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
291. 너무 빨라 (1)
점심시간을 코앞에 두고서도 이명선은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파생상품이라는 게 그렇다. 이렇게 평온하게 서너 틱을 움직이다가 느닷없이 홱 열 틱, 스무 틱을 위아래로 움직이니 당최 시선을 뗄 방법이 없었다.
똑똑똑.
그녀가 다섯 대의 모니터를 돌아보며 각종 지표를 확인할 때였다.
똑똑똑.
“이 과장? 안에 있어?”
박승양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 뒤로 두 명이 더 딜링룸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이명선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요한 분과 함께 왔는데 인사를 먼저 할까?”
“예.”
이명선이 반쯤 모니터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우리는 괜찮으니까 포지션을 먼저 정리하세요.”
함께 들어온 두 사람 중 상급자가 분명한 남자가 모니터를 손으로 가리켰다.
“네, 감사합니다.”
큰 거래는 오전 11시경에 이미 정리해서 지금 있는 주문이라야 테스트 성격의 몇 개밖에 되지 않는다. 자리에 앉은 이명선이 빠르게 포지션을 정리했고, 박승양과 함께 온 두 사람이 그 모습을 날카롭게 지켜보았다.
“죄송했습니다.”
거래를 정리한 이명선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래하는 사람을 불쑥 찾아온 게 잘못이지! 그렇더라도 인사를 하자고. 여기 이분이 그 유명한 지경증권 송문철 회장님. 그리고…….”
“최상중 상무입니다.”
박승양이 이름을 외우지 못한 것을 알아챈 최상중이 짧게 고개를 숙이며 본인을 소개했다.
“이 친구가 이명선 과장입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발탁하신!”
“이명선입니다.”
이명선과 인사를 나눈 송문철과 최상중이 이제야 여유 있는 태도로 딜링룸을 살폈다.
“자격증 취득한 게 있나요?”
“투자자산운용사와 증권투자권유대행인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혼자 딜링룸을 꾸려나가는 게 대단하네요. 하루 거래금액이 얼마나 되나요?”
“박승양 회장님과 증권사 계좌를 합쳐서 대략 2천5백억 원쯤 됩니다.”
송문철이 대단하다는 듯한 눈매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5조 원까지 거래했었다고 들었는데?”
“당시에는 천중명 회장님께서 포지션을 정해주셔서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허허.”
딱 부러지는 이명선의 답이 흡족했던 모양이었다.
“점심 함께했으면 싶은데 어때요?”
이런 자리에 함부로 끼어들어도 되나? 예의상 건네는 제안일지 모르는데?
‘간다고 해! 무조건 가야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슬쩍 시선을 든 이명선을 향해 박승양이 심하게 눈짓을 날려댔다.
“감사합니다.”
의자를 안으로 밀어 넣은 이명선이 박승양의 옆으로 움직였다. 일행이 복도로 나섰을 때, 남부증권 회장 문요양이 세상 잃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식사 가는 길인데 어떠십니까?”
“저는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그때 모시겠습니다.”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문요양이 한 걸음 물러났고, 그렇게 네 사람은 식당으로 움직였다. 메뉴는 박승양이 극구 추천한 메뉴인 특설렁탕이었다.
“엊그제 주가 폭락을 예견하고 선물과 풋옵션에서 커다란 수익을 냈다고 들었거든요. 그때 어떤 지표를 참고했나요?”
식사하는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질문 같은데 답을 하는 이명선이나 그걸 듣고 있는 송문철, 최상중의 눈빛을 보면 완벽하게 면접 분위기였다.
‘햐. 어느새 커서.’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이 이럴까.
천하의 박승양이 숟가락을 제대로 놀리지 못한 채 감동 어린 눈길로 이명선을 바라보는 앞이었다.
“남부증권에 이 정도를 가르쳐줄 수준의 매니저가 있나?”
송문철이 고개를 돌려 질문했고,
“아무래도 이명선 과장이 홀로 얻은 것 같습니다.”
최상중이 본 느낌을 얼른 꺼내놓았다.
“이런! 질문은 천천히 할 테니까 어서 식사해요.”
궁금한 것을 대강 해결한 뒤에야 송문철이 권해서 20분쯤 편안한 대화로 특설렁탕을 먹었다.
“커피 드셔야지? 어설픈 데 가서 돈 쓰느니 증권사로 가서 편안하게 드십시다.”
“그러시죠.”
송문철이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네 사람은 남부증권으로 올라가 회의실에 자리 잡았다.
“회장실이 좋은데. 막 써도 괜찮은데.”
박승양의 권유가 있었으나 송문철은 회의실을 택했다.
“우리 증권사에 딜링룸이 있다는 사실이야 이명선 과장도 잘 알 테고.”
