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301화 (301/315)

# 301

301. 그게 말대로 돼? (2)

외환딜링팀에 관한 한 송문철은 사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한 명은 호텔에서 레버리지 거래를 맡길 정도로 신뢰하는 구완섭이었고, 다른 한 명은 딜링룸의 안주인 강다희였다.

국내 최고의 대학을 졸업한 뒤에 유학에 나섰던 그녀는 2년 만에 되돌아 증권사의 문을 두드렸다.

증권가에 있다 보면 가장 흔히 듣는 말이 있다.

“나 몰라? 이 바닥에서 내 이름 모르면 안 되는데?”

사실 저렇게 떠드는 인간치고 제대로 이름 알려진 경우는 없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그런 인간들은 반드시 부록처럼 홍콩의 누구, 어느 증권사 임원 누구 하면서 족보를 팔아댄다.

그런 바닥에서 강다희는 입사 3년 만에 사방에 이름을 알렸다. 구완섭의 감각적인 주문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해서 혹시 모를 위험을 풀어낸 것은 물론, 수익률에서도 뒤지지 않았다.

그렇게 입사한 지 불과 3년 만에 강다희는 메이저 증권사인 지경증권의 외환딜링룸 안주인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천중명이 딜링룸에서 보았던 인상 강렬한 여직원이 바로 그녀이기도 했다.

“회장님?”

“어서 와. 잠깐 앉지.”

지경증권으로 돌아온 송문철은 가장 먼저 강다희를 방으로 불렀다.

눈꼬리며 코, 입술까지 강다희는 요염하게 생겼다.

능력 있지. 학벌 끝나지. 미모에 몸매도 죽이지.

그렇게 매력 덩어리인데도 그녀에게 다가가는 남자는 없었다. 사람을 묘하게 깔보는 듯한 눈빛이 그렇게 만들었고, 실제로 그녀 자체가 남자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운동과 영화를 좋아하고, 근무가 힘들었던 날은 반드시 가라오케에 들러 양주 한 병 털어 넣으며 노래 부르는 것이 그녀의 즐거움인데 그걸 방해하면 구완섭조차 고개를 내저을 정도로 독해지니까 뭐.

송문철은 오늘 있었던 회의 내용을 강다희에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구 팀장님이 레버리지 다섯 배를 돌릴 때 제가 뒤를 받치면 되는 건가요?”

“그렇지. 만약 거대자본이 이번 작전을 포기하겠다고 생각할 정도면 가장 먼저 구 팀장이 운용하는 50조 원을 먹으러 달려들지 않을까 싶다.”

“알겠습니다.”

송문철의 의견을 강다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얼핏 건방져 보이는 행동이었는데 강다희는 그래도 될 정도의 실력이 있었다.

“회장님. 구 팀장과 연락이 안 되니까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해도 될까요?”

“흠.”

잠시 고민하던 송문철이 “그렇게 하지.” 하는 답을 내놓았다. 지경증권 외환딜링룸이 가진 나머지 50조 원의 거래 전권을 강다희에게 맡긴다는 의미였다.

하고 싶은 말은 다 오갔다.

“회장님.”

그런데도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에 강다희는 송문철을 불렀다.

“공격적인 구 팀장의 거래를 뒷받침하다 보면 손실이 꽤 나올 수 있습니다. 그쪽의 수익과 제가 감당할 손실을 함께 정산해 주세요.”

“그것도 원하는 대로 하자.”

“감사합니다.”

당당하게 요구조건을 모두 말한 강다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고는 문을 나섰다.

건방지지 않냐고?

팀원들의 수당을 챙긴 걸 그렇게 말하면 곤란하다.

그렇더라도 태도는 고칠 필요 있지 않냐고?

강다희가 사표를 제출하면 그녀를 데려가겠다는 금융사가 스무 곳은 될 텐데 저런 것쯤 얼마든지 예쁘게 보아줄 수 있다.

