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296. 옳은 길이라 믿습니다 (1)
삼합회 총재인 진광효는 좀 무식하다. 그래서 그는 지금 모니터에 떠있는 숫자를 보는 것이 지루했다.
천문학적 돈을 버는 일이라면 피도 좀 튀고, 여기저기에서 손과 발목을 잘려 지르는 비명도 터져 나와 줘야 제 맛인데…….
모니터에서 한국인들의 비명이 들릴 일은 없겠다만, 그래도 극적으로 확확 변하는 것도 있어야 볼 맛도 날 텐데 지금은 끝자리나 겨우 움직이고 있었다.
진광효는 통역을 맡은 직원을 한심하다는 투로 바라보았다.
30분 만에 1,311에서 1,313까지 끝전 고작 두 칸 움직인 것에 겁먹은 얼굴을 한다는 것이 마뜩잖아서였다.
“에이!”
언제쯤 돼야 한국에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면서 견디지 못한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이 들리는 건지!
볼을 긁어대던 진광효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앞에 펼쳐진 정원처럼 한국의 땅과 건물, 제주도의 유명한 호텔들을 진광효가 모조리 손에 넣게 되면 말이다.
“크흐흐.”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간 관광객의 돈이 모조리 진광효의 주머니로 들어온다. 그런 뒤에 집을 빼앗긴 한국인들이 그의 주머니에 월세를 따박따박 넣어주는 세상이 열린다.
“크하하하!”
그의 웃음에 놀란 직원이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모니터로 시선을 가져갔다.
중국에는 말이지, 재벌 수준으로 돈을 가진 사람이 한국의 인구수만큼 있어요. 지금도 한국을 아예 통째 살 현금이 있는데 그 놈의 법이 그동안 가로막고 있었던 거라고.
이제 펼쳐질 경제 위기를 통해 한국은 영원히 중국의 속국, 아니 진광효의 속국이 되지 않겠나.
땅이란 게 마음대로 생산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되돌릴 방법은 유일하게 진광효에게서 되사는 법 밖에 없지 않겠냐는 말이다.
죽게 생긴 사람들의 특징을 진광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뭐든 던지지. 뭐든.
공포가 시작되면 그동안 버티던 모든 것을 던지며 살려달라고 매달린다고!
진광효가 정원을 바라보며 욕심 가득하게 웃었을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소파 옆의 협탁에 올려둔 그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었다.
거만하게 휴대 전화기를 들었던 진광효가 번호를 확인하고는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30분 뒤에 시작됩니다. 오늘 밤부터 시작될 비명이 얼마나 커지는지 지켜보는 일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미리 알려드립니다.
“좋군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진광효가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제 시작이구만! 뒤통수를 맞고 나면 그때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비열한 것인지 새삼 알게 되겠지! 크하! 크하하! 크하하하!”
그런 뒤에 그는 만족한 웃음을 연신 토해냈다.
**
유진교가 천중명의 집무실을 찾은 것은 마타르와 통화를 마친 한 시간 뒤쯤이었다.
“홍콩의 계좌에 1백조 원이 입금되었고, 계좌 잔고를 확인했습니다.”
1백조 원이 계좌에 있단다.
그런데 솔직히 천중명은 당장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얼마나 되는 돈인지 감이 안 잡히네요.”
책상에서 고개를 든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움직였다.
“우리나라의 국민 한 사람 당 대략 2백만 원씩 나눠주실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하시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유진교의 비유를 들은 천중명은 가볍게 웃고 말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오히려 별거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천중명이 편안하게 대꾸를 건넸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와 함께 공정규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회장님. 예상하셨던 미국 국채가 시장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채도 1백조 원이 동시에 풀렸습니다.”
공정규는 들고 온 결재판을 천중명의 앞에 놓아주었다.
5백조 원의 미국 국채와 1백조 원의 한국 국채가 시장에 나왔다는 달랑 두 장짜리 보고서였다.
“예상했던 대로네요.”
“우리나라 국채 말씀이십니까?”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앉아요.”
“예, 회장님.”
공정규가 유진교의 바깥쪽에 자리한 다음이었다.
“우리나라 채권 발행이 대략 550조 원 수준입니다. 대한민국의 전체 자산이 1경2천조 원 근처인데 문제는 부동산 평가 금액이 9천조를 넘는다는 데 있습니다.”
“거품이라고 보십니까?”
“인위적으로 띄워 올렸으니까요. 마지막에 잡은 분들이 고통받는 건 주식하고 다를 바 없죠. 문제는 그 부동산이 전 재산인 분들인데…….”
한숨을 내쉰 천중명이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계열사 별로 지역은 정해 주셨죠?”
“통보했습니다.”
유진교가 근심 어린 얼굴로 답을 내놓았다.
