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
305. 타고난 건가? (1)
하루 만에 20조 원에서 4조 원을 털린 모상굉은 모니터를 향해 이를 악물었다.
‘이것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모상굉은 진광효의 지시에 따라 거래를 시작했다.
처음 출발이 20조 원, 내일까지 40조 원을 더 보내준다는 약속도 받았다.
한국을 주저앉혀라.
버둥대는 한국의 외환과 파생시장을 확실히 무너트려라.
진광효가 원하는 바는 분명했다.
지시를 완벽하게 수행하면 모상굉은 상상도 못 했던 보너스를 챙기고, 세계 금융시장에 이름 석 자를 분명하게 알리게 된다.
밀려드는 스카우트 제의, 엄청난 연봉, 그것들이 이뤄줄 화려한 삶을 모상굉이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림은 다 그려졌다.
비록 어제 4조 원의 손실이 있었다고 하나 모상굉에게는 계좌에 남은 16조 원과 내일 들어올 40조 원이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이 상황에서 무려 16조 원을 퍼부었는데도 아직 진광효를 만족하게 할 실적을 얻지 못했다.
‘구완섭, 이 독한 인간!’
구완섭을 떠올린 모상굉이 고약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반짝이는 머리,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로운 판단, 거기에 사기꾼 기질마저 지닌 그는 미국에서 얻은 인맥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악착스럽게 달려들어서 환율을 버티고 있으니 모상굉은 당장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내일 보자, 내일!’
그가 굴리는 자금의 규모쯤 빤히 안다.
내일 40조 원이 들어오면 그는 끝이다.
그건 그렇고.
모상굉은 오른쪽의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막말로 환율이야 구완섭이라는 독사가 있어서 어찌 못한다고 치자.
“선물지수는 왜 여태 그 자리야! 내일 40조 원이 더 들어온다는데 뭘 미적거려! 눌러! 누르라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을 떨쳐내기 위해 모상굉은 고함을 버럭 질렀다.
“3조 원을 퍼붓고 219를 못 무너트리면 어떻게 해! 분위기를 만들면 된다고 몇 번을 말해? 대세가 하방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라니까! 한 번에 가! 한 번에! 계좌에 얼마나 남았어?”
“2조 원 있습니다.”
“이 멍청한 밥벌레들아!”
꽥꽥 고함을 지른 모상굉은 독오른 개처럼 입술을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남은 거 모두 털어 넣어. 달러 강세에 환율 파트 남은 돈을 모조리 붓고 그 기회를 이용해 선물을 하방으로 밀어! 정 안 되면 내일 승부를 낼 테니까 일단 가진 거로 포지션만 완벽하게 차지하라고!”
지시를 마친 모상굉이 숫자가 바삐 움직이는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마법사니 뭐니 하는 것도 이제 끝이다!’
당연히 같은 바닥에 있어서 모상굉은 구완섭을 잘 안다.
세계적인 금융 회사들이 구완섭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사방을 들쑤시고 다녔으니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디 이번에 끝장을 보자, 구완섭!’
정말 화가 나는 게 뭐냐면, 구완섭은 모상굉을 아예 경쟁자로도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모상굉이 달려드는 것도 모를 테고, 알게 되더라도 기가 막힌 웃음을 짓고 말 게 분명했다.
“더 밀어붙여!”
모상굉의 고함이 좀 더 독하게 터져 나왔다.
**
모니터를 지켜보며 샌드위치와 김밥으로 점심도 해결했고, 물과 커피를 마셨다.
“이명선 과장은 정말 혼자 거래를 익혔나?”
“남부증권 딜링룸의 박 팀장님에게서 기초를 배웠습니다.”
“얼마나?”
“2주간 특별 교육이었습니다.”
이명선의 답을 들은 전지곤이 기막힌 심정을 웃음으로 쏟아냈다.
“타고난 건가?”
그가 혼잣말을 뱉은 직후였다.
타다닥!
이명선이 바로 키보드에 주문을 입력했고, 연달아 전지곤이 달려들었다.
“김 대리님! 옵션 받아주세요!”
“네!”
느닷없이 밀려드는 주문이었다.
5일 이평선 위로 올라온 선물지수 선을 다시 아래로 보내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주문을 통해 분명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이 과장! 하방에서부터 받쳐!”
“네! 김 대리님. 옵션 콜 부탁해요!”
“예!”
파생거래팀의 오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모니터를 지켜보던 천중명은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을 바꿨다.