강다희는 그 정도 실력을 갖춘 팀장이었다.

**

박승양은 확실히 사채업자였다.

밀려드는 아파트 소유자들의 아우성이 그의 방까지 들려오는 와중에도 그는 태연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결재해야 할 서류를 살폈다.

“지경그룹이 사주는 거라면서! 여기에서는 대행만 하고! 한 달 전에 24억이던 아파트를 15억도 안 쳐준다는 게 말이 돼! 에라 이, 도둑놈들아!”

저런 고함을 오늘 벌써 백 번쯤 들었다.

“아니! 전세금하고 대출하고 함께 계산해줘야지! 고작 그것도 못 해주면서 무슨 월세를 살라고 지랄이야? 이러다가 집값 다시 오르면 그 돈 돌려줄 거야!”

악에 받친 고함도 있었다.

이해한다, 저 심정.

그러나 저 사람들이 몰라서 그러는 건데, 지경그룹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토록 얌전하게 듣고 있는 거지, 만약 박승양의 사채사무실에서 저런 소리를 했다면 벌써 내쫓고 남았다.

“커흠.”

당장에라도 달려나가 싹 내쫓고 싶은 욕망을 박승양은 헛기침 한 번으로 눌렀다. 그때였다.

[사랑한다 말해주세요. 정신을 못 차릴 거야.]

이제는 노래 부르는 가수의 상태가 의심스러울 지경인 노래가 그의 휴대 전화기에서 울려 나왔다.

“여보세요?”

- 박 회장. 체리 변이요. 내가 지금 외국에서 온 손님을 만났는데 우리 박 회장이 인수한 부동산을 10퍼센트 붙여 모두 사겠다는 제안이 있었소.

박승양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비릿하게 웃었다.

- 내가 누구요? 체리 변 아니오? 그래서 내가 20퍼센트를 제시했는데 그걸 덜컥 사겠다는 거요.

“일없습니다.”

- 20퍼센트인데?

“변 회장님. 자꾸 이렇게 쫀쫀하게 나올 거면 돈 돌려가세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옛정으로 상대해 드렸는데 이 바닥 뜰 준비하시고.”

박승양의 나직한 음성이 건너간 직후였다.

- 아니 그런데 이 새끼가 뵈는 게 없나? 너 꼬마 할 때 나는 어음 거뒀던 사람이야! 전주로 출발한 나를 어디 꼬마 출신 새끼가!

확실히 사채업자의 강단은 무서운 것인지 숨도 쉬지 않은 것처럼 거친 변전일의 대꾸가 날아들었다.

한편, 그런 거친 욕설을 들었는데도 박승양은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변 회장님.”

심지어 묵직하게 변전일을 부르기까지 했다.

“당신 나한테 찍혔어. 나야말로 실실대니까 동네 댕댕이로 보였나 본데, 나 송도상인 박승양이야. 작은아버지 아들이라도 내 돈 손대면 눈알 파고, 혀 하고 팔뚝 잘라서 지켜내고 마는 박승양.”

박승양이 으르렁대는 동안에도 바깥에서는 연신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부터 명동에서 돈 돌리지 마. 대치동에서 껍죽대도 죽어. 내가 요즘 우리 천 회장님께 누 끼치지 않으려고 실실거리니까 체리 똥까지 나를 만만하게 봤던 모양인데 내 이빨에 걸리고 뼈다귀 하나 남긴 놈 아직 못 봤어.”

피를 뚝뚝 흘리는 듯한 박승양의 대꾸가 건너간 뒤였다.

- 박 회장! 내가 잠시 돈에 눈이 뒤집혔었나 봐요. 알잖아, 나! 돈이 보이면 이상하게 내가 성격이 바뀌면서…….

“지랄 마시고 오후에 통장 확인하세요. 그리고 경고했어. 너는 일본으로 돌아가세요. 거기에서 체리 똥이든, 유자 똥이든 사방에 갈기면서 오래오래 오겡끼 데쓰! 알지? 오겡끼?”