환율을 방어하는 계좌에 1백조 원이 입금됐고, 다시 파생상품 거래에 40조 원, 남은 금액이 1백조 원인데 부동산 매입에 얼마나 많은 자금이 필요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오늘은 지경증권에 들렀다가 돌아볼 곳이 있으니까 급한 연락은 전화로 하세요.”
“예, 회장님.”
천중명의 지시를 받은 유진교가 공정규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
고작 하루 지났다.
그런데도 박승양은 시중에 돈이 마르는 것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었다.
[사랑한다 말해 주세요. 정신을 못 차릴 거야.]
그 사실을 반증이라도 하듯 그의 휴대 전화기가 아침부터 정신을 못 차릴 지경으로 울어댔다.
“여보세요?”
- 박 회장. 나 체리 변입니다.
“변 회장님. 엉뚱한 곳에 돈 돌릴 거라는 말씀하시려는 거면 아예 끊으시고.”
- 그게 지금 사채 금리가 죽여요. 여기저기 좋은 물건들이 줄줄이 서서 돈을 달라고 매달리고 있다니까. 내가 유자차하고 체리 돌려드릴 테니까.
“뭐, 정 그러시다면 내가 계좌로 보내드릴 테니 이번 기회에 부자 되세요.”
딱 한 번 말렸던 박승양이 시원하게 돌려주겠다고 나서자 변 회장은 오히려 켕기는 눈치였다.
- 박 회장,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
“안 나쁩니다, 기분. 기회를 걷어차는 변 회장님이 안되면 안됐지 내가 기분 나쁠 게 뭐 있습니까? 아시지? 내가 이번 지경그룹 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거.”
- 그야…….
“난 그 회의에서 숨을 못 쉴 지경이었거든요. 돈 냄새가 어찌나 진하게 풍기는지. 기회를 버린 건 우리 변 회장이시니까 푼돈 긁어서 부자 되셔요.”
- 박 회장! 내가 잘못했소! 내가 잠깐 욕심이 생겨서 그랬소.
“가져가세요.”
- 좋아! 내가 숨겨둔 2천 억 더 얹었다!
박승양의 눈꼬리가 꿈틀했다.
“빨리 보내세요.”
- 그럼 저 유자차는…….
“돈을 돌려드려?”
- 아니오. 바로 보내겠소. 나는 그저 우리 박 회장만 믿어요.
통화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하! 이럴 때 사채 바닥을 싹 긁으면 돈이 되기는 하는데 이거 이러다가 나도 죽는 거 아냐?”
[사랑한다 말해 주세요. 정신을…….]
“얘 오늘 목쉬겠다. 불쌍한 우리 잔디…….”
혼잣말을 중얼 댄 박승양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고개를 갸웃했던 박승양이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분간 건설회사에 대출은 안 합니다. 그건 다른 곳에서 알아보셔.”
통화는 계속 그런 식이었다.
**
천중명은 먼저 최상중이 있다는 호텔에 먼저 들렀다.
“오셨습니까?”
셔츠에 바지 차림이던 직원들이 급하게 재킷을 집어서 걸쳤고, 이명선은 양손을 붙든 자세로 컴퓨터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대송그룹과의 적대적 인수합병에서 주식을 만지던 직원들이 아니라 파생상품 부서 직원들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어서 최상중이 직원들을 차례로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막내 직원은 주식 거래 파트와 마찬가지로 황송해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채권 매도가 나온 건 들었나요?”
“예, 회장님.”
“이번에 나온 우리나라 채권을 누군가 좀 더 높은 이자로 매수하고 나면 다시 다른 채권이 나올 겁니다. 그렇게 세 번만 반복하면 원화 가치가 망가지고, 금리가 치솟는 건 불을 보듯 빤한 일입니다.”
다들 대강 짐작하는 눈치였다.
“누가 봐도 한동안 풋장이 이어집니다. 주식, 선물, 옵션의 가격이 모두 아래로 내려갈 텐데 당분간 그 추세로 따라가세요. 운용 자금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줬나?”
“거래에 관한 룰을 정하느라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최상중이 대답을 들은 천중명은 이명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새로운 멤버로 합류한 꼴이라 파트를 나누는 것이 먼저였고, 다음으로 주문을 처리하는 순서, 금액을 정하는 것이 우선 되었던 눈치였다.
“하방으로 잡되 전체 금액의 절반가량을 항상 비워두세요. 최 상무는 전화 연결되죠?”
“그렇습니다, 회장님.”
“내가 연락하면 그때부터 대략 2분 안에 포지션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가능하겠냐는 천중명의 시선에 최상중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하는 답을 내놓았다.
“이명선 과장은 언제 독거미가 됐어?”
그런 뒤에 천중명은 이명선을 향해 농담을 건넸다. 당연하게 이명선은 대꾸를 못한 채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이명선을 아낀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
원래 있던 팀에 합류하는 일은 누군들, 어떤 일이든 쉽지 않다. 그래서 천중명의 의지를 알려주기 위해 건넨 농담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친분을 드러내는 것은 이 정도가 적당했다.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송그룹의 적대적 인수합병과는 달리 세계적으로 움직이는 거대 자본과 맞서는 일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임해주기 바랍니다.”
