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
298. 이것들이 정말 너무하네 (1)
하늘에서 내려온 강렬한 햇살이 서울의 빌딩숲을 누르는 시간이었다.
휴대 전화기를 통해 황성규의 보고가 건너왔다.
- 홍콩에 있던 비트코인과 국내, 일본의 비트코인을 이용해 돈을 빼냈습니다. 국내에 있는 돈 20조 원이 허가나 절차 없이 환치기 수법으로 홍콩에 옮겨 갔습니다.
“주인은요?”
천중명은 가장 중요한 내용을 나직하게 물었다.
- 계좌는 광안포부라는 홍콩법인입니다. 실질적 소유주는 양진섭 서정그룹 중국 총괄 본부장입니다.
결국, 국내 그룹이 연관되었다는 보고였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천중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계좌 해킹은 가능한가요?”
- 은행과 증권사라 이 두 곳을 해킹하게 되면 국제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계좌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는 있나요?”
-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데 홍콩에 둔 우리 계좌와 국내 지경증권에 해킹 시도가 있었습니다.
“저쪽도 머리가 있을 테니까요.”
- 회장님. 증권거래위원회와 거래소를 통해 지경증권 계좌를 해킹하는 것까지 우리가 막기는 어렵습니다. 당장 거래 전체가 뚫리지는 않겠지만 홍콩의 우리 계좌도 지경증권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방법을 고민해 보죠. 계좌 주인에 관한 정보를 부탁합니다.”
-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이 휴대 전화기를 들여다볼 때였다.
지이이잉.
진동과 함께 문자가 들어왔다.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송문철이 보낸 간단한 문자였다.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세요.]
[예, 회장님.]
송문철과 문자를 주고받은 천중명은 책상으로 돌아가 모니터에 집중했다. 숨겨진 계좌가 나왔으니 이제는 마지막 한 방을 위해 이를 악물어 가며 인내해야 할 때였다.
**
대송그룹과의 주식 싸움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살벌한 상황을 마주한 최상중은 바늘 박힌 천을 안감으로 덧대 입은 느낌이었다.
선물과 옵션거래가 편안하게 느껴지다니…….
복도를 건너 맞은 편 방에 투숙한 외환거래팀은 레버리지가 무려 20배였다.
1계약 체결에 1십만 달러, 지금 환율로 우리 돈 1억4천만 원 정도의 증거금을 넣어야 한다. 그런데 레버리지를 20배로 잡으면 대략 7백만 원만 넣고 1계약을 체결한다.
말만 들으면 복잡하다.
레버리지 20배란 1억4천만 원을 넣고 20계약을 체결한다고 생각하면 대강 맞는다.
이익도 20배, 손실도 20배.
깔끔한 설명인데 정말이지 “어?” 하는 순간에 1억4천만 원이 소위 ‘떡 사먹었다’라는 표현대로 그냥 사라져버린다.
1억4천만 원? 거래하다 보면 날릴 수 있다.
14억 원? 그것도 뭐…….
140억 원? 이건 확실히 고민해야 한다.
여기까지다.
배팅금액이 1조4천억 원이라면 이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어?” 하는 순간에 1조4천억 원이 싹 사라지는 허망한 거래를 생각해 봐라. 개평도 없이 말이다.
차라리 회식 다음날, 술에 취해 한도까지 긁어댄 카드 명세서를 보고 말지,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물론 외환거래팀이 레버리지를 20배까지 쓰지는 않을 텐데, 10배만 하더라도 최상중은 숨통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타다다닥. 타닥.
그가 앉은 책상 앞으로 이명선과 지경증권 파생거래팀이 줄줄이 앉아서 주문을 입력 중이었다.
우선 거래금액은 각 조별로 1천억 원 수준이었다.
타다닥. 타다다닥.
‘제법인데?’
이명선의 뒷모습과 그녀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최상중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뒤로 질끈 머리를 묶은 이명선은 어느 새 독거미로 변해서는 키보드에 올린 오른손 손가락을 빠르게 놀렸다.
선물은 1계약 한 틱에 2만5천 원을 먹는다.
그냥 규정이 그렇다.
종합주가지수가 1포인트 움직일 때 선물은 몇 틱이나 움직일까?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20틱에서 많게는 40틱도 뛴다.
지금 이명선이 넣은 선물 매도 주문 숫자가 4백 개였다.
한 틱이 오르고 내리는 데 따라 1천만 원을 먹거나 손해 본다. 지켜보던 지경증권 김서언 대리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을 정도로 과감한 주문이었다.
타다닥. 타닥. 타다다닥.
그런 뒤에 이명선은 마치 숫자 입력 로봇처럼 옵션을 찍어 넣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모니터 세 개 중 하나는 선물과 옵션 포지션 별 주문칸이 빽빽하게 있었는데 이명선은 그 많은 것을 모두 외우고 있는 눈치였다.
타다다닥!
‘뭐야?’
김서언의 놀라움이 채 가시기 전에 이명선이 또다시 선물 매도 주문 4백 개를 빠르게 넣었다.
