃음을 터트렸고, 또 비슷하게 커피를 마셨다.
“조마조마합니다.”
그런 뒤에 곽대출이 조심스럽게 걱정스러운 심정을 전했다.
“저 하늘에 신이란 존재가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너나 나를 이렇게 엉뚱한 자리에 앉혔을 때는 뭔가 계산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순간을 해결하라는 의미? 그런 거.”
“만약 회장님이 나쁜 마음을 먹고 욕심을 차렸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가장 먼저 너는 여기 없을 테고. 그 뒤에 돈, 돈 하다가 결국 윤성일처럼 되지 않았겠냐?”
곽대출은 종이컵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윤성일 회장이 1심 재판에서 30년 구형받았다는 건 들으셨습니까?”
“메모에 올라왔더라.”
곽대출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판사의 선고와 항소, 상고가 남았지만, 이미 기반을 잃은 윤성일은 최소 20년 이상의 중형이 불가피해 보였다. 하필이면 경제 위기 상황이라 여론마저 살벌해서 이대로라면 그는 미국에 수감된 윤세계를 살아서 보기는 어려웠다.
“돈이 뭔지, 왜들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곽대출의 말을 들은 천중명은 힐끔 시선을 주었다.
“왜? 뭐?”
“그래. 그래야 너답지. 조마조마하다느니, 돈이 어쩌니 하면 이상하잖아?”
“그런데 이 회장님이…….”
닫혀 있는 옥상문을 확인한 곽대출이 시선을 다시 가져왔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쇼더앤톨먼에서 홍콩의 모상굉 계좌로 40조 원의 자금을 입금했습니다.
“짐작했던 대로네요. 계좌는 확인하셨나요?”
- 완벽하게 파악했습니다.
“됐네요. 계속 감시해주세요.”
통화를 마친 천중명을 곽대출이 궁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진광효가 홍콩에 건네려던 현금 40조 원과 비트코인 20조 원어치를 다른 곳으로 돌려놨거든.”
“우와.”
“오늘만 16조 원을 부어서 포지션을 잡아놓고 내일 우리 환율과 선물시장을 주저앉히려 했던 거지.”
“하여간 더러운 새끼. 뭐 돈을 빼냈다니까 그나마 좀 낫습니다.”
나직하게 욕을 뱉어낸 곽대출이 안심된다는 얼굴로 어깨를 들썩였다.
“돈을 뺏겼다고 손 놓고 있다면 진광효가 아닌 거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노리고 대략 16조 원을 베팅해 놓았는데 후속 자금을 뺏긴 꼴이거든. 그대로 있으면 오늘 베팅한 16조 원이 없어질 수 있는데 너라면 가만있겠냐?”
질문을 받은 곽대출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삼합회 총재라고 해도 당장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그것도 내일까지 하루도 안 남았는데?”
“구해야 한다면 부탁할 곳은 하나밖에 없지.”
천중명의 오묘한 눈빛을 받은 곽대출이 뜬금없이 담배를 꺼내 내밀었다. 진광효가 돈을 부탁할 곳을 짐작 못 하겠다는 의미였는데 아무튼 나쁘지 않았다.
둘이서 불을 붙인 다음이었다.
“거대 자본에게 손을 내밀겠지.”
“아!”
곽대출이 나직하게 탄성을 뱉어냈다.
“일본의 거래소에서 비트코인 20조 원, 홍콩의 사설거래소에서 4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사라졌는데 보도 한 번 없었다.”
“그러네?”
“그게 터지면 곤란한 인간들이 많다는 거지.”
“하여간 구린 것들하고는! 가만, 그럼 내일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진광효가 40조 원을 빌려서 달려들면 곤란한 거 아닙니까?”
“진광효가 도와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반문조차 못 하는 곽대출을 보며 천중명은 픽 웃었다.
**
송문철은 오늘 하루 거래를 정리한 보고서를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1백조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으로 환율시장과 선물시장을 지키고는 있지만, 거대 자본의 자금 수준에는 비할 바가 아니어서 당장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오늘까지 마진과 환율 방어에 이미 가진 자금의 절반을 사용했는데 내일은 또 어떻게 하지? 구완섭이 7조 원을 벌었다고 하더라도 저쪽에서 작정하고 들어오면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형편 어려운 집의 가장처럼 송문철은 보고서를 들여다보며 돈 걱정에 얼굴을 펴지 못할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책상에 둔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액정을 확인한 그는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송문철입니다, 회장님.”
- 외환거래팀에 전하고 싶은 내용이 있는데 메모 가능한가요?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천중명이 직접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펜을 든 송문철은 휴대 전화기에서 넘어올 지시에 집중했다.
“예. 예. 적었습니다. 예. 예에?”
천중명이 불러주는 내용을 받아적던 송문철이 놀란 눈으로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
저녁을 먹은 구완섭은 팀원들과 함께 스위트룸의 거실에서 모니터를 감시하며 시간을 보냈다. 낮에 치열한 공방을 벌인 뒤여서 그런지 저녁 이후로는 그럭저럭 평온한 거래가 이어지는 게 전부였다.