“네.”
“그동안 이명선 과장이 거래했던 기록을 그룹 회장님께서 계속 확인하셨던 모양이에요.”
“예?”
“몰랐나?”
“네, 죄송합니다. 회장님.”
송문철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얼굴로 박승양을 돌아보았다.
“그건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담스러워할까 봐서요.”
박승양이 새삼 배려 깊은 얼굴로 답을 내놓았다.
그래서였구나!
매일 업무가 끝날 때면 남부증권 회장실에 일처럼 들렀던 이유가 거래 기록을 가져가기 위해서, 그리고 그걸 천중명 회장님께 보고드렸던 거구나!
두 사람의 눈빛과 표정을 보며 송문철과 최상중은 내막을 대강 눈치챈 표정이었다.
“흠. 대강 내용은 알게 된 것 같고. 내가 이렇게 온 이유는 우리 그룹 회장님의 특별한 지시가 있어서 그렇거든요.”
천중명의 지시란 말에 이명선의 표정이 반짝였다.
“지금껏 궁금했는데 파생계의 독거미라는 별명이 왜 나왔는지 지금 눈빛을 보니 이해할 것 같네.”
가벼운 농담을 던진 송문철이 만족한 눈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추천하셔서 왔어요. 이명선 과장이 우리를 좀 도와줬으면 싶어. 대신 일이 끝날 때까지 숙식을 함께할 수 있는데…….”
“괜찮으시면, 제게 기회가 있다면 해보고 싶습니다.”
“어떤 일을 할 건지 이명선 과장은 아직 제대로 듣지도 못했는데?”
“천중명 회장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제가 도움 된다면 어떤 일이든 하겠습니다.”
“허허.”
송문철은 흐뭇하게, 최상중은 ‘이 친구 봐라?’ 하는 얼굴로 이명선을 보았다.
“24시간 거래인데 팀이 있나?”
“지금 함께 일하는 두 명이 있습니다만 보조 수준이어서 거래를 맡기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요. 그럼 여기 박 회장님과 내가 문 회장에게 이야기해 놓을 테니까 수요일 오후부터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오늘과 내일 이곳을 정리하고 간단한 옷과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세요.”
이명선이 긴장한 채 송문철의 지시를 받은 다음이었다.
“편의점이나 백화점에서 살 수 있는 건 필요할 때마다 구입해 줄 테니까 너무 세세하게 챙기지 않아도 됩니다.”
최상중이 보강하는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자, 그럼 우리는 이만 일어날까?”
송문철을 시작으로 네 사람이 비슷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먼저 출발하십시오. 저는 여기 이 과장과 이야기를 좀 나누고 문 회장을 만난 뒤에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인사를 나눈 송문철과 최상중이 회의실을 나섰다.
회의실 앞까지 따라나섰던 박승양이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신 뒤에 고개를 돌렸다.
“다 컸다, 우리 이 과장. 이제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
“갑작스러워서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회장님.”
“그런 일이 있어. 천중명 회장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일이. 비밀을 지키느라고 급하게 움직이는 건.”
“지난 수익을 계속 보고하셨어요?”
“내가 누구야? 음핫핫핫핫! 회장님의 지시가 있기도 했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고맙습니다. 실망하시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이 과장은 믿지. 암!”
박승양은 전에 없는 자상한 얼굴로 이명선을 향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진광효는 테드 케블린을 맞아 그의 집무실에서 차를 권했다.
“거양자동차의 트럭 부분은 없던 일로 하기로 했소. 비트코인 채굴장과 거래소는 하루에 한화 1조 원을 지불하면 중단시키기로 했고.”
“잘하셨습니다. 부동산 매입 준비는요?”
“이미 한국의 대부업 쪽으로 2조 원씩 두 번 건너갔고, 빌딩을 매입할 경우에는 미국의 부동산 중개회사 네트웍스를 통해 인수하기로 계약을 마쳤지요.”
답을 건넨 진광효는 숨을 돌리는 것처럼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의 등 뒤로 정원이 멋지게 펼쳐졌는데 군데군데 정장 차림의 조직원들이 껄렁하게 서 있는 모습이 창을 통해 보였다.
“이번 주부터라더니 진짜 시작은 언제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상황은 금주 중에 보실 겁니다.”
“한국의 젊은 회장이 설치던데?”
진광효의 질문에 테드 케블린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나름 준비한 모양인데 우리가 감춰둔 것까지는 짐작 못 한 눈치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런 경험이 풍부합니다. 남미를 보십시오.”
“흐음.”
욕심이 불쑥 올라온 모양이었다.
한국의 힘겨운 상황을 이용해 빌딩과 땅, 돈을 거머쥐고 싶은 진광효가 입술을 내밀며 욕심을 드러냈다.
