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
302.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 (1)
거래를 지시받아 호텔로 돌아온 구완섭은 예의 또 전화기를 들고서 미국과 영국에서 활동하는 지인들에게 연달아 전화를 돌렸다.
“한국 채권을 인수하려는 쪽은? 당연하지. 지금 뭔가 작업이 들어와서 그렇지 솔직히 한국 채권을 인수해서 문제 될 이유야 없지. 이번에 작업 걸려서 나온 물량인 건 다들 알잖아.”
그는 마치 사무실에서 통화하는 사람처럼 떠들면서 베란다를 향해 움직였다.
“오후에 작업 들어간다니까. 정부발표 봤잖아.”
그렇게 말을 건넨 뒤에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누가 그래? 아무렴 정부에서 개입한다고 발표한 일정을 바꿀 것 같아? 이번 개입은 기관은행을 통하지 않을 수도 있어. 한국도 이제 금융기법은 꽤 앞섰다는 걸 잊지 마!”
그는 해외 딜러들을 꼬드기는 말을 연신 쏟아냈다.
“포지션을 기억해. 숏텀은 달러 강세, 롱텀은 원화 강세야. 내가 볼 때 짧으면 보름, 길어도 한 달이야.”
상대방의 말을 들었는지 구완섭은 고개까지 끄덕였다.
“잠깐만! 정보 들어왔다! 한화로 1조 원 베팅이 5분 뒤라는데? 내 몫까지 들어가! 바로 전화할게!”
스위트룸 거실 창을 보는 팀원들은 그제야 픽 웃었다.
“지금 통화 모두 들었지? 3분 뒤에 달러 매입 들어가. 금액은 1조 원 언저리, 저쪽에서 테스트 베팅 들어오면 바로 그 주문 덮어. 이익을 먹게 놔두고.”
지시를 내리는 구완섭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어서 팀원들이 각자의 컴퓨터에 매달렸고, 구완섭은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내 몫 들어갔어? 얼마?”
그는 테이블에 놓인 담배를 입에 문 뒤에 불을 붙였다.
“그래! 조만간 대규모 베팅이 들어가. 그리고 이건 진짜 너만 알아야 하는데 내가 사인하면 원화 강세로 풀베팅 들어가. 이거 5백조 원짜리 싸움이다. 이 한 번의 거래로 남은 인생 완전히 바뀌는 거지.”
연기를 길게 뱉어낸 구완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행운이니까 절대 놓치지 말자고. 쇼미더머니!”
통화를 마친 구완섭은 재떨이에 담배를 누르며 팀원들을 보았다.
“지금 얼마야?”
“1,501입니다.”
“우리가 달러 강세에 때리면 강 팀장이 알아서 가격을 조절할 거야. 그러니까 일단 달러 강세 쪽으로 10조 원 한도 내에서 밀어. 레버리지는 5배까지.”
아직 구완섭은 창에 있었다.
그는 거실 벽의 중앙에 놓인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이쪽은 이익인지 손해인지만 결정 난다.
‘잘해라, 강다희. 이번엔 올려. 1,525까지 올리는 거다. 그 선까지 단숨에 올려서 미국과 영국의 딜러들을 사로잡아.’
입술을 깨물었던 구완섭이 한순간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려냈다. 조금 전까지 1,501이던 원·달러 환율이 단숨에 1,507까지 오르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구완섭은 다시 광기가 번득이는 눈을 하고 그의 컴퓨터로 움직였다.
본격적인 거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
강다희는 머리를 질끈 묶은 상태로 모니터에 매달려 있었다.
“이대로 들어가! 1,509까지 밀어 올려!”
그녀의 지시에 팀원들이 바쁘게 주문을 몰아넣었다.
“다른 곳에서 주문이 몰리는데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1,520을 찍을 때까지 밀라니까! 오늘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돈을 전부 사용해도 좋으니까 우선 1,520 찍고, 이후에 1,525를 지켜!”
지시를 내리는 순간에도 강다희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보세요?”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그녀는 이어셋으로 전화도 받았다.
“정부가 움직인다는 소문 들었잖아.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물어봐. 우리? 우리야 풀베팅이지!”
타다닥! 타닥! 타타타타탁!
“바쁘니까 끊지? 오늘은 나도 모처럼 보너스 좀 챙겨야지.”
통화를 마친 그녀의 휴대 전화기가 바로 다시 울었다. 강다희는 이어셋의 버튼을 눌렀다.
“거래 때문에 전화한 거면 달러 매수! 정부 개입 같은데?”
그녀는 달랑 두 마디를 남기고 통화를 마쳤다.
원·달러 환율은 그사이 1,514까지 올라 있었다.
“매도 물량이 나옵니다!”
“잡아! 다 잡아버려! 누가 배짱 좋은가로 결정 나는 싸움이니까 밀리지 마!”
