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
295. 뭘 하려고 이래? (3)
한 번 해봤던 일이라 빠르고 정확했다.
지경증권 최상중 상무는 스위트룸 두 개와 스탠다드룸 하나를 정해 파생상품 거래를 위한 딜링룸을 준비했다. 컴퓨터, 호텔 측에 별도의 요금을 내고 연결한 초고속 인터넷망, 그 외에 보안장치들이 연신 방으로 들어왔다.
“이명선 과장이 여기 일반실을 사용하고, 거래는 이쪽에서 함께 하면 됩니다.”
“다른 직원분들은요?”
“스위트룸을 하나 더 빌려서 그곳에서 함께 지냅니다. 평소보다 망가진 모습을 보게 될 테니까 그 점만 이해해주면 됩니다. 거기, 이리들 와 봐.”
컴퓨터를 연결하던 직원 넷을 최상중 상무가 불렀다.
“인사하자. 여기가 요즘 파생계에 새롭게 떠오르는 별, 이명선 과장.”
열어놓은 거실 창밖으로 작은 테라스가 보이고, 그곳에서 들어온 바람이 커튼을 흔드는 가운데 이명선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직은 정장 바지에 셔츠 차림이지만, 앞으로 24시간 근무하며 파김치가 될 이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름을 들어봤을지 모르겠는데 전지곤 과장이고.”
파생상품에서 나름 먹어주는 전지곤을 향해 이명선이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안민근, 김서언 대리.”
두 사람의 이름은 처음 들었다.
“박대교 사원.”
신기하지?
어디나 막내는 이상하게 인사조차 어색한 것이 말이다.
최상중의 소개로 인사를 마쳤다.
“혹시 파생계의 독거미라는 그 이명선 과장인가요?”
전지곤 과장의 질문에 최상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고 한번 보고 싶었는데 정말 반갑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자자! 시간이 아까우니까 얼른 준비하고 밥 먹자. 거래에 필요한 정보 교환은 메신저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전부 새로 깔았으니까 개인적인 연락을 하는 일은 없도록.”
“예, 상무님.”
다들 다시 준비를 위해 매달렸다.
“이 과장은 왜?”
“같이 해야죠. 제가 사용할 자리를 알려주시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최상중이 시선을 돌리자 전지곤 과장이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를 가리켰다.
솔직히 말하면 같은 과장이라도 지경증권과 남부증권은 레벨 자체가 달랐다. 그러나 천중명 회장이 직접 선발한 이명선이고, 송문철과 최상중이 보장하는 인물인 데다 나름 이 바닥에서 닉네임을 얻은 실력자라는 배려쯤 있었다.
그런 이명선이 함께 달려드는 것을 흐뭇하게 보았던 최상중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테라스로 나섰다.
이들이 먹고 자는 데 드는 비용이 하루 2백만 원을 웃돈다.
열흘이면 2천만 원으로 제법 많은 것 같은데 막상 거래금액을 알게 되면 그게 또 별거 아닌 게 된다.
자신들이 거래할 금액을 알고 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베란다의 난간에 팔을 짚은 최상중이 안을 돌아다 보았다.
“라인 다 연결했어?”
“예!”
저들이 거래할 금액이 40조 원이다.
그 돈을 가지고 5백조 원을 무기로 달려드는 적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파생거래의 특성상 아차 하는 순간에 1조 원, 2조 원이 사라지고, 또 ‘어?’하고 났을 때면 10조 원이라는 상상도 못 하는 금액을 잃는다.
밖으로 시선을 돌린 최상중은 하늘을 바라보며 바보처럼 웃었다.
세상 참, 5백조 원이라는 돈을 들고 달려드는 거대 자본이라니 어디 상상이나 해봤나. 하긴 1년 예산이 430조 원에 달하는 대한민국을 먹는 데 5백조 원이면 나름 남는 장사란 생각도 든다. 게다가 이미 한국은 환율 공격에 초토화된 경험도 있었다.
“하, 어쩌자고 이런 싸움이…….”
대송그룹과 싸우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거대 자본을 상대하는 가장 일선에 서게 되었다.
부담스러우니까 이 싸움에서 빠지고 싶냐고?
‘에이!’
능글맞게 웃은 최상중이 테라스의 난간에 기울였던 몸을 세웠다.
대송그룹과의 싸움을 통해 주식바닥에서 최상중의 이름값은 최고치를 찍었다. 외국의 유명한 증권사와 투신사, 은행에서 스카우트 제안도 받았다.
그는 이런 기회를 준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믿는다. 천중명 회장을. 젊은 회장은 절대 손해를 가지고 질책하는 지휘자가 아니었다.
‘붙어보자. 거대 자본이고, 유대 자본이고.’
이를 깨물었는지 최상중의 볼이 씰룩하고 움직였다.
**
지경화장품 이중성 대표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회의실이었다.
