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
292. 너무 빨라 (2)
송문철이 천중명의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그룹 부회장인 천상기와 유진교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서 오세요.”
천중명에게 인사를 마친 송문철은 곧장 천상기와 유진교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네요.”
유진교야 냉철하고 엄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고,
“지경증권 회장이 이 사람이야?”
개차반에서 인격을 갖춰 돌아왔다는 천상기야 더 설명해봐야 입 아픈 인물이었다.
특히 고함을 지르며 굴뚝을 올라가는 천상기의 영상은 아직도 인터넷을 떠돌며 울적한 사람들과 누군가에게 무시당했던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최고의 장면으로 꼽히지 않는가.
“우선 식사부터 하죠.”
“예, 회장님.”
천중명과 함께 움직인 일행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점심도 도시락을 드셨는데 괜찮으십니까?”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솔직히 라면이나 김밥이 그립습니다.”
“지금이라도 준비하라고 지시할까요?”
“이런 도시락을 두고 그런 짓을 하면 정말 욕먹습니다.”
유진교가 분위기를 억지로 풀어주는 가운데 테이블에 둘러앉은 네 사람이 젓가락을 들었다.
“무슨 일인가요?”
밥을 뜨면서 천중명이 송문철에게 건넨 질문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중요한 정보를 이야기하라고?
잠시 멈칫했던 송문철은 옆에 내려놓은 가방에 몸을 돌렸다. 천중명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자료는 나중에 봐도 됩니다. 내용만 전해주세요. 앞으로 이런 자리가 자주 있을 텐데 밥 먹는다고 거르고, 자료 펼치느라 시간 허비할 것 없습니다. 우선 보고부터 듣고 자료는 나중에 검토하죠.”
그룹회장 천중명과 부회장 두 명의 시선을 받은 송문철은 조금 전에 삼킨 샐러드가 목에 딱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어서 우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 금융 시장에 투자 등록한 개인과 법인이 모두 4만6천3백 곳 정도 됩니다. 그중에 조세회피처에 있는 법인은 모두 16.4퍼센트이고, 그들이 매입해서 보관하는 우리나라 국채와 회사채 물량이 37조 원가량입니다.”
“드시면서 하세요.”
천중명의 권유에 따라 송문철이 젓가락을 움직였다.
“조세회피처에 있던 우리나라 국채가 시장에 나오면 금리변동이 더 급격해지겠군요.”
“예, 회장님. 금액으로 37조 원이니 되살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시장에 채권이 나오는 순간에 금리가 올라가고, 다시 사들인다고 해도 금리가 내려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혹시 이미 짐작하고 있었나?
천중명의 태도를 보며 송문철은 볼이 화끈한 느낌이었다. 이미 알고 준비했던 일을 뒤늦게 호들갑 떨며 달려온 거라면 증권사를 책임진 수장으로 부끄러운 모습이라 그랬다.
“다른 곳에서 더 나올 물량은요?”
“금리 인상을 노리고 매도하려는 세력을 미리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점이 가장 염려스럽습니다.”
세 사람의 속도에 맞추느라 송문철은 밥을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지경증권 채권팀에서 채권을 매입할 수는 있죠?”
“그렇……니다.”
하필 밥이 잔뜩 담겨 있어서 송문철의 대답이 이상하게 들렸다.
“그 문제는 차 마시면서 의논하죠.”
그때부터 천중명은 유진교와 천상기에게 질문을 던졌다.
“부동산은 어때?”
“검토해서 동생회장님 지시대로 따로 분류해놨어. 지금 평균경락률이 68퍼센트 수준인데 그걸 다시 1백으로 바꿔서 60퍼센트 수준에 매입하는 게 적당한 가격 같아.”
“그럼 지금 시세의 얼마 정도야?”
“대략 40퍼센트 언저리.”
오징어채를 집었던 천상기가 엉켜 있는 걸 툭툭 털어낸 뒤에 입으로 가져갔다.
“물건을 뺏기지 않을 자신은 있지?”
“저쪽에서 얼마에 달려들지는 모르는데 경매에 들어가면 그 분야 선수들을 동원할 거야. 그런데 동생회장님.”
천상기가 불렀고, 천중명은 시선만 주었다.
“경매에 들어가기 전에 헐값에 거래되는 게 문제야. 그것까지 내가 잡는 건 아무래도 버거워.”
“그쪽은 박승양 회장에게 맡겨.”
박승양의 이름을 들은 천상기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맺힌 게 아직 남은 모양이었다.
“개인적으로 부동산을 매입하지 마. 나중에 문제 돼.”
“알았어.”
그룹회장과 부회장이라기보다는 사이가 별로 안 좋은 형제가 주고받는 듯한 대화를 끝으로 식사가 대충 마무리됐다.
네 사람은 소파로 움직여 커피를 앞에 두었다.
“자료는요?”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두 부밖에 준비해오지 못했습니다.”
“나는 봐야 머리만 아프니까 동생회장님 한 부, 나머지 하나를 유 부회장과 송 회장 당신이 함께 봐.”
