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
297. 옳은 길이라 믿습니다 (2)
자동차를 홍보할 때 남자 고객에게는 제로백, 엔진토크, 자동8단, 토크 따위의 성능을 홍보하고, 여자 고객에게는 디자인, 실내조명, 함께 타는 사람의 행복한 모습 같은 감성을 강조한다.
똑똑똑.
“대표님. 이화영 씨라는 분이 일행 두 분과 방문하셨습니다.”
새롭게 꾸민 허선영의 집무실에 들어선 은서연이 나직하게 전한 보고였다.
철로 만든 프레임에 유리를 얹은 세련된 책상, 집무실의 분위기를 살리는 스탠드, 그리고 그 방을 나서면 모던한 느낌의 회의실과 접견실, 그 외에 별도 작업실이 있었다.
“누구요?”
“이화영 씨입니다.”
들여다보던 디자인 시안에서 고개를 든 허선영이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허선영의 전공이 디자인이었다. 그렇게 디자인을 전공한 지경그룹 넘버 4의 집무실을 새롭게 꾸미는 일이었다. 오래된 4벌식 타이프와 뜬금없어 보이는 헝가리의 가로등이 서 있는 그녀의 집무실은 그야말로 지경건설의 인테리어 팀이 혼을 녹이다시피 꾸며낸 결과물이었다.
“어디 있나요?”
“대기실에 있습니다.”
“접견실에서 보죠.”
“예, 대표님.”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허선영이 집무실을 나서자 부속실 직원 두 명이 바로 일어섰고, 그중 한 명이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어머! 선영…….”
이화영과 그날 백화점에서 보았던 두 명의 친구들이었다.
차갑고 냉정한 은서연의 표정과 뒤에 서 있는 부속실 직원의 태도에 이화영은 ‘선영아!’라는 호칭을 다 뱉지 못하고 움찔했다.
“들어와.”
허선영이 몸을 돌리자 부속실 직원이 빠르게 접견실 문을 열었고, 은서연이 그 문 앞을 지키듯 섰다.
길게 말하면 입 아프다.
그냥 이화영과 친구 두 명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들이 알던 그 허선영이 맞나 싶은 얼굴이었다.
“우리 뭐 시원한 거 마실까?”
“고마워…….”
아예 말끝을 내리는 이화영 앞에서 허선영이 고개를 돌렸고, 은서연이 고개를 숙인 뒤에 접견실을 나섰다.
작품처럼 보이는 테이블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파인 듯한 1인용 소파에 둘러앉았다.
“접견실이 정말 예쁘다.”
감탄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렸고, 부속실 직원이 얼음 담긴 음료잔과 과자를 놓아주었다. 그런 뒤에 그녀는 메모를 하나 허선영 앞에 조심스럽게 두었다.
“상무님께는 내가 연락한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디자인 1팀에 전화해서 시안 언제까지 될지 확인해주고요.”
“네, 대표님.”
부속실 직원이 밖으로 나선 다음이었다.
“선영아! 저 그림!”
그래도 디자인을 함께 공부했던 사이였다.
이화영의 옆에 있던 친구가 놀란 눈으로 벽의 한쪽에 걸린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그림 혹시?”
“평창동 아버님이 선물해주셨어.”
질문을 던졌던 친구는 부러움에 질식해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짐작이나 했었나.
불행하고 우울한 그늘을 주제곡처럼 얼굴에 담고 살던 허선영의 집무실에 앤디 워홀의 그림이 떡 걸려 있을 줄을.
축하한다. 허선영이 이렇게 잘 된 것을.
그러나 말이다. 가슴 한가운데서 올라오는 시샘과 질투가 얼굴을 달구고 눈가를 뜨겁게 하는 것은 어쩌지 못해서 접견실에 이해하지 못할 침묵이 맴돌았다.
그림에서 세 명의 방문객이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허선영이 음료수 잔을 붙들었다.
‘세상에!’
허선영의 손목에 걸린 시계가…….
설마 짝퉁을 걸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마른침을 삼킨 이화영과 친구들이 음료수 잔을 들면서 침묵이 좀 더 깊어진 느낌이었다.
“정말 잘 됐다.”
그나마 이성의 끈을 악착같이 부여잡은 친구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녀의 음성이 어쩐지 ‘너 옛날로 다시 돌아가 주면 안 되겠니?’ 하는 것처럼 들렸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참 묘하지?
‘우리가 너무 비참해서 그래.’하는 뒷말이 생략된 것도 그곳에 앉은 네 명이 모두 느꼈다.
“어쩐 일이야?”
허선영의 질문에 아차 하는 얼굴로 이화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놓고 그녀는 머뭇거렸다.
백화점에서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던 허선영의 등 뒤에서 천수관음이 사방으로 손을 뻗어낸 것처럼 카리스마와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서 그랬다.
“우리 아빠가 운영하시는 회사 있잖아. 지경그룹에 비하면 개미집만 한데 그래도 나름 그 업계에서는 규모가 있거든.”