타다다닥! 타닥! 타다닥!
강다희는 50조 원이 한도인 계좌에서 단박에 3조 원의 주문을 찍어 넣었다.
“됐다!”
그녀의 주문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불을 본 불나방처럼 달러 매수 주문이 줄줄이 달려들었다.
“그래! 이거지!”
원·달러 환율은 단박에 1,521까지 올랐다.
“이제부터 속도 조절해. 1,525선을 넘을 것 같으면 우리가 잡았던 거 살살 풀어주고, 내려가면 다시 잡아. 아래로 1,523까지, 위로는 1,527 이상 못 올라가게 지켜.”
지시를 마친 강다희는 휴대 전화기에서 번호를 찾아 버튼을 눌렀다.
‘구 팀장님. 난 내 몫 했어요. 우리 팀 보너스까지 확실하게 만들어요.’
구완섭을 떠올렸던 그녀가 표정을 삽시간에 바꾸었다.
“여보세요? 그쪽은 먹었어? 어쩌니? 우리는 오늘 배 터지게 생겼는데? 그러게 왜 내가 주는 정보를 의심해? 다음 거래? 알려주면 따라올 거야?”
세상 깜찍한 음성이 강다희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천호득은 고개를 저으며 TV를 바라보았다.
[지경그룹은 35만 명을 목표로 했던 임시직의 인원을 1백만 명으로 늘렸습니다.]
기가 막히다 못해 코까지 막힐 보도였다.
어쩌려고 이렇게 무모해, 이 사람아?
‘지경그룹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의지를 밝히던 천중명의 모습이 조금 전에 보았던 것처럼 선명했다.
[놀라운 소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모자란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이 현금과 이번 급여를 모두 내놓기로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아.”
천호득은 흔들리는 고개를 TV에 둔 채 기가 막힌 심정을 탄식으로 뱉어냈다.
[이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에 그룹발전본부는 홍보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식적인 답을 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인하지 않는 것을 보면 사실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룹 회장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지경그룹에는 아직 유보금이 꽤 있을 텐데요?]
[주주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피하려는 선택으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후.”
보도를 보던 천호득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더니!”
그는 씁쓸하게 웃은 뒤에 고개를 문으로 돌렸다.
“작은 애야!”
천호득이 밖을 향해 한 마디를 외친 뒤였다.
문이 열리며 송달순이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유진교 부회장에게 오늘 일 마치면 잠시 들르라고…….”
말을 하던 천호득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지 말고 통장에 있는 현금을 모두 유진교 부회장에게 건네줘. 그쪽 계좌번호는 연락해서 알아보고.”
“예, 총수님.”
천호득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보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송달순은 조용하게 물러났다.
**
경력으로나, 레벨, 연륜, 경험, 나이, 그 어떤 면을 들어도 이명선은 전지곤 과장의 상대가 아니었다.
“이 과장! 지금 나오는 매도 주문 모조리 잡아!”
그러나 전지곤은 데리고 왔던 팀원 중 대리 한 명을 그녀에게 맡기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은 중요한 주문을 그녀에게 직접 지시하고 있었다.
타다다닥! 타닥! 타다다닥!
수량도, 포지션이 어디인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또 그걸 이명선은 척척 받아서 주문을 넣었다.
“216.40! 그 자리에 버텨!”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올 때도 있었다.
타다닥! 타닥! 타다다다닥!
김서언은 질렸다.
모니터에 선물매수 주문칸, 포지션별 옵션 주문칸이 빽빽한데 마치 프로게이머처럼 이명선은 그사이를 오가며 기계처럼 숫자를 찍어댔다.
환율이 1,521을 넘어서며 주가가 다시 옴팡 주저앉았고, 당연하게 선물 역시 아래로 고꾸라졌다.
이럴 때 풋에 걸면 배 터져 죽는다.
그걸 왜 지키라고 했을까?
날카롭게 주문을 넣는 전지곤의 지시를 로봇처럼 냉정한 얼굴로 따르는 이명선은 이 사실을 알고서도 이러는 걸까?
“됐어!”
그사이 고꾸라지던 선물지수가 216.45에서 주춤대고 있었다. 하기는 3조 원 넘게 그 자리에 매수 주문을 퍼부어댔으니 오죽하겠나.
말이 좋아 3조 원의 주문이지 이제부터 한 틱의 변동에 25억 원의 손실이나 이익이 생긴다.
“후.”
전지곤의 확신에 찬 고함이 나온 뒤에야 이명선은 길게 숨을 내쉬며 상체를 세웠다.
“고생했어!”
“아니에요.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였다.
뭘 가르치고 뭘 배운 건데?
안민근, 김서언 대리는 물론이고 막내인 박대교까지 서운한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의 거래는 무서웠다.
종이컵을 들어 커피를 마시면서도 전지곤은 흘겨보는 것처럼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우와-!”
