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
290. 회장님은 확실히 좀 특별하십니다 (2)
월요일 아침 일찍 집무실에 들어선 천중명은 책상에 올라온 보고서와 결재서류를 먼저 살폈다.
“회장님. 커피 괜찮으십니까?”
“부탁해.”
늘 같던 집무실이었다. 변한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오늘따라 어쩐 일인지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부속실 직원이 꽤 멀리 느껴질 정도로 둘러보는 집무실은 넓었다.
책상에서 일어선 천중명은 산책하듯 건너편으로 움직여 집무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뒤편의 유리를 통해 빌딩들이 줄줄이 서 있고, 왼편에 책장과 옷장, 오른쪽에 소파, 그리고 회의실과 접견실로 통하는 다른 통로가 있었다.
운동기구와 잠을 잘 수 있는 휴게실은 아직 한 번도 이용해 보지 못했다.
몸을 돌린 천중명이 책상을 짚은 자세로 창밖을 보고 있을 때였다.
부속실 직원이 들어와 책상에 커피를 놓아주었다.
이 시간에도 환율은 변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국의 국채를 매도하며 이자율을 조절하고 있었다.
이자의 변화는 파도가 밀려온다.
미국 국채의 매각으로 1퍼센트 오른 이자율이 물결처럼 달려와 한국에 도착할 때면 대략 1.5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거세게 변한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평소와 다른 천중명의 모습이 걸렸는지 부속실 직원이 공손하게 질문을 건넸다.
“유진교 부회장이 출근하셨나?”
“확인하겠습니다.”
“알려주고, 출근하셨으면 커피를 그곳에서 마시고 싶으니까 번거롭지만 그렇게 준비 부탁해. 그리고 가는 길에 발전본부 직원들 전체에게 커피도 전해주고 싶은데?”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회장님.”
부속실 직원이 나간 뒤에도 천중명은 책상을 짚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얀 셔츠, 주황색 넥타이, 정장 바지와 벨트를 한 지경그룹 천중명이 집무실의 유리에 담겨 있었다.
두렵지 않냐고?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냐?
천중명은 빌딩 숲 위로 펼쳐진 서울의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천상기와 강승애와 맞붙으며 주식 거래를 훈련했고, 홍콩물고기를 상대하며 파생상품과 프로그램 매매를 익혔다. 리온자동차와 대송자동차그룹을 인수하면서 더러운 싸움도 해봤고.
“훈련이라면 멋지긴 하네요.”
천중명이 하늘을 향해 픽 웃었을 때였다.
“회장님. 유진교 부회장은 출근해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내려가실 거라고 통보했고, 커피도 준비했습니다.”
부속실 직원의 보고가 뒤에서 들렸다.
“가볼까?”
“네, 회장님.”
천중명이 집무실을 나서자 집무실 직원 한 명과 비서실 직원 한 명이 앞서 움직였다. 물론 그 뒤로 커피를 준비한 부속실 직원이 따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생스러운데 모처럼 기분 내고 싶어서.”
천중명의 농담에 부속실 실장이 세련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비서실 직원이 빠르게 움직여 미래발전본부의 문을 열었고, 천중명이 들어설 때는 직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나와 있던 유진교와 공정규가 대표로 인사했다.
“커피 한잔 함께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번거롭게 했나 보네요. 직원들에게 커피 정도는 괜찮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천중명이 이렇게 나선 의미를 유진교는 알아차린 눈치였다. 커다란 싸움을 시작하는 월요일이란 의미를 말이다. 그는 넉넉한 미소로 인사한 뒤에 부회장의 방으로 천중명을 안내했다.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놓아주고 나간 다음이었다.
“회장단 회의는 내일 오전 10시로 준비했습니다.”
커피를 마시기도 전에 유진교가 회장단 회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만큼 일정이 급하다는 의미였다.
“투자 진행은요?”
“말씀하신 대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리츠를 제외하고는 이번 주 수요일 내로 모두 마무리하겠습니다.”
“됐네요. 지경증권을 시작으로 작은 회의가 있습니다. 점심 이전에 일정과 자료를 올려주세요.”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천중명이 고개를 돌려 중간에서 장식처럼 앉아 있는 공정규를 보았다. 그는 아직 천중명이 어려운 눈치였다. 최만호가 농담에 웃음을 보일 때까지 얼마나 걸렸더라?
“차 마셔요.”
“예, 회장님.”
커피를 마신 것으로 존재감을 증명한 공정규가 잔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회장님. 이영공영이라는 회사를 아십니까? 이현국 회장이 회장님께 인사드린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글쎄요?”
“토요일에 백화점에서 따님과 인사를 나누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모님 친구분이라고.”
“아!”
