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
293. 뭘 하려고 이래? (1)
짧고 강렬한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내일부터 6개월에 걸쳐 지경그룹은 비상경영에 들어갑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입니다. 그 기간을 얼마나 잘 버티느냐에 따라 우리 지경그룹의 명망이 가릴 것입니다.”
회장단은 미국의 금리 인상, 그리고 심상치 않은 환율 변동에 따른 경고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계열사 회장과 부회장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그랬다.
“이에 대비해서 지경그룹의 전 계열사에 그룹발전본부에서 지역을 정하고,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회장단이 의아한 표정으로 천중명에게 집중했다.
“각 계열사의 회장과 부장들께서는 그룹발전본부에서 정해주는 지역을 확인하고 그에 상응하는 준비를 한 달 안으로 마쳐주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천중명이 왼편에 앉은 유진교를 바라보았다.
“그룹발전본부 유진교입니다.”
천중명의 날카로움과 달리 바닥에 깔린 듯 굵직한 유진교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나왔다.
“계열사별 지정 지역은 공문을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경기도와 충청도에 계열사가 집중되어 있어서 부득이하게 나누었습니다. 지역을 배당받은 계열사 회장은 할당된 인원을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고용하면 됩니다.”
회의를 시작하고 처음이었다.
계열사 회장과 부회장들이 놀란 눈으로 유진교를 보았고, 정면에 앉은 천호득은 황당한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계약 기간 3개월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고용합니다. 고용 일정과 인원은 그룹발전본부에서 별도로 통지할 예정이고, 자금이 부족한 계열사는 주식회사 지경에서 특별히 지원하겠습니다.”
유진교의 발표가 끝난 직후였다.
최만호가 어깨 위로 오른손을 들었다.
“말씀하세요.”
답은 천중명이 했다.
“대송자동차그룹 최만호입니다. 계열사별로 할당한 아르바이트 직원이라면 공동의 업무를 수행합니까?”
“계열사에 필요한 업무 보조, 그 외에 지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업무라고 보시면 됩니다.”
천중명의 답이 있고 나서 모두의 심정을 대신한 것처럼 “허.”하는 천호득의 탄식이 들렸다.
“지원이 필요할 정도로 경비가 들어가는 일입니다, 회장님. 손실로 인한 주주들의 손해를 책임져야 하고, 더불어 회계 처리상에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냉정한 최만호의 질문이 모두의 궁금함과 갑갑함을 대변한 눈치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회장단의 모습과 날카로운 눈으로 답을 기다리는 천호득의 표정이 그랬다.
“대송자동차그룹의 경우, 지금까지 이미 7조 원의 손실을 기록하고 있어서 더욱 부담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천중명은 마이크에 상체를 기울인 자세로 답을 꺼냈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고? 뭘 하려는 건데!
천호득의 입이 움찔했지만, 다행히 그는 초인적인 의지로 질문을 삼키고 있었다.
“경험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조만간 IMF 경제 위기와 같은 제2의 위기가 올지 모릅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도 지경그룹은 직원을 감원할 계획 따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흐음.”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숨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겠습니다. 당장 생계를 잇지 못해 좌절하는 이들을 도울 것이며, 그를 통해 가정이 파괴되는 비극을 막아낼 것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천중명에게 집중한 천호득의 입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이 사업을 위해 지경그룹은 총 20조 원의 예산을 사용합니다.”
“우-.”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탄식이 터져 나왔다.
“기용도 부회장.”
“예, 회장님.”
“지경전자가 1년에 사용하는 국내외 광고 비용이 얼마나 되지?”
“작년 한 해 13조 원을 집행했습니다.”
답을 들은 천중명이 회의장에 둘러앉은 회장단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최만호 회장.”
“예, 회장님.”
“대송자동차 그룹은 작년에 초당 1억3천만 원짜리 광고를 미국 시장에서 집행했습니다. 그렇게 작년 한 해 광고비로 4조7천억 원을 사용했는데 프로구단 운영비는 제외한 비용입니다.”
최만호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예.”라는 답을 대신했다.
“6개월입니다. 그 6개월 동안 지경전자와 대송자동차그룹의 홍보비를 줄여서 최저 임금 기준으로 아르바이트 직원를 고용할 경우, 우리는 70만 명의 최저 생계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기용도와 최만호가 마른침을 삼키며 천중명에게 집중하는 순간이었다.
“시장 점유율은 어쩔 생각이야? 그렇게 홍보를 하니까 판매가 일어나고 위치를 차지하지!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기용도입니다.”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천호득이 벌컥 손을 들어서 기용도를 검지로 가리켰다.
“지경전자의 시장 점유율을 1퍼센트 올리는 데 얼마의 예산이 필요해?”