느닷없이 부친의 회사를 개미집으로 만든 이화영이 말을 이었다.
“함께 유학했었잖아. 힘 좀 써서 아빠 회사를 지경건설 밴드로 넣어줬으면 해서 그래. 아니면 이번에 240조 원 투자받은 데서 조금만, 눈곱만큼만 떼서 아빠 회사에 자금을 지원해주든가.”
행여 거절당할 것을 감안했는지 이화영이 세상 착하고, 깜찍한 데다, 공손함까지 더한 표정으로 허선영에게 제안을 내놓았다.
이화영과 함께 온 친구 두 명이 긴장한 눈으로 기다리는 앞이었다.
“미안해. 정말 들어주고 싶은데 우리는 일 이야기 못해. 그게 규정으로 돼 있어.”
허선영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아까 비서실 직원을 고용하는 것까지 그룹발전본부에 규정이 있어서 그대로 따라야 해.”
“그래도 슬쩍 말해줄 수는 있잖아?”
“내가 그렇게 하면 앞으로 밴드 신청에서 아예 제외될 텐데 그래도 괜찮다면 한번 말은 해볼게.”
“자금 지원은……?”
허선영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아빠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
아픈 이야기인 데다 약점이라 생각했던 허세직의 이름을 허선영이 아예 툭 꺼내놓았다.
“난 그것도 도와달라고 말 못했어. 여기 분위기가 그래.”
더는 입도 열지 못할 비유였다.
쭈뼛대던 이화영이 아쉽고 서운한 얼굴로 음료수 잔을 집어 들었다.
“정말 잘 됐어.”
그런 뒤에 뜬금없는 말을 꺼냈고,
똑똑똑.
그 직후에 은서연이 들어왔다.
“대표님. 회의를 더 연기할까요?”
“아니에요. 우리 일어날 거예요.”
은서연의 말에 이화영이 먼저 일어나면서 친구 둘이 함께 몸을 일으켰다.
“우리 모임 만들었으니까 그건 참석할 수 있지?”
“그럼.”
“바쁘니까 오늘은 이만 갈게. 수고해.”
주눅 든 세 명을 입구까지 안내한 허선영이 몸을 돌린 뒤에 은서연을 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제가 눈치가 좀 있어요.”
차가운 표정의 은서연이 허선영의 앞을 걸어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들어서기 전이었다.
허선영이 예쁘게 웃었고, 은서연이 왼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했다.
**
지경저축은행의 상황이 어제보다 더 심각했다.
“이걸 왜 못해준다는 건데! 아직 대출 여력이 있잖아!”
담보가의 50퍼센트를 대출받았던 고객은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규정이 바뀌었습니다. 원금 분할 상환 규정으로 따지면 더 대출할 여력이 없습니다.”
“저축은행이 왜 그런 걸 따져! 왜!”
“내부 규정에…….”
콰다당!
분을 못 이겼는지 테이블에 상체를 기울였던 고객이 앞에 있는 의자를 걷어찼다.
“당장 팔아도 15억 원은 받잖아! 그런데 10억 원을 못해준다는 거야!”
그의 뒤에 있던 대기 고객들이 참담한 얼굴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지금 악을 쓰는 남자보다 대출 신청 조건이 열악한 눈치였다.
“어! 왜 이러시나?”
그때 의자 걷어찬 소리, 고함을 들을 것처럼 안쪽에서 박승양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당신은 뭐야!”
“나? 나야 여기 회장이지.”
“잘 나왔다! 그래!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박승양은 직원들의 책상을 가로질러서 고함을 지르는 고객에게 다가왔다.
“너는 뭔데 반말을 찍찍 지껄이고 그래?”
“뭐?”
“왜 반말질이냐고? 당신 나 알아? 이게 별 씨…….”
박승양의 툭 튀어나온 광대뼈, 좁은 눈매, 핏물을 머금은 듯 얇은 입술을 본 고객이 움찔한 다음이었다.
[사랑한다 말해주세요. 정신을 못 차릴 거야.]
고객의 정신을 홀딱 빼놓는 흥겨운 노래가 박승양의 주머니에서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왜? 뭐?”
앞에 있는 고객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박승양은 거침이 없었다.
“하지 말라고 대출! 건설회사에 무슨 대출을 해!”
사채바닥에서조차 먹어주는 매섭고 날카로운 박승양의 기운이 펄펄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죽고 싶으면 해, 대출. 나랑 중국에 가고 싶으면 하라고.”
통화를 마친 박승양이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는 시선을 들었다.
“이보쇼. 당신은 식당에 가서도 그래? 없는 메뉴를 어떻게 만들어? 당신 직업이 뭐야?”
“그게 아니라…….”
기세에 눌린 남자가 눈을 껌벅이며 말을 더듬었다.
“규정이 있어요. 규정이. 이자가 아니라 원금을 함께 상환해야 하는데 수입을 증명해야 한다니까.”
