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
299. 이것들이 정말 너무하네 (2)
다음 날, 집무실에 도착하기 무섭게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오전 8시가 채 안 된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민세조입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네, 말씀하세요.”
부속실 직원에게 ‘커피’라고 입 모양으로 지시한 천중명은 책상 앞의 의자에 앉아 몸을 돌렸다.
원·달러 환율은 이미 1,425선에 도착해 있었다.
- 정부가 오늘부터 시장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민의 요구와 언론의 공격도 문제지만, 한계에 부딪힌 계층을 위해서도 더는 지켜보기 어렵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구두 개입이 아니라 직접 움직인다는 뜻입니까?”
- 복잡한 과정이 있지만, 결론은 그렇습니다. 그 외에 지경그룹이 투자받은 외화 240조 원을 국내로 모두 들여오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정부의 입장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천중명은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이 상태에서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정부가 달려들면 지경, 거대자본, 정부, 이렇게 셋이 싸우는 꼴이 된다. 그런 판에 240조 원을 모두 가져오면 저놈들 배만 잔뜩 불려주는 효과 외에는 얻을 것도 없다.
“언제부터 개입할 예정인가요?”
- 빠르면 오후부터 직접 개입할 생각입니다.
오후부터 주식과 환율 시장의 본격적인 혼란이 시작된다. 듣기 좋게 표현해서 혼란이지 실제로는 본격적인 개싸움이 벌어진다는 말과 같았다.
-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금감원과 검찰에 지경그룹이 부당하게 환율과 주식시장에 개입한다는 투서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내용입니다.”
- 조금은 조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정부가 개입한 이후에 지경의 움직임이 반대 포지션일 경우, 나중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많습니다.
“알겠습니다.”
천중명이 답을 건넸을 때, 부속실 직원이 들어와 커피를 놓아주고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 변동이 있거나 새로운 내용이 있으면 추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통화를 수석님 말고 아는 분이 있나요?”
- VIP께 보고 드렸습니다.
“그나마 마음이 좀 편한 답이네요. 우리가 운용하는 파생과 환율팀에 이 내용을 알려줘도 괜찮겠습니까?”
- 10분쯤 뒤에 각 증권사에 내용을 통보하고, 오전 9시에 공식 발표할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연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럼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천중명은 곧바로 송문철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송문철입니다.
“10분 뒤에 통보가 갈 거라고 듣기는 했는데 오늘부터 정부가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움직인답니다.”
- 하아.
송문철의 답답한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 통보 오는 대로 거래팀에 알리겠습니다.
“계속 애써주세요.”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은 커피를 마신 뒤에 책상에 올라온 보고서를 펼쳤다.
환율이 올라가면 대기업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래서인지 수출에 주력한 계열사 중에는 대박이 터진 곳도 있었다. 1달러에 1,150으로 계산했던 수익이 똑같은 제품을 수출해도 1,425로 계산되는 덕분이었다.
지경전자, 지경화장품에서 올라온 신제품 개발 보고서를 살핀 천중명은 이어서 지경건설이 올린 보고서를 들여다보았다.
미분양에 관한 대책, 건설 현장 축소에 따른 유휴인력 관리에 대한 우려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소금장수와 우산장수 동생을 둔 큰형의 심정이 이럴까 싶었는데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었다.
이어서 천중명은 대송자동차 그룹의 보고서를 펼쳤다.
집중하고 있고, 최선을 다해 보고서를 살피지만, 자꾸만 눈이 모니터를 향했다.
며칠 사이에 원·달러 환율이 1,425였다.
이제부터 정부가 개입해 달러를 사들인다는 사실은 환율이 한쪽으로 움직인다는 의미와 같았다.
천중명은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보고서에 시선을 주었다.
정부에서 하는 거래는 이리저리 흔들지 못한다.
일방적인 달러 매수 주문을 낼 테고, 그렇게 방향이 정해진 거래는 거대자본을 흐뭇하게 하는 역할만 할 뿐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천중명의 심정을 알았다는 것처럼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 김준후입니다, 회장님. 한국 정부가 환율에 개입한다는 정보가 돌기 무섭게 한국 국채가 다시 시장에 나왔습니다. 한화로 40조 원 규모입니다.
젠장!
천중명은 눈가를 찌푸린 채 거친 말을 삼켰다.