“그건 상황과 시장의 성격에 따라서…….”
“닥치고 답을 해! 평균이라는 게 있잖아! 평균!”
“대략 25조 원이라고 예상합니다.”
홱 고개를 돌린 천호득이 원망하듯, 그리고 꾸짖듯 천중명을 노려보았다.
“기업이 왜 나라에서 해야 하는 일에 나서! 그룹이 아이들 장난 같아! 공돈을 퍼부어서 먹여 살리는데 20조 원이라니! 지경전자가 있기에 망정이지! 거기 너!”
“예, 회장님.”
최만호의 옆에 있던 최치국이 고개를 숙이며 얼른 답했다.
“네가 맡고 있는 회사의 1년 매출이 얼마야!”
“17조 원가량 됩니다.”
“너는!”
천호득의 시선을 받은 계열사 회장이, “2조7천억 원 정도입니다.” 라고 재빨리 답을 내놓았다.
“봤어? 회장이 얼마나 무섭고 큰돈을 사용하는지! 6개월에 20조 원? 그래 쓸 수 있다고 쳐! 그런데 그렇게 했다가 지경전자의 시장 점유율이 3퍼센트 떨어지면 그걸 올리는 데 75조 원이라는 돈이 들어가!”
말을 하다가 아예 분통이 터진 모양이었다.
“나를 왜 불렀어! 왜! 이런 꼴을 내가 그냥 넘어갈 것 같았어? 아무렴 내가 이런 짓에 동의하고 시시덕거릴 거라 생각했던 거냐고!”
최근에 웃는 얼굴이 잦았던 천호득이었다. 그런 그가 애써 눌러두었던 성격을 제대로 터트리고 있어서 당장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실제로 천호득이 주관하던 회장단 회의에 참석했었던 계열사 회장과 부회장들의 눈에 공포가 어려있을 정도이니 말 다 한 꼴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놀랍게도 천중명은 덤덤한 표정이었고, 심지어 흐뭇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천호득의 노한 얼굴 앞에서 말이다.
“염려하시는 일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총수님과 함께 일했던 직원 중에는 이 지경에서 30년 이상 근속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렵다고 그들을 내칠 수 없고.”
“뭐?”
“240조 원을 투자 받을 때 계획했던 일이었습니다.”
폐를 쥐어짠 것처럼 울려 나오는 천호득의 기막힌 웃음이 있었다.
“지금껏 지경을 이렇게 키워주신 고객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걸 회장이 나서! 왜! 생각 좀 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따라 할 그룹이 있을 것 같아? 왜 꼭 회장만 이러냐고!”
“지경그룹이라서 그렇습니다.”
고함을 지르던 천호득이 딸꾹질이 나온 사람처럼 껌벅 입을 다물었다.
“다른 그룹이 어떻게 나오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지경그룹은 고객의 어려움을, 우리 임직원의 힘겨움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나선 이유는 지경그룹이기 때문입니다.”
“흐허허허.”
바람이 새 나온 듯한 천호득의 웃음이 아예 울음처럼 들렸다. 마이크를 통해 그의 서글프고 허탈한 웃음이 회의실에 울린 직후였다. 아예 졌다는 표정으로 천호득이 회장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침묵 속에서 천중명은 마이크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임직원의 직계 가족은 아르바이트 인원에서 제외합니다. 또한, 부당하게 자금이 집행된 사실이 발각될 경우, 엄중하게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 외에 회계처리와 부당지원에 대한 책임은…….”
긴장이 훅하고 회의장을 덮친 다음이었다.
“그룹의 최고 책임자인 내가 지겠습니다.”
천중명의 말이 떨어진 직후에 “후.”하는 탄식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세부사항은 그룹발전본부를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질문 있습니까?”
질문을 던진 천중명이 천호득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얼굴이었는데 천호득은 흔들리는 고개로 답이 없었다.
“그럼 이것으로 회장단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천중명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회장단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고, 아직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못한 박승양이 조금 늦었다.
**
이사까지 고민했던 송순주는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또래의 방문을 받았다.
“우리 아들이 이번에 좀 어렵다는데 융통 좀 안 될까? 정 뭐하면 내 집이라도 잡힐 테니까.”
“죄송한데요, 그럴 여유가 없어요. 은행에 알아보면 어때요?”
“대출은 벌써 받았지. 그러지 말고 딸에게 이야기 좀 해줘요. 그룹 사모님이니까 어떻게든 융통이 될 거 아냐? 이번 고비만 넘기면 내가 이 은혜 잊지 않을게.”
“죄송해요.”
이상하게 송순주는 죄지은 것도 없는데 고개를 조아렸다.