“내가 수입은 좀 됩니다.”
“그럼 번 돈으로 해결하면 되잖아.”
“아니! 전세를 나가겠다는데 대출 만기까지 걸려서 그렇잖아요!”
“푸후-.”
박승양은 답답한 듯 길게 숨을 뱉어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갑자기 길 한가운데에서 배가 찢어지게 아프네? 숨 서너 번 쉬고 나면 그냥 바지에 지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앞에 서 있는 남자와 뒤에 있는 대기 고객, 직원들까지 박승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래? 비를 먼저 피할래? 옆의 숲으로 들어가 당장 급한 걸 해결할래?”
“둘 다 똑같잖습니까?”
“뭐가?”
“급한 걸 해결해도 비에 젖고, 비를 피하려면 바지에 실례를…….”
“지금 당신이 그래. 어떻게 할래? 비를 흠뻑 맞으며 바지도 적실래? 아니면 바지라도 건지고 비를 맞을래?”
눈을 끔벅이는 남자를 향해 박승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집값이 계속 떨어질 거 대강 짐작하잖아. 그러니까 이러는 거 아냐!”
“누가 그래! 누가 집값이 떨어진다고 이래!”
박승양은 기가 막힌 얼굴로 히죽 웃었다.
“그런 생각이면 가쇼. 가서 꼭 붙들고 있어요. 이보쇼. 세상에 한 줄로 오르기만 하는 게 어디 있어? 하다못해 주식도 삐뚤빼뚤 위아래로 흔들리며 올라가잖아! 그런데 왜 당신이 산 집값만은 계속 오른다고 믿냐고!”
이어진 박승양의 거친 질책에 남자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
외환 거래팀은 송문철과 함께 호텔에 도착했다. 스위트룸으로 들어간 일행을 기다린 사람은 최상중이었다.
“오셨습니까?”
“준비는?”
“다 해놨습니다.”
송문철과 외환 팀이 안을 둘러보았는데 이미 책상에 거래를 위한 컴퓨터까지 모두 올라와 있었다.
“회장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그 뒤에 방문하셔서 딜링룸을 돌아보고 가셨어.”
최상중에게 대꾸한 송문철이 고개를 돌려 외환 팀 네 명을 돌아보았다.
잠자리 날개 같은 하얀 커튼 너머 창으로 하늘과 맞은편의 빌딩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방이었다.
“우리 그룹 회장님께서 특히 관심을 가지고 맡기는 일인데 다들 각오는 돼 있는 거지?”
“예, 회장님.”
외환 딜링팀의 팀장 구완섭이 대표로 답을 하고는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아마 지경증권 누구를 이곳에 데려다 놔도 이런 기회를 걷어찰 직원은 없지 싶었다.
“잘 부탁해. 필요한 건 여기 최 상무에게 말하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사는 끝났다.
“회장님. 그런데 이 팀들이 거래할 금액이 얼마나 됩니까?”
아직 구완섭 팀장도 모르는 내용이어서 다들 궁금한 눈으로 송문철을 바라보았다.
“계좌 두 개에 있는 50조 원을 우선 운용해.”
“끽.”
발에 밟힌 쥐처럼 이상한 소리를 낸 직원이 시선을 한 몸에 받고는 고개를 떨궜다. 호텔의 스위트룸이었다. 거래가 예사롭지 않으리라 짐작했는데 그래도 50조 원을 거래하게 될 줄 몰라서 나온 희한한 비명이었다.
“맡겨 주십시오. 제대로 해내겠습니다.”
비명을 지른 팀원에게서 시선을 돌린 구완섭이 다부지게 내놓은 대꾸에 송문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
꼭 하루만이었다.
채권이 시장에 나온 지 꼭 하루 만에 환율은 벌써 1,355선을 맴돌았다. 채권으로 빠져나간 자금을 증명하듯 외국인은 연신 주식을 매도했고, 종합주가지수, 선물지수가 연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집무실에 돌아온 천중명은 모니터에 올라온 수치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1달러에 1,355선이라고 해도 당장 죽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평소에도 돈 만 원이 아쉬웠던 이들은 그나마 돌던 그 파란 지폐 하나 만지기 어려워진다.
풀고 싶다.
확 돈을 풀어서 정말 배고픈 사람들을 돕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정말 모든 것을 빼앗기기 때문에 지금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후우-,”
천중명은 책상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환율과 금리로 두들겨 현금을 먼저 뺏고, 다음으로 대출받았던 빌딩과 아파트, 기업을 가져간다.
끔찍하지.
살아가는 내내 월세나 사용료를 외국인 소유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삶이란.
천중명이 창밖을 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책상에 올려둔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말씀하세요.”
- 숨어있던 비트코인의 대차현금을 찾아냈습니다.
황성규의 보고가 전해진 직후였다.
내내 어둡던 표정의 천중명이 집무실 창을 향해 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