천중명은 웃으며 그날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하마터면 재혼이 될 뻔했지 뭡니까? 그런데 그런 연락을 했던가요?”
“지경그룹 지정회사로 선발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보고였다.
사람을 그렇게 깔보는 태도를 보여놓고 집에 가서 뭐라고 했길래 아버지란 사람이 또 기대에 차서 전화를 했을까.
“규정대로 처리하세요.”
“예, 회장님.”
천중명의 표정을 읽은 유진교가 차가운 눈으로 답을 내놓았다. 9시가 다가오고 있어서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
곽대출은 주인영 부장을 비롯해 직원 전체를 회의실로 불렀다. 커피와 차가 담긴 종이컵을 앞에 놓았는데, 모두가 모인 탓에 회의실이 비좁았다.
“오늘부터 각자 맡은 파트에서 가능성 있는 회사를 엄격하게 선별해. 그리고 이 시간 이후로 지원 나가는 돈은 우리가 직접 결재하는 방식을 택하거나 아니면 결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해.”
직원들이 빠르게 메모를 적어나갔다.
“만약 부당하게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한 흔적이 나오면 바로 조치하고. 우리가 지원하는 자금은 회사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이다.”
회의라기보다는 새로운 업무방침 전달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지금까지 5천억 원이었던 우리 벤처사업부의 운용 자금을 1차로 3조 원까지 늘릴 예정이니까 그렇게 알고.”
메모하던 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2차, 3차까지 총 9조 원의 자금을 가져올 텐데 이 모든 자금의 흐름을 내가 그룹 회장님께 직접 보고할 거야. 부당지원, 허술한 관리가 나올 경우 엄격하게 책임을 물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곽대출은 시선을 주인영에게 돌렸다.
사랑하는 사이? 믿는 사람? 그런 것 없이 벤처사업부의 본부장이 부장을 바라보는 냉정한 표정이었다.
“주인영 부장은 내가 자리에 없을 때 알아서 급한 자금을 알아서 집행해.”
“예, 본부장님.”
주인영이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답했다.
**
지경저축은행에 나머지 저축은행의 지점장들을 불러모은 박승양은 킁킁거리며 유자차 병을 테이블에 올렸다.
그가 병에서 유자차를 떠내 종이컵에 담을 때마다 이상하게 지점장들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박승양의 눈빛이 얼마나 야비하게 빛나는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쪼르륵.
전기 포트를 든 박승양이 의식을 치르듯이 경건한 태도로 종이컵에 물을 따랐다. 냄새는 기가 막힌데 분위기는 독약을 제조하는 흑마법사, 딱 그런 느낌이었다.
“마셔.”
김도정까지 다섯 명에게 잔을 건넨 박승양이 테이블 주변을 돌아보았다. 세모꼴로 빛나는 눈에 입술이 얇아서 이럴 때 박승양은 정말 승냥이처럼 보인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야. 그렇지?”
가뜩이나 분위기도 험악한데 잔을 드는 지점장들과 김도정을 향해 박승양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사채 바닥에 꼬마로 생활할 때 말인데, 나랑 라이벌인 놈이 하나 있었어. 그놈이 수완은 정말 좋았거든. 뭐해? 차 마셔.”
다섯 명이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선수처럼 일정한 동작으로 종이컵을 들었다가 다 함께 내려놓았다.
“그런데 말이지. 그놈이 어느 날 전주들 심부름이라는 핑계로 돈을 긁었거든. 그렇게 모은 돈 3백억 원을 들고 중국으로 쓩! 알지? 떴다, 떴다, 비행기! 중국! 쓩!”
이곳에 있는 지점장들은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요란했던 일이었다. 다만, 박승양이 그 사람의 라이벌이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전주들이 신고를 안 했어요. 그리고 돈을 모아서 깡패를 보냈거든. 어떻게 됐을까?”
이후의 일은 정말 모른다. 그대로 덮어졌기 때문이었다.
“돈은 10억 원 빼고 모두 회수! 그놈은 눈알 두 개와 혀를 먼저 빼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양팔을 반, 여기! 응? 여기 팔뚝까지 딱 반을 자른 뒤에 조선족에게 넘겼어. 차 마시라니까!”
이제는 유자차에서 아예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다섯 명은 그걸 거절하지 못하고 약을 삼키는 얼굴로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늘부터 대출은 10원짜리 하나 모두 내게 결재받은 뒤에 해. 알았어? 내가 바빠서 연락이 안 되면 그냥 하지 마. 실적?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런데도 사람이 참 묘해서 정에 끌리고 돕고 싶어서 하지 말란 짓을 할 때가 있거든.”
시선을 든 박승양이 어쩐지 바보처럼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래서 더 무섭게 느껴지는 얼굴로 소리 없이 웃었다.