정부의 개입 방침 덕분에 당장 안 맞아도 되는 폭탄을 먼저 머리에 뒤집어쓴 모양새였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우리 정부가 환율에 개입하겠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 이번 채권 매각은 한국 정부가 외평채로 조달한 자금의 규모를 단숨에 무력화시키는 수준입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손을 놓을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 짐작합니다, 회장님. 다만, 이 채권을 한국 정부가 사들이는 일만은 막아야 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괜찮은 방법 같은데 그건 이마에 댄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일과 같습니다. 더는 방법이 없다는 증명 같아서 국제신용평가가 단숨에 떨어집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 얼마까지 견디실 생각이십니까?
확실히 김준후는 천중명의 움직임을 읽고 있는 눈치였다.
“환율 1,800, 이자율로는 12퍼센트 근처까지는 지켜볼 생각입니다.”
- 이곳도 비슷하게 예상하는 눈치입니다.
김준후의 답을 들은 천중명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 다른 정보가 있으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부탁합니다.”
다른 말 없이 통화를 마쳤다.
그러나 그 뒤에 천중명은 고개를 갸웃하며 창가로 움직였다.
조금 전에 김준후에게 말한 환율과 이자율의 한계점을 미국의 금융가에서도 함께 짐작하고 있다고?
방어를 위해 천중명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선을 거대자본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지?
천중명은 창밖에 펼쳐진 빌딩 숲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
테드 케블린과 통화를 마친 진광효는 틈이 벌어진 이를 드러내며 통쾌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크하아! 컥! 커헉!”
사레가 들려서 가슴을 두들기면서도 진광효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도박이라는 게 그렇다.
상대의 패를 빤히 들여다보는데 돈을 잃을 사람이 누가 있겠나. 게다가 이쪽은 벌써 한국의 채권을 매도해서 저쪽 패를 눌러놓은 상태이니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승패가 갈린 것과 다름없었다.
“돈이 다발로 쏟아지는구나! 다발로!”
흥이 한껏 오른 진광효가 옆에 서 있는 조직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홍콩에 내용을 전달하고, 오늘부터 있는 대로 당기라고 해.”
“예, 총재님.”
진광효의 지시를 받은 조직원이 고개를 숙인 뒤에 전화기를 들고는 구석으로 움직였다.
“좋아! 하루하루가 이리 좋을 수가 없어!”
진광효는 모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창으로 움직였다.
홍콩에 있는 딜링팀에 지시가 넘어갔으니 오늘부터 한국 정부가 쏟아부은 돈을 자루에 담으면 그만이었다.
달러를 올리려 애쓰겠지.
그걸 날름날름 받아먹으며 누르고 누른다.
마지막에 돈이 떨어진 한국 정부가 꺾이는 순간, 진정한 지옥이 펼쳐지는 게 아니겠나.
속국이면 속국답게 고개를 조아려야지! 그깟 몇 푼 돈을 쥐었다고 사자에게 대들다니!
“크하하하!”
돈을 다루는 인간들은 무섭다.
그리고 이렇게 돈에 눌려 죽어가는 인간들의 비명은 한두 명 칼로 찔러 나오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짜릿한 느낌이었다.
창에서 고개를 돌린 진광효는 컴퓨터 앞에서 고개를 숙인 직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사 새로 나온 것이 있나?”
“예, 총재님.”
진광효의 시선을 받은 직원이 빠르게 모니터에 매달렸다.
“당국은 환율이 더 이상 가파르게 오르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크흐흑! 크하하. 계속해! 어서!”
“시장은 이에 화답하듯이 원·달러 환율이 1,420선으로 5원 내려갔습니다.”
기사 내용을 듣는 진광효의 표정은 만족, 그 자체였다.
“구조조정에 들어간 기업들이 줄줄이 명예퇴직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만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 기업의 숫자가 7백 곳, 감원 인원으로는 2만여 명에 달합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 죽어가면서 비명을 질러야 공포가 퍼지지!”
“정규직의 경우와 달리 비정규직은 더 비참한 현실에 직면했습니다. 정부는 당장 생계가 어려운 가구에 한해 비상지원을 계획하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인 방법을 내놓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진광효가 창으로 다시 고개를 가져갔다. 잘 꾸며진 정원으로 칼날처럼 갈라진 빛줄기가 날카롭게 쏟아지고 있었다.
“애송이가 이제는 속 좀 타겠군. 그러게 가진 거 잘 움켜쥐고 살길을 찾았어야지, 사마귀만도 못한 것이 어디에 대고 덤벼?”
웃음을 갈무리한 그는 정원을 향해 살벌한 혼잣말을 뱉어냈다.