’어떻게 하려고?‘
김서언이 중앙에 공통으로 사용하는 모니터에 시선을 들어서 외국인의 주문 현황을 살핀 직후였다.
“어?”
전지곤 과장 자리에서 놀란 소리가 터졌고, 최상중 상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어? 어?”
이번에 놀란 소리는 김서언이 터트렸다.
느닷없이 선물이 36틱까지 쭉 내려가고 있었다.
타다다다닥! 타다다닥! 타다다닥!
“왜……?”
김서언은 질문을 채 던지지도 못했다.
최상중이 불쑥 다가와 모니터를 함께 들여다보는 그 짧은 순간에, 이명선은 매도 포지션을 모두 털어내고 8백 개의 주문을 모두 매수로 전환했다.
“어어어어?”
김서언은 얼이 빠졌고, 최상중은 홱 고개를 돌려 전지곤 과장을 돌아볼 정도로 놀랐다. 36틱을 내려왔던 선물이 놀란 소리를 지르는 그 짧은 틈에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독거미라더니? 진짜였던 거야?‘
김서언 대리의 눈이 이명선을 놀라움과 존경의 눈초리로 보았고, 주문 내용을 모르는 전지곤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타다닥. 타닥. 타닥. 타닥.
이명선은 총 8백 개의 주문을 또 단숨에 2백 개로 줄였다.
그녀의 화면 오른쪽에 수익 14억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 수익이라는 의미의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고작 3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완전히 실전에서 익힌 솜씨네.”
최상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터트릴 때였다.
“박대교. 여기 이 과장 물 좀 챙겨줘. 옆에 커피도 놔주고.”
전지곤이 팀의 막내에게 지시를 내렸다.
엘리트 출신에 메이저 증권사 파생팀 과장인 그가 이명선을 확실한 팀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파생팀 과장인 그가 14억 원의 수익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정도는 아닌 터라 확실히 실력을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
송문철이 환율거래팀의 레버리지 거래를 결정한 데는 호텔에서 팀을 이끄는 팀장 구완섭의 능력을 믿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수원 출신인 그는 영국 프로 축구팀에서 세계적인 레전드로 인정받은 축구선수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으며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 부모의 결정에 따라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은 다양한 차원의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나라였다.
그곳에서도 서남부로 간 그의 가족은 정말이지 더럽게 차별받으며 살았다.
첫 1년은 백인과 흑인 아이들이 구완섭의 이마를 손으로 콕콕 찌르며 원숭이이라고 놀리거나 양손으로 눈을 길게 찢으며 모욕하는 일이 허다했다.
다음 해 1년 동안 구완섭은 말을 알아듣기 위해 죽어라 노력했다. 그렇게 원어민 수준이 된 구완섭은 그다음 1년을 죽어라 노력한 결과 이민 3년 만에 최고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같은 지역으로 진학한 구완섭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파티에서였다.
그는 셔츠의 앞자락을 찢은 덩치 큰 흑인 아이의 머리를 병으로 통쾌하게 내리쳤고, 그 옆에서 함께 어울리던 히스패닉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쫓기는 히스패닉 아이와 깨진 병을 들고 그 뒤를 따르는 동양 아이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뉴스에도 나왔다. 마약과 대마초를 한 아이들이 인종차별을 자행했다는 원인이 밝혀졌고, 그 학교에 단 한 명뿐인 동양인 구완섭이 전체 성적 1위라는 사실도 뉴스를 탔다.
솔직히 운이 좋았다.
만약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면 그는 히스패닉 갱단에 의해 길거리에서 죽은 채 발견됐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 일로 구완섭은 그 구역의 확실한 미친놈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 해에 역시 전체 성적 1위를 차지하는 능력을 보였다.
대학은 뭐, 당연하게 입학 파티에서 아이비리그 소속 대학의 가장 확실한 미친놈으로 존재감을 발휘했다.
친하게 지내면 한없이 선하지만, 건드리는 순간 끝장을 보려고 달려드는 구완섭을 미국 아이들은 ‘위저드 구’라고 불렀다.
‘구 씨 마법사’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호칭 같은데 그건 좋게 생각했을 때고, 그쪽 지방에서는 ‘미친놈 구’ 정도로 해석하는 게 더 적당했다.
호텔 객실의 벽에 걸어놓은 모니터에서 8개국의 환율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법관이 될까, 아니면 경제를 공부할까.
지금 매섭게 수치를 노려보는 구완섭은 경제를 선택했고, 증권 시장에 발을 디뎠으며, 환율거래를 택했다.
전세계 주식 시장 거래량의 100배를 넘어서는 1일 거래량, 절대 작전세력이 모든 것을 움켜쥐지 못하는 시장, 24시간 거래, 그 모든 것이 그의 성향에 딱 맞았다.
기껏 그렇게 뉴욕에서 유명한 외환 딜러로 성공해놓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책상에서 담배를 꺼낸 구완섭이 라이터로 불을 붙이면서도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장 왼쪽 화면에 올라온 원·달러 환율은 1,395선이었다.