천중명의 말이 끝나자 최상중을 비롯한 여섯 명이 고개를 숙여 각오를 보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최상중을 시작으로 우르르 방문 앞까지 움직인 일행이 문을 나서는 천중명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천중명이 스위트룸을 나선 뒤였다.
“후-.”
셔츠의 단추를 풀어낸 최상중을 따라 다들 스위트룸의 거실로 움직였다.
“파트는 다 정리했고, 오늘부터 24시간 풀로 돌 건데 주간 거래시간은 다 같이 돌고, 야간은 2인 1조로 감시하자고. 오케이?”
“예, 상무님.”
“그리고 아까 회장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문을 확인한 뒤에 직원들을 돌아보는 최상중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 이야기가 밖으로 새나가면 회사는 몰라도 내가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 인생 망쳐놓을 테니까 알아서 하고.”
그룹 회장과 호텔 객실에서 인사할 기회를 누가 잡아보겠나. 게다가 대송과의 적대적 인수합병 뒤에 주식을 만졌던 팀원들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줄줄이 달려드는 상황이었다.
다들 인생이 걸린 거래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듣는 표정이었다.
“우리가 거래할 금액이 40조 원이다.”
“억!”
막내 직원이 누군가 옆구리를 쿡 찌른 것처럼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나와 여기 박대교는 직접 포지션을 정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전 과장이 안민곤 대리와 10조 원, 이명선 과장이 우리 김서언 대리와 10조 원 선에서 우선 포지션을 잡아.”
“예.”
평소와 다르게 답은 짧았다. 그리고 그 직후에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살벌한 긴장이 스위트룸 거실에 이슬비처럼 내려앉았다.
**
천중명은 곧바로 지경증권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현관에 나와 있던 송문철 회장과 임원들이 천중명을 안내해서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임원분들은 여기에서 들어가세요. 나는 우리 송 회장과 딜링룸을 돌아볼 테니까.”
“예, 회장님.”
천중명이 임원들을 보낸 다음이었다.
송문철은 복도 안쪽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딜링룸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앞서 간 그가 디지털 도어록의 번호를 빠르게 눌렀다.
문을 열고 들어선 외환 딜링룸은 전체적으로 어둑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가득한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송문철을 본 직원들이 일어섰고, 천중명이 들어선 뒤에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세를 세웠다.
천중명은 빠르게 안을 둘러보았다.
가장 안쪽에 인상이 강한 여직원이 확실히 눈에 띄었다.
책임자로 보여서 관심이 가긴 했다만, 1원의 등락에 따라 몇 억의 돈이 왔다 갔다 하는 딜링룸에서 인사와 격려를 한답시고 시간을 뺏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잘해줄 거라 믿습니다. 고생 부탁합니다.”
짧은 인사말을 남긴 천중명은 곧바로 송문철과 함께 딜링룸을 나섰다.
복도에서 마주친 직원들이 놀라는 얼굴로 고개 숙여 인사한 뒤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듯 벽으로 붙었다. 셔츠를 반쯤 내놓은 직원 한 명이 칫솔과 컵을 들고 걷다가 송문철의 날카로운 눈빛과 뒤에 있는 천중명을 보고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짓기도 했다.
송문철의 방에 도착한 천중명은 커피를 부탁하고 소파에 앉았다.
“회장님. 환율 거래 팀 다섯 명을 오늘밤부터 호텔에 묵게 할 생각입니다.”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 준 뒤에 송문철이 조용하게 건넨 말이었다.
“아무래도 중요한 거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비밀 유지 차원에서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송 회장님이 알아서 판단하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럼 환율팀을 최상중 상무에게 보내겠습니다.”
“객실이 있을까요?”
“파생 팀 준비할 때 미리 확보해두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이 커피를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호텔의 딜링팀은 레버리지 거래도 병행할 생각입니다.”
송문철이 뜻밖의 말을 꺼내놓았다.
“본사 딜링룸에서 배팅하는 방향을 가늠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달각.
천중명은 먼저 잔을 내려놓았다.
“송 회장님. 그렇게 하면 내부자 거래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지경증권 회장이란 분이 그런 일에 연루되면 일이 커집니다.”
“거대 자본을 상대하자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저는 회장님이 짊어지시려는 짐을 나누려는 것뿐입니다.”
“직원들은요?”
“개별 팀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처리하겠습니다. 파생팀과 환율팀 모두 휴가로 처리했는데 만약 문제가 된다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날카로운 천중명의 시선 앞에서 송문철은 꿋꿋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회장님께서 가리킨 방향이 옳은 길이라 믿습니다. 저는 일개 계열사의 책임자이지만, 회장님이 가시려는 길에 함께 하고 싶습니다.”
천중명의 질문에 송문철은 이미 결심한 얼굴로 답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