“선영이 엄마! 우리가 앞집 뒷집 마주하고 산 게 20년이야, 20년! 내가 그 돈 떼먹을까 봐 그래? 우리 아들이 이번 고비만 넘어가면 다 갚아준다니까!”
바글바글한 파마머리를 한 또래는 심지어 안을 휘휘 둘러보기까지 했다.
“우리 아들 말 들어보니까, 선영이가 마음만 먹으면 2십억, 3십억은 얼마든지 돌린다던데? 그러니까 말 좀 잘해서 우선 3억 원만 융통해줘요!”
“죄송합니다.”
“그럼 우선 1억 원이라도.”
매달리던 또래 아주머니가 결국 눈꼬리를 위로 치켜떴다.
“있는 사람들이 더한다더니! 지독하네. 지독해!”
그런 뒤에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콰앙!
“회장 사모님 되더니 사람이 어찌 저렇게 바뀌어? 이래서 사람은 높은 자리에 가면 알아본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언제까지 잘 되나 보자! 하늘이 있어! 하늘이!”
대문을 세게 닫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한 또래는 골목을 따라 걸으며 들으란 듯 구시렁거렸다.
**
집으로 가겠다는 천호득을 천중명은 끝내 집무실로 이끌었다. 소파의 상석 자리에 천호득의 휠체어를 놓았고 천중명은 그 앞의 왼편에 앉았다.
오미자차와 한과가 들어오도록 천호득은 말이 없었다.
“아버지. 이거 좀 드세요.”
“일없어!”
“목 아프실 것 같은데요?”
“이 사람이 진짜!”
천호득의 매서운 눈초리 앞에서도 천중명은 꿋꿋하게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왜 이래! 싫다잖아!”
“한 모금만 하세요.”
확 쳐낼 것처럼 잔을 노려보던 천호득이 흔들리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크흐.”
“어떠세요?”
“셔!”
천호득의 모습이 뭐가 좋은지 천중명은 연신 웃는 낯이었다.
“내가 서운하지 않아?”
“무슨 말씀이세요?”
“회장이 투자받은 돈을 알아서 쓴다는 건데 회장단 앞에서 고함을 질렀잖아. 망신 준 내가 밉지 않냐고?”
보기 좋게 웃은 천중명이 한과를 집어서 반으로 쪼갰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꾸짖어 주실 때 진짜 좋았어요.”
“뭐라는 거야?”
“최근에 힘 빠지신 것처럼 보였는데 아까 저는 물론이고, 계열사 회장과 부회장을 다그치실 때 정정하신 모습을 보는 게 좋더라고요.”
“말은 진짜! 사람이 변한 거야, 아니면 회장을 하더니 능구렁이가 돼가는 거야? 이럴 걸 알면서 나는 왜 불렀어?”
천중명이 들고 있던 한과의 절반을 내밀자 속없이 천호득은 그걸 또 날름 받아먹었다. 그런 뒤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게 웃겨서 천중명은 또 웃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지 않았으면 오늘 회장단이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을까요?”
“응?”
한과를 삼키던 천호득의 고개가 불쑥 앞으로 나왔다.
“다들 아버지와 비슷하게 생각했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꾸짖으실 때 속이 후련했을 테고, 반대로 아버지도 꺾지 못한 일이니 제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죠.”
천호득은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또 하나는 최악에도 우리 그룹에는 총수님이 계시구나 하는 믿음도 생겼을 겁니다. 오래된 회장들에게는 그게 큰 위안이 되었을 테고요.”
“그게 그렇게 염려됐으면 아예 바꾸면 되잖아.”
“아버지와 함께 열정을 바쳤던 사람들입니다. 잘못한 일이 없는데 단지 제가 회장을 맡았다고 그들을 내치는 건 그룹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천호득이 “끄응.” 하면서 천중명을 노려보았다.
“자신 있는 게지?”
“예.”
천호득의 질문에 뜻밖에도 천중명의 답은 확실했다.
“뭘 하려고 이래?”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입니다.”
“흐헤헤헤헤헤-.”
저러다가 숨이 넘어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천호득의 웃음은 길었다.
“차 드세요.”
그래서 천중명이 오미자차를 권했고, 천호득은 아이처럼 그걸 고개만 내밀어 마셨다.
“참! 어제 어땠어?”
“예?”
“밤에 기운이 뻗치거나 하지 않았냐고?”
“잠 잘 자게 해주는 약인 줄 알았는데요? 평소보다 일찍 잤습니다.”
“에이! 망할 돌팔이!”
잘 이어지던 대화가 느닷없이 엉뚱하게 튀었다.
높다랗게 떠오른 태양에서 내리쬔 볕이 집무실의 창틀에 겨우 걸쳐 있는 정오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