말을 마친 천상기는 실제로도 관심 없다는 투로 상체를 등받이에 기대기까지 했다.
“37조 원이면 감당할 만한데 여기에 숨겨진 게 나온다면 그때 상황에 맞춰서 해결할 수밖에 없겠네요.”
“예, 회장님.”
“이런 숨겨진 방법을 찾아내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큰 도움이 됩니다.”
천중명이 자료에서 시선을 들었을 때, 송문철은 확신했다. 조세회피처에서 채권이 나올 것을 젊은 회장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고생했다는 인사를 건넨다는 것도.
두 명의 부회장 앞에서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라는 이유 말고 송문철은 짐작 가는 것조차 없었다.
“송 회장님.”
그때 천중명이 나직하게 불러서 송문철의 생각을 잘랐다.
“앞으로도 뭔가 걸리는 점이 있다면 잊지 말고 알려주세요. 내일부터는 시간, 장소, 체면 따위 따질 것 없습니다. 하나라도 놓치는 것이 없도록, 혹시 실수하지 않도록 부탁합니다.”
“예, 회장님. 명심하겠습니다.”
이제야 송문철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짐작했다.
이 싸움은 우리 회장님이 이긴다.
송문철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를 천상기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았다.
**
오후 8시쯤 퇴근한 천중명은 평창동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듯 골목을 쭉 올라간 승용차가 왼편으로 돌자 높다란 담장이 나타났고, 좀 더 달리자 안쪽에 천호득의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중명의 승용차가 멈춘 다음이었다.
집 앞에 있던 직원들이 다가와 문을 열었다.
“총수님은?”
“계십니다.”
“고생 부탁해.”
“감사합니다, 회장님.”
직원들에게 감사를 표한 천중명은 대문을 들어서서 어둠과 어우러진 조명을 배경으로 계단을 올랐다.
늘 천호득이 즐겨 앉던 테이블이 외롭게 홀로 있는 옆을 지나 현관에 들어섰을 때, 장만섭과 송달순, 메이드들이 서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저 왔습니다.”
“저녁은?”
“먹었어요.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서재에 계셔.”
“바로 가볼게요.”
이은명과 인사를 나눈 천중명이 서재 문을 두드린 다음이었다.
“들어와.”
천호득의 투박한 음성이 대꾸처럼 건너왔다.
“저 왔습니다.”
“어쩐 일이야?”
손짓으로 의자를 권한 천호득이 궁금하고 반가운 시선을 천중명에게 주었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
“회장이 속만 썩이지 않으면 괜찮아.”
하여간 천호득은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민세조 수석에게서 연락 있었습니까? 두 번 만났는데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6시간 뒤에 미국에서 금리 인상이 발표돼. 알고 있어?”
뜬금없는 말을 건넨 천호득이 고개를 기울여 천중명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몰랐어?”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시간까지는 몰랐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회장이 피 같은 돈을 엉뚱한 곳에 쏟아붓는다니까 자연 관심이 가지. 웃기는!”
천호득은 고개를 비틀 듯이 해서 심통 맞은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1조 원이 얼마나 크고 끔찍한 돈인 줄 알기나 해? 아랍의 인간들이야 땅 파서 얻은 돈이니까 240조 원을 투자할 수 있지. 잃어도 다시 땅 더 파면 되니까.”
“저야 실패하면 아버지 모시고 다시 시작해야죠.”
“뭘? 어떻게?”
“제가 벤처사업부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좋은 업체 골라서 한 번 키워보는 건 어떠세요?”
천중명의 대답이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는 천호득의 모습이 그랬다.
“하여간 말은! 저러니 혹시 말려줄까 했던 민세조 수석이 오히려 자리를 걸고 지원하겠다고 달려들지.”
“그랬습니까?”
천중명의 넉살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고약한 표정과 눈매를 만들었지만, 천호득은 그의 눈에 담긴 애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자신 있어?”
“아버지가 도와주시면요.”
“오늘 왜 이렇게 뻔뻔하게 이래?”
“내일 오전 10시에 회장단 회의가 있습니다.”
천호득은 당장 대꾸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참석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제가 앞에 서고, 형이 돕고 있지만, 누가 뭐라 해도 지경그룹의 총수는 아버지시거든요. 제가 하려는 일에 힘을 실어주세요.”
이제는 흔들리는 것이 익숙한 천호득의 고개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눈이 노려보는 것처럼 천중명을 향해 있었다.
“정말 바닥까지 모두 드러낼 생각이야?”
“아버지.”
“말해.”
“어설프게 뒤에 뭔가를 남기려고 하면 절대 이기지 못할 상대입니다. 두 가지는 지키겠습니다. 지경의 뿌리, 그리고 지경의 정신, 이렇게 두 가지요.”
천중명은 휠체어의 손잡이에서 떨고 있는 천호득의 손에 시선을 주었다. 그런 뒤에 손을 뻗어 떨리는 천호득의 손을 잡았다.
“결과가 안 좋으면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천호득의 볼이 씰룩했다.