“초반에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장기전으로 끌고 갈수록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의 그 건방진 젊은 회장이 가진 걸 모두 털리는 꼴만은 속히 보고 싶소.”
“그때가 되면 우리 진 총재가 세계적인 갑부에 올라 있겠군요.”
“흐하하. 나야 부동산 쇼핑이나 하는 수준이지만, 우리 쇼더앤톨먼은 한국을 아예 탈탈 털어가는 거 아니오?”
진광효의 호탕한 감탄에 테드 케블린은 묘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
월요일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한 천중명은 오전에 메모로 올라와 있는 기사 요약분들을 살폈다. 그동안 솔솔 풍기던 경제 위기설이 이제야 좀 더 강한 어조로 보도되고 있었다.
똑똑똑.
책상에 앉은 천중명이 고개를 들었을 때 유진교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소파로 옮겨간 천중명의 앞에 유진교가 결재판을 놓아주었다.
“홍콩에 설립한 법인입니다. 우즈만 왕세자와 마타르 청장의 요구를 반영했고,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지분을 나누었습니다.”
결재판 안에는 세 개 법인의 이름과 지분구조, 주소 등이 올라와 있었다.
“이 계좌를 저쪽에서도 알고 있나요?”
“카리프 부청장을 통해 이미 전달했고, 우리 시각으로 오늘 오후에 입금될 거라는 통화도 있었습니다. 나머지 자금은 순차적으로 주식회사 지경을 통해 움직일 예정입니다.”
보고를 마친 유진교가 딱딱한 표정을 조금이나마 풀었다.
“세계 20대 부자 안에 들어가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왕 시작한 일이니 긍정적으로 판단하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보고를 마친 유진교의 태도에 여유가 묻어났다.
“그룹발전본부에 커피를 선물하신 덕분에 점심은 저와 공정규 기획실장이 냈습니다.”
천중명이 웃은 다음이었다.
“지경 캠퍼스의 메뉴가 워낙 좋아서 점심을 따로 사려면 제법 지출이 큽니다.”
천중명은 웃으며 유진교의 말을 받았다. ‘지경 캠퍼스’는 구내식당과 휴게실의 다른 이름이었다. 간단한 간식도 제공되는데 회장이 그런 곳에 나타나면 직원들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 차마 내려가지는 못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천상기, 박승양, 곽대출, 송문철이 뛰고, 뒤로 저축은행, 대부업체, 벤처사업부가 움직인다.
천중명의 뒤로 지경그룹이 버티고, 그 안에 유진교와 공정규, 법무팀장 고강도가 버티고 있으며, 지경전자를 비롯한 계열사와 대송자동차그룹, 대송그룹도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황성규와 윤만석이 정보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움직이는 것은 내놓지도 못한다.
거대 자본과의 본격적인 싸움을 알리는 회장단 회의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준비한 회장단 회의에 다른 지시사항은 없으십니까?”
“아뇨. 없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유진교가 나간 뒤에 천중명은 다시 책상으로 움직였다. 그런 뒤에 모니터에 올라온 숫자를 보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원·달러 환율이 어느 틈에 1,300선을 넘어서 1,304를 두고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
지경증권으로 돌아온 송문철 역시 굳은 표정으로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 빨라.’
한 방에 충격을 주려는 의도야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고금리로 때리려 할 때는 환율을 이렇게 급격하게 높이는 것이 오히려 방해 요인이 된다.
천중명이 알려준 빤한 방법 외에 분명 숨겨둔 패가 있을 게 분명했다.
‘뭐지? 뭐가 있는 거지?’
특별한 이유를 만들지 않은 채 환율을 이렇게 높이는 이유?
모니터를 보던 송문철이 급하게 상체를 세웠다. 그런 뒤에 구내전화기를 들고서 번호를 눌렀다.
- 최상중입니다.
“최 상무. 난데. 지금 우리나라에 등록되어 있는 외국인 투자자 숫자가 얼마나 되지?”
- 개인과 법인 합쳐서 4만3천을 조금 웃돕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채권을 파악할 수 있나? 김치본드, 상장사 채권, 전부!”
- 바로 확인하고 보고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해?”
- 두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알았어.”
수화기를 내려놓은 송문철은 바로 휴대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회장님. 송문철입니다. 5시 이후에 시간이 어떠십니까?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급한 일인가요?
“조세피난처가 수상합니다, 회장님. 미국 채권 매각, 미국 금리 인상의 여파가 몰려올 때 우리 국채를 매각하면 상황이 심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채권 금리가 1퍼센트 오르면 시중 금리가 2퍼센트 상승합니다.”
- 저녁을 같이하죠. 5시 30분까지 오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 시간에 뵙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송문철이 모니터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