박대교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모니터에 올라온 차트에서 선물지수가 뱀 머리처럼 꿈틀꿈틀 고개를 쳐들고 있어서 그랬다. 개미들과 기관의 매수 주문이 들어온다는 의미였다.
차트에서 선물지수가 머리를 들 때마다 두 사람이 버텨냈던 216.40에서 서너 틱이 올라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120일, 60일, 20일, 5일 이동평균선의 아래에 처박혔던 선물지수가 꿈틀꿈틀 머리를 자꾸만 들었다.
원래는 훨씬 밑으로 처박혀도 전혀 이상할 것 없었는데 전지곤이 지시했고, 이명선이 기계적으로 따르면서 지금 저 자리에 세워둔 선물지수였다.
“힘 좀 내 봐!”
전지곤이 입술에 힘을 꾹 준 채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매수 주문을 좀 더 넣으면 어떻습니까?”
보다 못한 김서언이 질문을 던졌는데 그는 대신 답을 해보라는 의미로 이명선에게 시선을 주었다.
“216.40 아래로는 절대 안 간다고 이미 시장에 알렸어요. 이제부터는 시장의 힘으로 올라가야 해요. 우리가 올리기까지 하면 지금처럼 개인과 기관이 안 들어오거든요.”
이명선의 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전지곤이 보기 좋게 웃었다.
“이 과장은 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우리 팀으로 와라.”
“고맙습니다, 과장님.”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전지곤과 이명선은 물론이고, 듣고 있던 팀원 세 명의 시선은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꿈틀꿈틀.
선물지수 선은 계속 216.55에 버티는 5일 이동평균선을 건드렸다가 눌리는 것처럼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기운 좀 내라. 우리나라가 이렇게 당할 정도로 약한 시장은 아니잖냐.”
전지곤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선물지수를 의미하는 기다란 선이 다시 5일 이평선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216.40에서 버티던 선물지수가 216.50과 55를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최소 두 틱에서 세 틱을 먹은 꼴이었다.
선물지수선이 꿈틀댈 때마다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표시된 이익금이 50억 원과 75억 원을 번갈아 표시하고 있었다.
전지곤과 이명선은 날을 바짝 세운 자세였다.
저러다가 대량 매도 주문이 나오면 선물지수선은 머리를 얻어맞은 뱀처럼 아래로 처박힌다.
꿈틀꿈틀.
“제발 좀 가!”
전지곤이 또다시 바람을 토해낸 직후였다.
“어? 되겠는데요!”
선물지수선이 5일 이동평균선에 딱 붙어서 버텼다.
“조금만! 조금만 더!”
주문이 들어와야 움직이다. 그러니 매수 주문이 좀 더 들어와야 하는데…….
그 순간이었다.
선물지수선이 5일 이동평균선을 뚫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20일 평균선을 향해 몸을 세웠다.
“와아-!”
“그래! 이거지!”
대리 둘과 박대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함성을 질렀고, 전지곤이 벌떡 일어나 승리한 권투선수처럼 양주 먹을 어깨 위로 들었다.
‘회장님! 했어요! 오늘은 지켜냈어요!’
그때 이명선은 천중명을 떠올렸다.
**
박피를 위한 팩을 이틀 하고 출근한 이중성 대표의 얼굴은 낮술을 걸친 것처럼 붉은색이었다. 그런 그가 테이블에서 시선을 들어 손도운을 보았다.
통장과 도장이었다.
그 안에 1백억 원이 들었다고 들었다.
“회장님께서 제 개발품인 미라클을 받아주셔서 저는 매월 과분한 입금을 받고 있습니다.”
가느다란 손도운의 음성이 오늘따라 더 날카롭게 들렸다. 그가 긴장했거나 감정이 올라왔다는 의미였다.
“내수가 좀 줄기는 했는데 대신 수출이 많이 늘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시선을 테이블에 떨어트리고 있던 손도운이 고개를 들었다.
“이게 제가 회장님께 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어제 아내와 의논해서 조금 뺐습니다.”
부끄러운 듯 말하는 손도운의 눈과 어색한 웃음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이중성은 가슴이 울컥했다.
“이걸 회장님께서 하시는 일에 전해주십시오.”
“손 선생. 마지막입니다. 지금은 우리 둘만 알고 있으니까 나중에 후회하실 것 같으면 가져가십시오.”
“아닙니다. 신제품 테스트에서 부작용이 생기면 그 보상으로 사용하려고까지 했던 돈이라 정말 욕심 없습니다.”
손도운의 말에 이중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시니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능력껏 보태겠습니다.”
“대표님. 그런 걸 원한 게 아닙니다.”
손을 들어 만류하는 손도운을 보며 이중성이 흐뭇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 힘이 되는 일인데 그만둘까요?”
천중명에게 힘이 된다는 말에 손도운이 멈칫했고, 이중성은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