이제는 준재벌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돈을 벌어들인 손도운 개발자가 그의 맞은편에 있었고, 오른쪽에 진갑수 공장장, 왼편에 개발이사 김태환이 앉아 무거운 얼굴로 테이블에 놓인 제안서를 내려다보았다.
“손 선생님. 자칫하면 미라클의 명성은 물론이고, 지경화장품이 쌓아놓은 신뢰마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제안서를 들여다보던 이중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계적인 업체들이 이 원리를 몰라서 제품을 출시하지 않았겠습니까. 중간에 생기는 부작용을 감안하면 이건 너무 무리한 제품입니다.”
이중성이 제안서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손도운이 옆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테이블에 올렸다.
“제가 시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이걸 저와 여기 세 분, 그리고 직원들이 함께 테스트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여전히 가느다랗고 높은 목소리로 뜻을 밝힌 손도운이 가방에서 비닐 팩을 여러 개 꺼내놓았다. 위를 지퍼 형태로 잠근 반투명한 비닐 팩 안에는 반으로 접어놓은 마스크 팩이 담겨 있었다.
“꼭 일주일입니다. 이 일곱 개를 순서대로 써보고 부작용이 심한 분이 나오거나 효과가 없다고 하시면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느다란 음성의 손도운이 이중성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비록 이 제품을 출시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절대 다른 회사와 손잡거나, 제가 개인적으로 출시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표본 조사를 하려면 한두 명으로는 어렵습니다.”
“시제품은 이미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직원들에게 전체 공지를 띄워서 백 명을 선발해 주십시오. 여기 공장이 절반, 매장을 담당하는 직원 절반, 이렇게 구성해 주시고.”
손도운은 아예 작정한 얼굴이었다.
“이 시제품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개인적으로 1억 원 한도까지 보상하겠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얼굴에 부작용이 생기면 매장에서 더 근무 못 할 텐데 그걸 어떻게 우리 손 선생이 책임진다는 겁니까?”
“지원받을 때 위험성을 충분히 공지해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최고 1억 원까지 보상하겠습니다. 제가 가진 현금 전부입니다.”
“하하…….”
웃겨서가 아니라 기가 막혀 나온 이중성의 웃음이었다. 저런 꼿꼿한 성격 때문에 미라클의 사업제안서도 외면했었는데 또 이러고 있다.
“일주일이라고 그러셨죠?”
“네.”
마치 매장의 여직원이 대답하는 것처럼 얇은 손도운의 답이 있었다.
“대표님.”
그런 뒤에 손도운이 곧바로 이중성을 불렀다.
“제 목소리가 이렇습니다. 이게 뭐 좋은 거라고 아들놈도 이렇고 제 딸아이는 아예 헬륨 가스를 마신 사람처럼 목소리가 이상해서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었습니다.”
이중성이 힐끔 공장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혹시 누군가 손도운의 목소리를 가지고 문제를 일으켰나 하는 의미였다.
“제가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잘못한 게 없는데도 주눅이 듭니다. 목소리가 이러다 보니까 다툼이 생겨도 주변에서 먼저 웃거든요.”
“손 선생님. 혹시 공장에서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은 우리 딸아이가 학교 가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처음 있는 일입니다. 아들놈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장님이 나와 우리 가족을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함께 앉은 세 사람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손도운의 사연이었다.
“백 명입니다. 1백억 원을 손해배상에 사용해도 미라클이 팔려나가는 동안 저는 먹고삽니다. 대신 이 제품이 성공하면 회장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얼마라도 갚을 것 같아서 이렇게 매달리는 겁니다.”
“하아.”
이중성이 제안서에 시선을 떨궜다.
그의 말대로만 되면 베풀어준 은혜를 갚는 수준은 아니었다. 지금도 미라클의 성장세가 멈추지 않는 마당에 이 제품까지 연달아 성공한다면……?
그런데도 이중성이 주저하는 이유는 실패했을 때 미라클의 명성까지 말아먹을 정도로 위험한 제품이라는 데 있었다.
“합시다, 테스트.”
마침내 결심을 굳힌 이중성이 각오한 듯 말을 뱉고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지원할 거고.”
이중성이 고개를 돌린 곳에서 공장장과 이사가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해보겠습니다.”
“그럼 김 이사가 내부 공지를 올려. 1백 명으로 하고, 만약 부작용이 있으면 치료비 전액과 1억 원 한도까지 회사가 보상하겠다고 정해.”
“대표님?”
“손 선생님에게 손해까지 보상하라고 했다는 사실을 회장님이 아시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놀란 손도운의 반문을 이중성이 틀어막았다.
**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쉴 틈 없이 울리고 있었다.
[최상중입니다, 회장님.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조금 전에도 호텔에 파생거래 준비를 마친 최상중의 보고가 있었고,
[고생했습니다.]
천중명이 답문을 보냈다. 그리고 직후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꽤 먼 곳의 번호를 액정에 올린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 마타르 청장입니다.