딩동댕동.
“누구지?”
올 사람이라고는 최상중 상무밖에 없어서 복장을 살핀 구완섭이 빠르게 문으로 향했다.
“누구십니까?”
“나다.”
뒤를 향해 ‘회장님! 회장님!’ 하는 입 모양을 보인 구완섭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쉬고 있는데 안됐다. 여기.”
들어선 송문철은 인원수에 맞춘 커피와 간식이 될 만한 빵을 구완섭에게 건네주었다.
“이리 앉으십시오.”
“저녁은?”
“먹었습니다.”
1인용 의자에 앉은 송문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을 둘러보았다.
“조용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거실 베란다에 티 테이블이 있습니다.”
“아, 저기? 그래 잠깐 저기에서 이야기를 나눌까?”
구완섭이 베란다로 통하는 커다란 유리문을 열었고, 막내 직원이 커피 두 잔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테라스를 스치는 저녁 바람은 마주한 현실처럼 후덥지근하고 불쾌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구완섭은 송문철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이 그래도 좋았다.
“회장님도 그러시고, 내 판단에도 내일 저쪽에서 대대적인 주문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펀드매니저들에게 전화 돌리고 있는데 당장 도움을 청하면 약세를 보이는 거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구완섭의 말을 들은 송문철이 안쪽 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내 테이블 앞에 놓았다.
“회장님께서 마련해 주신 계좌다. 그 계좌에 있는 자금을 내일 모두 소진해도 좋으니 상황을 역전시키라는 지시도 주셨다.”
구완섭은 놀라는 눈으로 테이블에 놓인 메모지를 들었다.
“망진광효? 계좌 이름이 독특합니다.”
“40조 원이 들어있다는 말씀도 있으셨다.”
메모지에서 천천히 고개를 드는 구완섭의 눈이 무척이나 빛나고 있었다.
“내일 상황을 반전시켜, 마법사. 회장님이 주신 그 계좌를 이용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송문철이 대견하다는 눈으로 웃었다.
**
홍콩의 모상굉이 관리하는 계좌에 40조 원이 입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진광효는 그나마 기분이 좀 풀렸다. 그는 수시로 똑같은 구조의 방을 옮기는데 저녁을 먹은 뒤로는 3층의 오른쪽에 머물렀다.
“앉아.”
그는 조직원이 데려온 변호사와 컴퓨터 전문가를 향해 고개로 테이블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내용은 들었지?”
“예, 총재님.”
진광효의 질문에 변호사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답을 건넸다.
“법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 같거든. 비트코인도 그렇고. 그러니 그놈들이 넣어둔 망진광효라는 계좌를 우리도 해킹할 생각이거든. 그걸 옮겨놓을 깨끗한 계좌, 법에 걸리지 않을 계좌를 만들어.”
“말씀하신 망…….”
진광효 앞에서 ‘망진광효’란 이름을 내려던 변호사가 움찔하며 뒷말을 삼켰다.
“말씀하신 계좌가 홍콩에 있으니 새로 옮길 계좌도 홍콩으로 하겠습니다.”
“그래. 비트코인까지 넣을 테니까 사설거래소 계좌도 하나 만들고.”
지시를 마친 진광효가 답도 듣지 않은 채 고갯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두 사람이 조직원을 따라 밖으로 나간 뒤였다. 진광효는 흐뭇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홍콩과 일본의 거래소에서 40조 원을 돌려받을 생각이고, 다시 천중명이 해킹해서 가져간 돈도 찾아온다는 멋진 계획이었다.
내일은 또 모상굉이 거래에서 수익을 내줄 테니 이거야말로 양손에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토끼를 든 것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렇더라도 만만치 않은 인간인 것만은 인정해야겠군.’
진광효는 비트코인 거래소와 채굴장을 멈춰달라던 천중명의 요구를 떠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때 확인했겠지?
해킹 계획을 세워놓고서 사설거래소와 채굴장을 멈춰달라는 핑계로 진광효의 계좌를 확인한 것이 말이다.
‘그놈을 수하로 거느리면?’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던 진광효가 고개를 저었다.
천중명과 같은 남자는 절대 고개 숙이지 않는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을 잘라 물고기 밥으로 뿌려주는 게 가장 현명한 처리방법이었다.
“내일 저녁에 보자.”
숨을 내쉰 진광효가 고개를 돌려 정원을 보았다.
내일 승기를 확실히 잡으면 우선 양서평을 불러 고기밥으로 줄 생각이었다. 2인자가 없어지면 당장 아쉬울 일이 많겠지만, 천중명을 위해 움직이는 양서평은 아니란 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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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부터 보도 방송은 암울한 경제 상황에 대한 보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정부는 환율시장에 직접 개입한 이후 원화 가치가 더 떨어지는 최악의 사태를 막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는 어떨지 경제부 문진주 기자가 전해드리겠습니다.]