“숨겨진 진실을 두 개 알려주지. 하나는 그때 깡패를 데리고 중국에 갔던 게 나고.”
다섯 명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그 라이벌이란 놈이 내 사촌이었어. 작은아버지의 아들.”
박승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들 딱딱하게 굳었다.
“앞으로 지점마다 2조 원씩 돈이 들어갈 텐데, 갑자기 늘어난 돈에 눈이 뒤집히면 나랑 중국 여행을 가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 니 하오? 니더 하오? 응? 중국?”
숨을 천천히 들이마신 박승양이 상체를 소파에 기댔다. 그래놓고 그는 히죽 웃었다.
**
송문철은 오전 10시에 천중명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서 오세요.”
소파를 가리킨 천중명은 그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차를 앞에 둔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협탁에 올려놓았던 결재판을 송문철에게 내밀었다.
“홍콩에 만든 법인 계좌 다섯 개입니다. 계좌번호, 비밀번호, 모두 들었습니다.”
송문철은 결재판을 펼치지 못한 채 눈으로 보기만 했다.
“오늘 오후에 다섯 개의 계좌로 5조 원씩 모두 25조 원이 입금될 겁니다. 금액은 미화로 입금될 테니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 회장님.”
송문철이 굳은 얼굴로 답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야 월요일의 무게를 실감한 사람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그 계좌를 통해 외환 거래를 할 겁니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네 번에 걸쳐 총 1백조 원까지 입금할 생각입니다.”
말로만 듣던 것과 당장 25조 원, 최고 1백조 원이 들어올 계좌를 앞에 둔 것은 비교하기조차 다른 무게였다.
“방어해야 할 포지션은 정해드릴 겁니다. 내일부터 딜링룸은 24시간 대기로 돌아가고, 계좌와 자금은 최대한 비밀이 유지될 수 있도록 관리하세요.”
“회장님. 방어 포지션이라고 하시면 1백조 원의 돈이 모두 그곳에 쓰인다는 말씀이십니까? 수익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방어입니까?”
“그렇습니다.”
“후우-!”
천중명의 묵직한 답을 들은 송문철이 기다란 숨을 토해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금액이 너무 크다 보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가 봅니다.”
“이해합니다.”
숨을 한 차례 더 내쉬었던 송문철이 고개를 들어 천중명을 보았다.
1백조 원?
실감도 나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걸 환율 방어에 쓴다고?
천중명이 왜 처벌을 각오했는지 이해됐고, 반대로 그런 돈을 이렇게 사용한다는 젊은 회장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미국 국채가 시장에 나왔습니다. 내일 미국 금리가 상승하고 그 뒤에 또다시 미국 국채가 시장에 나오면 그때가 시작입니다.”
“예, 회장님.”
송문철은 고개를 떨궈 결재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를 천중명이 묵묵하게 지켜봐 주어서 잠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송문철이 고개를 들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장님. 다른 건 몰라도 비밀을 유지하는 것과 지시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 두 가지는 약속드립니다.”
“차 드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송문철은 얼결에 커피를 덥석 입으로 가져갔다가 움찔했다. 그나마 식어 있길래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그 모습에 천중명이 웃었고, 송문철이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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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기는 책상에 산더미처럼 서류를 올려둔 채 엄지에 고무까지 씌운 채 자료를 넘겼다.
최근 법원에서 낙찰되는 평균 경락률을 지역별, 물건별로 살피고, 나오는 물건의 동향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책상 옆으로는 숨통이 막힌 프로젝트 파이낸싱 물건이 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엉뚱한 산속에 놀이시설과 수영장을 만든다는 계획서는 펼칠 필요도 없다. 대신 역 앞이나 사거리 중심에 있는 땅들을 중점적으로 살폈다.
“일로 눌러서 죽이려는 거야, 뭐야! 이걸 어떻게 혼자 다 하냐고!”
서류를 들여다보던 천상기가 독이 잔뜩 오른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형이 우선 해결해야 할 담보대출이 20조 원이야. 월세, 전세 살다가 쫓겨나는 사람들, 억울하게 땅을 뺏기는 사람들, 이 중에서 알짜배기를 골라내서 살려내.’
천중명이 건넸던 말이었다.
‘과거에 잘못 살았던 과정이 어쩌면 이번 일을 제대로 하게 만들려는 훈련이었을지 몰라.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리는 사람들을 구해내. 아이들 손을 잡고 길거리로 나 앉는 가족을 지켜.’
“동생회장님, 나 열심히 따라간다, 진짜!”
천중명의 지시와 그 날카롭던 눈빛을 떠올린 천상기가 다시 서류에 고개를 묻었다. 천중명에게서 넘치던 의지가 천상기의 어깨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