“이것들이 정말 너무하네.”
호텔 객실에 들어와 무려 40분 만에 그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눈 뒤집힌 마법사가 왜 무서운지 알려주지. 이제부터 누가 이 바닥의 진짜 주인인지 확인하자고. 미친놈이 또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 대한 충성심은 죽여주거든.”
혼잣말을 뱉어낸 구완섭이 모니터를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뱉었다.
그런 뒤에 그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자존심 상했을 때 나오는 구완섭의 버릇이었다.
**
지경화장품 직원은 미라클이라는 기념비적인 히트 제품을 만들어낸 손도운을 모를 수가 없다.
신제품 테스트에 관한 공문을 띄운 지 17분 만에 백 명의 신청자가 마감되었는데 그 뒤로도 추가 참가자를 받느냐, 혹은 빈자리가 나지 않았느냐는 문의가 총무과로 계속 이어졌다.
“제품은 모두 여덟 가지 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부 통신망에 올라온 동영상에서 손도운은 양손에 든 팩 제품을 부채꼴로 펼쳐보였다.
“여기 적힌 번호 순서대로입니다. 첫 날은 1번 팩을 얼굴에 붙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1이라는 숫자가 찍힌 팩을 들어 보인 손도운이 윗부분을 찢어 내용을 꺼냈다. 영상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마스크 팩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모두 일곱 개의 팩을 붙이라고 설명한 손도운이 마지막 8번 팩을 들었다.
“마지막 날 사용하는 팩입니다. 그러나 중간에 팩의 사용을 중단하거나, 얼굴이 따가워서 견디기 어려울 때는 이걸 그냥 사용하셔도 됩니다. 혹시 몰라서 8번 팩을 세 개씩 담았습니다.”
제품을 내려놓은 손도운이 영상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부작용이 염려되는 분이 있다면 주저하지 마시고 본사 총무과로 연락주세요.”
눈을 감고 들으면 여자가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음성이었다.
“화학적 박피 제품입니다. 피부의 표면을 녹이는데 이전처럼 투박하게 벗겨지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선천적으로 피부가 약한 분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작용이 의심되면 바로 사용을 중단해 주세요.”
설명을 마친 손도운이 카메라를 똑바로 보았다.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
그런 뒤에 한 마디 인사말과 함께 깊게 고개를 숙였다.
영상을 지켜보던 몇몇이 눈시울을 붉힐 정도로 진심이 가득 담긴 공손한 인사였다.
**
천상기는 눈을 몇 차례 감았다가 뜬 뒤에 눈과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서류와 모니터를 얼마나 오래 들여다보았는지 초점이 흐릿해져서 더는 뭔가를 읽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강갑수가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는 정장에 셔츠, 구두를 신은 모습이었다.
“부회장님. 받아오라고 하신 서류입니다.”
“거기 앉아서 내용 확인하고. 여기 서류에 해당되는 내용 있으면 전부 적어 넣어.”
“예?”
“야! 머리도 가끔은 써야지! 거기 일련번호를 이 용지에 먼저 적고 해당사항 찾아서 적어 넣으라고.”
“예.”
이제는 아예 비서실장이나 심복쯤 된 강갑수가 얼떨떨한 얼굴로 천상기가 건넨 서류를 받아서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움직였다.
“분위기가 이상하던데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열흘 정도 이 추세로 가면 무너지는 사람들 꽤 나올 거다. 현찰을 가진 사람은 적정선까지 계속 노려볼 테고, 안 팔려서 몰린 사람은 겁에 질려 내던질 테니까. 부동산과 주식은 투매가 가장 무섭다.”
강갑수에게 답을 건넨 천상기가 다시 목록을 살폈다.
업자들끼리 주고받는 정보망에는 한계에 다다른 부동산이 계속 올라왔다. 심지어는 대출만 승계해서 그냥 가져가라는 물건도 상당수 있었다.
신규 대출은 이미 막혔다.
사채도 움츠린 상태였다.
“부회장님. 여기 급한 사람들의 대출을 돌리려는 거 아닙니까? 모르는 내가 봐도 시간을 더 끌다가는 진짜 위험해 지겠던데요. 사람들이 이렇게 대출이 많은 줄 처음 알았습니다.”
“어쩔 수 없지. 수입은 빤한데 집은 몇억씩 하니까 그걸 현찰로 다 사기는 어렵잖아. 그냥 집 한 채 장만하겠다는 건데 그걸 장난질치는 놈들이 나쁜 거지.”
“언제부터 사들입니까?”
강갑수가 갑갑한 얼굴로 질문을 건넸고,
“동생회장님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지켜봐야지. 오래 안 간다. 이미 한계에 와 있는 느낌이어서 조만간 터진다.”
천상기가 역시나 답답한 표정으로 답을 내놓았다.
“후-.”
답답한 속을 털어내려는 것처럼 천상기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