[정부의 개입 이후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원·달러 환율이 1,525선에서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앞으로 1주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즉각 대응하겠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문진주 기자. 우리 경제가 사실 이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았는데 왜 이 지경까지 몰린 겁니까?]
주식 현황판과 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이들의 뒷모습이 화면에 올라왔다.
[국내외 경제전문가들은 한결같이 탐욕적인 헤지펀드의 공격이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다만, 채권 매도와 환율 조작 등이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아직 정확한 주동세력을 밝히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의 멘트가 끝난 뒤에 화면은 앵커를 잡았다.
[다음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지경그룹은 임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내놓은 성금을 복지의 사각지대에 내몰렸던 소외계층을 임시직으로 고용하는 데 사용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화면은 지경그룹 본사 건물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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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좌에 40조 원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모상굉은 흥분을 이기지 못해 지난밤에 잠을 설쳤다.
“구완섭의 마법사 타이틀도 오늘로 끝이네!”
출근한 모상굉은 거래 시작 전에 1회용 컵에 담긴 커피 전문점 커피를 마시는 여유를 즐긴 뒤에 팀원들을 모았다.
“선물시장은 5조 원을 사용해. 시작부터 강하게 밀어붙여. 환율이 흔들리면 헤지펀드와 기관도 우리 쪽으로 붙게 돼 있어. 어제 포지션 정해놓은 것까지 해서 목표는 214.00이다.”
지시를 마친 그는 환율팀으로 시선을 돌렸다.
“10조 원을 레버리지 10배로 환율 마진에 투자한다.”
10조 원을 열 배로 불리면 당연히 1백조 원의 베팅과 같다. 놀란 팀원들을 모상굉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보았다.
“오늘 25조 원을 이용해서 원·달러 환율을 1600선 위로 올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베팅해.”
한국이 버티는 마지노선이 1,600이라는 것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아는 일이어서 모상굉의 짧은 지시는 그렇게 끝났다.
“오늘 끝낸다.”
그의 짧은 각오를 신호로 팀원들이 자리로 돌아갔다.
‘어떻게 할래, 구완섭? 오늘 가진 걸 다 걸어서 버텨? 그래 주면 고맙지.’
한국의 방어 수법이야 이미 눈치챘다.
50조 원은 마진에, 나머지 50조 원은 환율 방어에 사용하고 있었으니 오늘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의 한계는 대략 25조 원쯤 된다.
만약 구완섭이 마진에 걸었던 50조 원을 빼서 환율 방어에 사용하면 헤지펀드들에게 자금이 떨어졌다고 자백하는 것과 같아서 정말 그렇게 해준다면 모상굉은 천문학적인 이익을 얻는다.
“후-.”
모니터를 향해 숨을 길게 내쉰 모상굉은 양손을 문지른 뒤에 차분하게 키보드에 얹었다.
타다닥. 타다다다닥.
오늘 하루에만 40조 원이 걸린 싸움이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
모니터에 올라오는 주문을 확인하던 강다희가. “어쭈?”하는 한 마디와 함께 눈꼬리를 올렸다.
“정 대리! 그쪽에서 받아! 절대 1,530까지 못 올라가게 때려!”
지시를 내리면서도 강다희는 키보드에 올린 손을 멈추지 않았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주문이야 숫자를 찍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강다희는 당장 주문이 올라올 때마다 들어가는 자금을 계산하고, 한 편으로는 남는 자금이 얼마인지도 체크해야 했다.
“뭐야?”
천하의 강다희가 놀란 소리를 지를 정도로 상대방의 주문은 막무가내였다.
거래를 하다 보면, 거기에 강다희처럼 강단 있고, 감각까지 갖춘 딜러라면, 주문 숫자와 방법을 통해 상대방의 의도와 자금력을 짐작한다.
‘이것들이……?’
강다희의 손이 멈칫하는 순간에 환율은 곧장 1,529를 찍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대로 죽는 한이 있어도 남은 것을 다 털어 넣어 지금 자리를 지킬지 아니면 1,530선 위로 밀리더라도 잠시 지켜볼지.
강다희는 그 짧은 순간에 천중명을 떠올렸다.
지키라고 들었다.
젊은 그룹 회장은 밀리지 말라고도 당부했었다.
‘그래! 해보자!’
강다희가 이를 악무는 순간이었다.
“어?”
짐작도 못 한 주문이 쏟아지며 환율을 단박에 1,523까지 끌어내렸다.
‘이건 또 뭐야?’
강다희가 멍하니 주문을 바라볼 때였다.
[913] [1,004]
내가 해결한다. 안심하고 지켜봐.
모니터에 그녀만 알 수 있는 특별한 주문이 연달아 올라온 뒤에 함께 죽자는 듯한 엄청난 반대 주문이 폭탄처럼 쏟아졌다.
“구 팀장님? 도대체 무슨 마법을 쓰는 거예요?”
강다희는 기가 막힌 웃음과 함께 혼잣말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