선물지수를 누르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보이더니 곧바로 환율 시장에도 대대적인 주문이 쏟아져 나왔다.
이 주문을 전 세계의 금융회사 담당자와 헤지펀드들이 지켜본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든 이겨라. 그러면 철저하게 승자 편에 붙어서 이익을 먹어주마, 라는 심정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앞으로의 방향을 어떻게 그려내는가에 따라 추세가 결정되고, 그 추세에 따라 헤지펀드들이 방향을 정하며, 그 이후로 모든 것이 끝난다.
모니터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공방이 이뤄지고 있었다. 저렇게 퍼부었는데 후속 자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까?
“이쯤이면 대책을 세워야지? 안 그러면 너무 실망스럽잖아, 진광효?”
혼잣말을 뱉어낸 천중명은 옅게 웃었다.
**
휴대 전화기를 통해 보고를 들은 진광효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한 번, 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게 말해 봐.”
- 일본의 거래소에 있던 비트코인과 홍콩의 거래소에 있던 자금이 모두 출금된 것으로 나옵니다.
“내가 송금지시를 내렸다. 홍콩의 모상굉에게 40조 원을 보내라고 지시했지.”
마치 단어 하나씩을 씹어서 건네듯이 진광효는 이를 꽉 깨문 상태에서 말을 뱉어냈다.
- 총재님. 송금된 계좌 이름이…….
상대는 차마 이름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처럼 뜸을 들였다.
“지금 당장 입이 찢겨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 돈을 받은 계좌의 이름을 빨리 말하는 게 좋아.”
- 망진광효로 되어 있습니다.
“흥! 흐흥! 흐흐흥!”
폐에서 터진 바람이 코를 거쳐 나오는 것처럼 진광효의 웃음은 섬뜩했다.
“죽은 진광효라고? 어떤 미친놈들이 감히 나를! 이 진광효를 가지고 놀아?”
창을 향해 서 있던 진광효가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일본과 홍콩의 거래소에서는 내 돈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 현재 방법을 논의하고 있습니다만…….
“그 빌어먹을 방법을 여태 논의해서 어떻게 하겠다고? 내 돈이 없어졌다니까! 내 돈이!”
- 원금을 상환하고 싶어도 비트코인의 수량이 부족해서 해킹당했다는 발표나 신고조차 어렵다는 의견이었습니다.
“흐-하아.”
진광효가 분을 누르는 것처럼 억눌린 숨소리를 뱉어냈다.
“내일 오전 9시까지 내 돈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으면 거래소의 대표와 임원들의 모가지를 잘라 침대에 처박아 놓을 거라고 전해. 명심해. 여기 시간으로 내일 오전 9시까지다.”
- 예, 총재님.
통화를 마친 진광효는 창을 짚은 채 자꾸만 고개를 흔들었다.
불길하더라니!
완벽한 계획인데도 어쩐지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더라니!
‘한국의 그 젊은 회장이?’
느닷없이 천중명을 떠올린 진광효의 눈이 한순간 번쩍했다.
“크하하! 크하하하!”
그런 뒤에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았어! 그래! 그 인간 말고는 이런 짓을 할 놈이 없지! 감히 이 삼합회 총재인 내 돈에 손을 대는 배짱이라니! 크하하하!”
미친 사람처럼 웃던 진광효가 완전히 실성한 모양으로 표정을 날카롭게 바꿨다.
내일 한국을 공격할 40조 원을 막았다?
지금은 행복하겠지, 젊은 회장?
네놈이 한 짓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냥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이성의 끈을 겨우 붙든 진광효는 휴대 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어색한 중국어 답이 건너왔다.
“아무래도 젊은 회장에게 멋지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소. 내일 그의 목을 조르려고 준비했던 자금 40조 원을 날렸는데 알고 계시오?”
-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보고받았습니다. 짐작하시는 게 아마 맞을 겁니다. 황성규라고 CIA 출신의 인물이 그의 팀원들과 함께 천 회장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젊은 회장은 내가 돈줄이 막혔을 거라고 안심하고 있을 텐데 이럴 때 총알이 마련되면 이번엔 내가 그의 머리를 날릴 수 있지 않겠소?”
-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지정하는 계좌로 40조 원을 송금해 드리겠습니다.
“크하하! 크하하하!”
휴대 전화기를 붙든 채로 진광효가 거칠게 웃었다.
“내일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비명이 터져 나올 테니 젊은 회장에게는 좋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싶소.”
-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겠습니다.
통화는 만족스럽게 끝났다.