- 박 회장! 내가 지금 갑니다! 우리 만나서 말합시다!

“박 회장? 아니 그런데 이 오겡끼가?”

- 박 회장님! 우리 만나서! 오늘 내가 짬뽕에 탕수육 쏩니다. 내가, 이 체리 똥, 아니 체리 변이 무려 40년 만에 처음으로 밥을 삽니다. 지금 출발해요, 박 회장님!

박승양은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까불고 말이야! 쯧! 이제 사방이 좀 조용해지겠네!”

혼잣말을 뱉어낸 박승양은 얼른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모니터를 살피던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박승양입니다.

“고생 많으시죠?”

- 이런 거야 뭐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한 시간 전부터 주변 사채업자들을 통해서 우리가 사들인 부동산을 한꺼번에 받고 싶다는 제안이 연거푸 들어오고 있습니다.

“중국인가 보군요.”

천중명은 책상에서 상체를 세우며 박승양의 말을 받았다.

- 사채업자는 0.1퍼센트라도 거래에 붙이면 붙였지 그냥 넘기지는 않습니다. 조금 전에 20퍼센트 제안이 들어온 것을 보면 실제로는 20퍼센트 이상을 불렀다고 봐야 합니다.

확실히 그 바닥의 선수답게 박승양은 세세한 곳을 짚는 능력이 있었다.

- 중간에 선 양반이 달려드는 것을 봐서는 25퍼센트 이상을 제시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박 회장님. 고생스럽겠지만, 지금처럼 꾸준히 버텨주셨으면 싶습니다. 대놓고 나서지는 못하겠지만, 중간에 끼어드는 일도 있을 겁니다. 그 점을 눈여겨 봐주세요.”

- 맡겨주십시오, 회장님!

박승양과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아직 때리기도 전에 이렇게 나오면 서운한데?

진광효를 떠올린 천중명이 픽 웃으며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을 때였다.

노크가 들리는가 싶은 순간에 문이 열리고 천상기가 들어왔다.

“동생회장님. 이거 결재 좀 해줘.”

“뭔데?”

“경매에서 낙찰되기 전에 인수하려는 건데 전부 1조7천2백억 원 들어가.”

“알아서 하라니까.”

결재판을 펼친 천상기를 천중명은 빤히 보았다.

“임대수익, 위치, 미래가치, 다 따졌을 거 아냐?”

“그래도 이걸 결재도 없이 인수하라는 건 좀 이상하잖아?”

“뭐라는 거야? 얼른 가서 인수해.”

천중명은 아예 귀찮다는 투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왜 이래? 내가 오늘 사용할 돈이 1조7천2백억 원이라니까!”

“그래, 알았어. 1조7천2백억 원! 경매에서 낙찰되기 전에 잡으려는 빌딩과 토지! 그러니까 알아서 하라고!”

천중명은 멍하니 눈을 끔벅이는 천상기를 향해 말을 이었다.

“중국에서 우리 토지를 노리고 달려들기 시작했어. 이렇게 시간 끄는 동안 그놈들이 중간에 끼어들지 몰라.”

눈과 눈이 똑바로 마주친 상태였다.

“이제 그만 가서 그동안 살피고 살폈었던 빌딩과 토지를 가져와. 그게 거대자본을 믿고 설치는 놈들이 가장 아파할 일이니까.”

“정말 이 정도로 날 믿어?”

“난 믿는다고 하면 믿어. 뒤통수를 맞을 때까지 의심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이럴 시간에 가서 그 결재판 안에 들어있는 빌딩과 토지 전부 인수하고, 앞으로는 그런 일로 찾아오지 마.”

대답 대신 고약한 표정을 지었던 천상기가 몸을 돌려 빠르게 나갔다.

아직 외환 거래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그런데도 부동산 매입으로 거두는 효과는 예상외로 컸다.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향해 움직였다.