“형이…….”
“시끄러워. 내일 오전 10시지. 본사?”
고개를 든 천중명이 “예.” 하고 답했다.
“어디서 협박을 해? 꼴도 보기 싫어. 어여 가!”
“아직 차도 못 마셨어요.”
“차는 집에도 있고, 정문 앞에도 있고. 필요하면 내가 한 대 뽑아줄 테니까 집에 가서 제발 손자든, 손녀든 좀 만들어.”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호득의 뒤로 움직였다.
꾹꾹. 꾹꾹꾹.
“아파!”
“왜 이렇게 뭉치셨어요?”
“회장이 속 썩여서 그렇지.”
계속 툴툴대면서도 천호득은 천중명의 손길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리고 그때 문이 열리며 쟁반을 든 이은명이 들어왔다.
“아버지께서 준비해 놓은 한약이야.”
“예?”
천중명을 향해 이은명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저 아직 괜찮아요.”
“얼른 마셔!”
천호득이 버럭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천중명은 그릇을 받아서 입으로 가져갔다.
“흐헤헤. 흐헤헤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천호득의 웃음이 있었다.
**
화요일 아침의 보도는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와 금리가 역전됐다는 소식과 부동산 담보 대출의 규모, 1천조 원에 달하는 가계 부채 부담 등의 보도가 줄줄이 이어졌다.
오전 9시 40분에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이 주관하는 지경그룹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검은색 승용차들이 줄줄이 본사에 몰려들었다.
지경그룹만이 아니었다.
대송자동차 그룹의 최만호와 세 명의 회장, 부회장, 대송그룹 윤병지 회장과 계열사 회장, 부회장들 역시 속속 도착해서 회의실로 향했다.
“오늘 특별한 일이 있습니까?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도착하는 계열사 회장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질문을 던졌는데 대꾸하는 이는 없었다.
“뭐야, 이거? 표정들이 왜 저렇게 무거워?”
“240조 원이라는 투자까지 받았는데 무슨 일이 생겼나?”
기자들이 질문을 주고받았을 때였다.
대형승용차가 지경그룹 본사 앞에 멈췄다.
“천호득이다!”
“총수까지 나왔어! 이거 크다!”
기자들이 우르르 승용차에 달려들었다.
“총수님! 직접 나오신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카메라의 셔터 소리와 질문 사이에서 승용차의 문이 열렸다. 그런 뒤에 조수석에서 내린 장만섭이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냈고, 송달순의 부축을 받은 천호득이 그리 옮겨 앉았다.
기름 발라서 넘긴 머리, 셔츠, 넥타이, 정장, 그리고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를 한 천호득이 본사 건물을 올려본 뒤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실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로비를 향해 움직였다.
“이게 이상한데? 총수까지 나올 일이 뭐가 있지?”
비서실 직원들의 통제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기자의 혼잣말이 본사 건물 앞을 맴돌았다.
계열사 회장단이 모인 회의실은 침묵이 감돌았다.
전면 가운데 두 자리가 비어 있고, 그 좌우로 천상기와 유진교가 앉아 있었으며, 앞으로 기다랗게 이어진 테이블에 계열사 회장과 부회장이 엄숙한 얼굴로 있었다.
직급이 밀리는 박승양이 저 끝 테이블에 앉아서 좌우를 힐끔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다들 굳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총수님과 회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비서실 직원의 말과 동시에 부회장과 회장단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휠체어를 탄 천호득이 들어섰고, 그 뒤로 천중명과 비서실장과 비서실 직원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천호득이 빈자리에서 오른쪽을 차지했고, 천중명이 왼쪽에 섰다.
회장단을 둘러본 천중명이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부회장 두 명을 시작으로 회장단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움직인 회장단이 옷깃을 여미는 동안 천중명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런 뒤에 얇고 검은 마이크를 향해 인사말을 전했다.
물병, 물잔, 주스, 메모용지, 펜, 그리고 회장단의 자리마다 검은 마이크가 있었다.
“오늘 특별히 총수님의 참석을 요청드렸습니다. 그만큼 지경그룹의 미래와 관련해 중요한 결단을 내리려 합니다.”
확실히 웃지 않는 천중명의 표정과 음성은 묵직하고 매서웠다.
“어제 자정이 지난 시간, 오늘 새벽에 미국이 금리를 인상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앞으로 경영 환경이 극도로 악화될 것이라 예상됩니다.”
테이블에 두 손을 올린 천중명의 음성이 회의실을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긴박하고, 위험한 시기입니다. 지금부터 내가 지시한 사항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다른 말, 부정적인 느낌의 인터뷰,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회장단은 언제고 사임하셔도 좋습니다.”
천호득이 작은 눈을 움직여 천중명을 힐끔 보았다.
도대체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지?
그가 놀라 바라볼 정도로 지금의 천중명은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회장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말이지, 회장이 저런 모습쯤 보일 때도 있어야지.
연륜이 가득한 천호득의 눈에 감춘 흐뭇함을 유진교와 천상기만 알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