마타르의 아랍어 뒤에서 익숙한 통역의 음성이 들렸다.
“잠시만요.”
천중명은 아예 스피커폰 세트에 휴대 전화기를 꽂고는 깍지 낀 손을 책상에 올렸다.
“말씀하세요.”
- 투자금액을 입금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우리 천 회장님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통화에서 상대방의 감정을 알아차리기에 억양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통역이 덤덤하게 전하고 있어서 이게 농담인지, 걱정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 농담이었는데 언짢으셨나요?
천중명의 반응을 이해한 것처럼 통역의 말이 건너왔고, 그 뒤에야 웃음이 오갔다.
- 천 회장님이 주실 기쁜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청장님. 우즈만 왕세자께도 안부와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주세요.”
- 그렇게 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잠시 뒤에 유진교가 입금을 확인한 증서를 들고 찾아오면 자금이 완성된다.
천중명은 왼손으로 눈썹을 매만지며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원·달러 환율이 벌써 1,319선으로 올라서 언론과 보도 매체들이 연신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유학 보낸 자녀를 둔 가정이 휘청이고, 수입을 위주로 영업을 벌이던 중소 업체들이 심각한 상황을 걱정하는 수준이었다.
천중명은 이마를 매만지며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지금 보고 있는 저 숫자가 올라갈수록 힘겨운 이들의 숨통이 막히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미래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과 이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다.
‘지독한 놈들.’
천중명은 눈을 찌푸리며 숫자를 노려보았다.
환율과 이자율로 흔들어서 그들이 가져가려는 것은 결국 토지와 건물이었다.
상위 10퍼센트가 개인소유 토지의 65퍼센트를, 상위 법인 1퍼센트가 전체 법인소유 토지의 75퍼센트를 소유한 현 상황에서 그걸 뺏기면 한국 경제는 영원히 끝이다.
이제 하나 남았다.
비트코인을 통해 숨은 돈, 적어도 1백조 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걸 알아야 적의 숨통을 제대로 끊을 수 있었다.
**
지경저축은행의 대출 담당 직원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2백몇십조 원을 투자받았다면서! 고작 아파트 담보 대출을 못 해주겠다는 게 말이 되냐고! 말이! 내가 이거 금감원에 고발해도 되겠어!”
차마 입을 열지는 못했지만, 직원의 표정은 오히려 그걸 기다리는 눈치였는데 고객은 또 그럴 마음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조금만 도와줘요. 시세의 75퍼센트까지만.”
“사장님은 이미 기존에 신용대출도 있으시고…….”
“아이, 씨! 누가 그걸 몰라! 그런 게 없었으면 은행엘 갔지, 저축은행에 왜 왔겠냐고! 그리고 지경저축은행 아냐! 매일 고객을 위한답시고 떠들면서 정작 이걸 못 해줘?”
“죄송합니다.”
“아, 나!”
고개를 모로 튼 고객이 한숨을 푹 내쉬었는데 그의 뒤로 상담을 기다리는 고객들이 줄줄이 앉아 있었다.
“좋아. 그럼 내가 금리를 좀 높게 맞으면 돼?”
“죄송합니다.”
“잘났다! 돈 많아서 좋겠다, 지경은! 오래오래 잘 먹고 잘살아라!”
화를 참기 어려웠던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고객이 고함을 버럭버럭 질렀다.
“전세금을 빼줄 수 있게는 해야지! 담보 75퍼센트 선에서도 대출을 안 해주면서 밖에 대출 상담은 뭐하러 붙였어!”
삿대질까지 해댄 그가 거칠게 문을 나서자 이번엔 커다란 백을 안은 자세로 나이가 제법 있는 여자고객이 상담창구에 앉았다.
“전세금을 돌려줘야 하는데요.”
“기존에 대출이 있으신가요?”
“없어요.”
“어디 아파트세요? 시세표 보고 말씀드릴게요.”
“저기……. 앞에 손님 이야기 들어서 그런데 시세표는 내가 알거든요. 시세의 80퍼센트 선이에요.”
“80퍼센트까지는 대출이 안 됩니다.”
상담직원의 표정을 살핀 여자고객이 뒤를 돌아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아파트가 다섯 채 있거든. 그냥 전세대출로 돌려서 해주면 안 돼요?”
“예에-?”
“내가 다른 사람을 구해올 테니까 그 사람이 전세를 들어오는 거로 해주면 어떠냐고? 대신 전세금 전액을 좀 해줘.”
은밀하게 건너온 조건에 상담직원은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큰일 날 말씀 마세요. 그리고 전세금 1백 퍼센트는 절대 못 나가요.”
“그러지 말고 좀 해 줘!”
상담창구 직원이 지친 얼굴로 맞은편의 대기석을 보았다. 어제부터 느닷없이 저 자리가 꽉 차더니 지금은 아예 대기 고객이 계속 20명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냐?’
그런 상담직원과 대기 고객들을 저축은행 직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