환율 거래와 부동산 매입을 계획보다 일찍 시작한 만큼 한두 곳의 자금이 부족할 수 있었다.

똑똑똑.

그때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천중명의 시선 앞에서 유진교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회장님. 아르바이트 지원자가 예상을 훨씬 넘어서고 있습니다. 1차와 2차를 합해서 모두 70만 명을 고용할 예정이었는데 1차에서 이미 신청자가 1백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천중명이 염려하던 바로 그 문제를 유진교가 들고 들어왔다.

“다들 어렵겠죠.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살아야 하는데 앞이 꽉 막혔으니까요.”

“확인 작업을 하고는 있지만, 일용직과 계약직, 비정규직에 근무하던 이들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유진교가 이렇게 보고할 정도라면 누구를 탈락시켜야 할지 모를 정도로 모두의 사정이 어렵다는 의미였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고 대비도 했었다.

그런데 1,800선까지 기다리던 계획을 느닷없이 당긴 터라 당장은 답이 없었다.

“일단 모두 고용하세요.”

모자란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 그 점을 질문해야 할 유진교가 침묵한 채 입을 열지 않았다. 현재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자금을 많이 가진 쪽이 그 무엇보다 유리한 싸움입니다. 파생거래, 외환거래, 부동산 매입, 어느 한 곳도 저들보다 자금이 여유로운 곳은 없습니다.”

집무실의 창을 등진 천중명의 말을 책상 앞에 있는 유진교가 묵묵하게 듣고 있었다.

“그렇다고 회사 돈을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주주들의 이익을 엉뚱한 곳에 썼다고 소송이 걸리면 계열사의 임원들이 다칩니다. 그러니 모자란 돈은 자체적으로 해결하죠.”

“회장님. 30만 명을 고용할 자금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적게 잡아도 1차분에 6천억 원입니다. 이렇게 되면 2차분은 처음부터 새로 예산을 잡아야 합니다.”

“2개월 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급한 불을 끈 뒤에 계산하죠. 내 통장에 있는 현금을 내놓을 테니 이번 급여는 아예 그쪽으로 돌려서 사용하세요.”

“회장님?”

“오후에 평창동에 들러서 현금을 좀 더 만들어 보겠습니다. 계열사에 통보해서 해당자들을 모두 고용하라고 지시하세요.”

천중명의 지시가 떨어졌는데도 유진교는 또다시 답이 없었다.

“1백만 명 중에 절박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하루하루가, 그리고 당장 내일이 암담해서 최악의 선택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업의 존재 이유와 최고의 덕목이 이익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천중명은 책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유진교를 향해 모니터를 돌렸다.

“부회장님. 50만 원, 1백만 원이 있는 이들도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 돈을 다 쓴 다음 날의 상황이 무서워서, 그 뒷날의 희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모니터에는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해 최악의 선택을 한 이들의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힘든 기업을 살리겠다고 반지를 내놓았던 분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희망을 선물할 차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이 싸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1백만 명을 지키며 버티는 동안, 중국은 최소 1억 명을 살펴야 하니까요.”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마른침을 삼킨 유진교가 답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고용조건에 해당하는 신청자 1백만 명을 전원 고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뒤에 그는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섰다.

‘아!’

잠시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 천중명이 옅게 웃었다.

허선영에게 먼저 허락을 받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천중명은 책상에 걸터앉아 창밖을 보았다.

“도깨비 회장 부인이니까.”

오후의 중간쯤을 알리는 태양이 창 저 앞에 있었다.

조금 후에 외환 시장에 난리가 날 테고, 어쩌면 단박에 원·달러 환율이 1,600선까지 치솟을지도 몰랐다.

내가 1백만 명을 지킨다, 진광효.

대신 누가 뭐래도 너는 죽어.

창밖을 향한 천중명의 눈이 오랜만에 도깨비처럼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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