**
천중명은 책상에 놓인 휴대 전화기를 들어 빠르게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쯤 울린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천중명입니다. 통화가 급한데요.”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민세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 다음이었다.
-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복도의 끝이거나 갇힌 공간인 것처럼 울리는 민세조의 음성이 들렸다.
“통화 개입을 하루만 미뤄주세요. 하루면 됩니다.”
- 이미 국무회의에서 결정이 난 사항입니다, 회장님.
“VIP께 매달려서라도 부탁합니다. 오늘 이미 시장에서 거둘 수 있는 소정의 목적은 이뤘다고 보고하시죠. 우리나라 채권이 또 시장에 나온 것은 알고 계십니까?”
몰랐구나!
바로 답이 나오지 않은 민세조의 반응으로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채권이 나왔습니까? 어느 정도의 규모인가요?
“40조 원입니다.”
- 후우.
“바로 알게 되겠지만, 자칫하면 오늘 정부가 투여한 돈이 모조리 저쪽으로 넘어가는 모양이 나옵니다. 그러니 하루만 시간을 만들어주세요.”
- 복안이 있으십니까?
전에 단둘이 만났던 밥집에서 모든 것을 걸겠다고 약속할 때 들었던 민세조의 다부진 음성이었다.
“잘하면 반격의 실마리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침묵이 건너왔다.
잠시 후였다.
- 준비하십시오.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는 천중명의 귀에 정말이지 묵직한 민세조의 답이 들어왔다.
“고맙습니다, 수석님. 가능하다면 직접 개입이 하루 늦춰진다는 것만은 최대한 발표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 예, 회장님. 그리고 저도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가능하면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서 우리 노모 같은 분이 망고를 좀 더 드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의 간절한 마음을 가능하면 부담을 줄여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엉뚱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민세조의 바람을 전한 뒤에 통화가 끝났다.
바쁘다, 오늘 하루는.
천중명은 송문철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예, 회장님.
“호텔에 있는 파생과 환율 거래팀을 모두 데리고 한 시간 뒤에 내 집무실로 와줬으면 싶습니다.”
- 예, 회장님.
멈칫했다가 나온 답이었다.
“이따 보죠.”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문자를 액정에 올렸다.
[한 시간 뒤에 집무실에서 보고 싶습니다.]
황성규에게 보낸 문자였다. 이어서 천중명은 바로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 네, 회장님.
“유진교, 천상기 부회장에게 연락해서 한 시간 뒤에 내 방으로 오라고 전해줘. 회의라고.”
- 알겠습니다, 회장님.
인터폰을 마친 다음이었다.
지이이잉.
[한 시간 뒤에 찾아뵙겠습니다.]
황성규의 답이 있었다.
오늘 하루를 벌었다.
책상에 앉은 천중명은 깍지 낀 손을 책상에 올린 채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진광효 너는 죽어.”
그런 뒤에 독한 말을 뱉어냈다.
**
구완섭은 거칠게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슨 짓이야! 정부가 개입하려면 조용하게 바닥 작업을 해야지, 그걸 사방에 떠들면 어떻게 해!”
조금 전의 통화에서 한국의 채권이 시장에 나온 사실을 알게 된 구완섭은 완전히 미친놈의 눈을 하고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그가 팀장이었다.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구완섭은 이곳저곳에 전화해 정보를 알아보았을 뿐, 거래를 지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 정부 발표와 전화 통화를 하고는 저렇게 독한 눈으로 화를 터트렸다.
“이럴 때 한 방 날릴 수 있는데!”
그가 입술을 깨물며 뱉은 말에 팀원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마법사 구완섭이 한 방이라고 했다.
50조 원을 던질 수 있는 마법사가 한 방이라고 하면 도대체 얼마나 벌어들일까?
“이래서 내가 한국에 온 건데! 도대체 여기나 저기나 갑갑하기는! 이런 기회를 알아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구완섭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그 순간에도 그의 눈은 모니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헤지펀드밖에 없는 거야! 사람 주머니 털어먹는 그것들만 순간적인 판단대로! 자유롭게 거래하는 거냐고!”
화가 가득 담긴 그의 고함이 빽 스위트룸 거실을 메운 직후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유일하게 통화되는 그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액정을 확인한 구완섭은 담배를 끼운 손가락을 움직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상무님.”
잠시 말을 듣던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런 뒤에 답을 하고는 멍한 눈으로 휴대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회장님이란 분이 이 기회를 알아봤다는 거야?”
그의 혼잣말을 이해한 팀원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