휴대 전화기를 잠시 보았던 진광효는 정원을 바라보며 기가 막힌 듯 고개를 저었다.
“흠. 거대 자본이란 놈들도 대단하긴 하군. 위기를 만들어놓고 결정적인 한 방은 내가 만들어라, 이거지? 성공하면 한국을 먹는 것으로 보상받고, 실패하면 내가 저지른 범죄가 될 테니까.”
복잡할 것 없다.
우선 젊은 회장 놈을 무너트린 뒤에 테드 케블린이란 인간을 앞에 두고서 삼합회 총재를 이용하려 했던 것에 대해 보상을 받으면 될 일이다.
“홍콩의 모상굉에게 연락해서 내일 계획에 차질 없도록 철저하게 준비하라고 전해.”
“예, 총재님.”
내내 그를 괴롭히던 불안함이 계좌 해킹이었다고 생각하자 진광효는 오히려 후련한 심정이었다.
**
강다희는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길고 길었던 하루가 끝났다.
그녀는 총 50조 원의 계좌에서 어제 7조 원, 오늘 17조 원을 쏟아부었고, 환율을 1,525로 지켜냈다.
계좌에 남은 총알이 26조 원으로 줄어든 대신 구완섭이 오늘까지 7조 원 정도를 먹었을 테니 나쁘지 않은 계산이었다.
‘어떻게 할까?’
강다희는 종일 미쳐 날뛴 뒤에 잠잠해진 모니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들이 동원하는 최고 금액이 대략 5백조 원이라고 들었으니까, 부동산, 선물에 투자하는 금액을 제하더라도 최소 2백조 원은 환율 공격에 달려든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돈을 한 번에 쏟아붓지는 않을 테고 지금처럼 당분간은 불만 지를 텐데?
돈이 된다는 확신이 들면 불나방처럼 헤지펀드들과 개인투자자들이 한국의 환율 시장에 달려들 테고 거대 자본은 그 순간에 이빨을 들이댈 게 분명했다.
‘중국인데?’
천중명의 의중은 확실히 알겠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마지막을 장식하려는지는 당장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구완섭과 그녀가 인맥을 동원하더라도 중국이 살찐 먹잇감으로 보이게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렇다.
‘남은 자금에서 절반쯤 헐더라도 오늘 아예 환율을 아래로 끌어내려?’
강다희가 모니터를 날카롭게 노려볼 때였다.
[111] [124] [111]
환율 거래창에 세 개의 주문이 연달아 떠올랐다.
오늘은 충분히 먹었다.
저쪽도 더는 무리하지 않을 테니 내일 보자.
구완섭이 보낸 사인을 확인한 강다희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급한 불은 끈 것 같으니까 반씩 나눠서 식사해.”
“팀장님은 어떻게 하실 건데요?”
“나? 나야 추어탕이지.”
답을 마친 강다희는 이어셋을 귀에 걸었다.
나중을 위해 해외 헤지펀드 매니저들에게 오늘 실적을 자랑할 생각이었다.
**
곽대출은 눈에 띄게 핼쑥했다.
하나같이 다급한 형편을 호소하는 기업들의 신청서를 미룰 수가 없으니 어쩌겠나, 밥도 대강 때우고 잠마저 줄여가며 매달릴 수밖에.
“장 대리. 내가 지금 확인하는 회사, 태양광, 그래! 이 회사 아무래도 이상한데? 기보와 신보, 시에서 받은 자금이 전부 대표이사 가지급으로 나갔잖아!”
구내전화기를 든 곽대출은 담당자에게 궁금한 내용을 빠르게 전했다. 멋지게 변했다, 곽대출.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곽대출은 이제 그런 것도 파악할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 그 부분에 대해서 저도 확인했는데 집을 산 모양입니다. 두 가지를 고민했습니다. 하나는 이대로 묻히기에는 기술력이 워낙 뛰어나고……. 어?
“뭐야? 말하다 말고 뭐가 어야?”
바로 아래층에 있는 직원이었다.
그가 놀란 소리를 낸 뒤에 구내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소란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데도 말이다.
‘혹시……?’
곽대출은 급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강도가 든 것은 아닐 테고, 삼합회 놈들이 달려들었을까? 아니지! 도깨비 출신 대원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시끌시끌해야지?
곽대출이 바쁘게 움직여 문을 홱 열었을 때였다.
“부딪칠 뻔했다. 어디 가려고 그렇게 바쁘게 나와?”
오랜만에 보는 천중명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