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
289. 회장님은 확실히 좀 특별하십니다 (1)
토요일 오후 3시에 회색 정장과 셔츠 차림의 민세조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어서 오세요? 갑갑한 사무실보다 이곳이 좋아서 모셨는데 불편하시면 아래에 회의실이 있습니다.”
그와 악수를 나눈 천중명은 함께 올라온 곽대출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곳 벤처사업부 곽대출 본부장입니다. 수석님을 만난 사실이 본부장의 입을 통해 외부에 알려진다면 그건 제 책임입니다. 본부장? 민세조 청와대 경제수석.”
두 사람이 악수로 인사를 나눈 뒤에 곽대출이 커피를 준비하기 위해 움직였다.
“편하게 나왔다가 바로 오는 바람에 복장이 이렇습니다.”
“갑자기 드린 연락이었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 민세조가 고맙다는 표정을 보이며 곽대출이 건네준 종이컵을 받았다.
“저는 내려가 있겠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표정을 어딘가에 구겨 넣은 곽대출이 묵직하게 인사한 뒤에 옥상문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회장님은 확실히 좀 특별하십니다.”
“믹스 커피가 서운하셨나요?”
“하하하.”
농담을 알아들은 민세조가 이제야 적응된 얼굴로 자세를 좀 더 편하게 가져갔다.
“담배 하세요?”
“아닙니다. 편하게 하십시오.”
천중명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를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곳에 왔을 때처럼 편할 때나 집무실에서 가끔 합니다.”
“회장님도 사모님이 어려우십니까?”
두 번째 만남이었다. 첫 번째와 다른 여유가 있었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넉넉함이 필요했다.
“그보다는 냄새를 맡게 하고 싶지 않았고, 나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걸 원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민세조가 ‘농담이었는데?’ 하는 약간은 억울한 표정으로 웃었다.
“회장님. 정부에서 협조할 일이 어떤 종류인지 확실하게 알고 싶습니다.”
그런 뒤에 그가 본론을 꺼내놓았다.
“하나씩 정리하죠. 우리는 자금이 모두 들통나 있습니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규모, 정부가 가진 규모, 모두 그렇습니다. 게다가 정부가 함부로 환율 문제에 뛰어들기도 어렵죠. 그 부분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민세조가 종이컵에 남은 커피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행권은 대출을 규제받습니다. 저축은행에서 자금을 돌리기도 한계가 분명하고요. 그러니 마지막에 동원할 곳은 대부업밖에 없습니다. 초반에 이자율이 치솟는 순간부터 일정 수준이 될 때까지 지경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흐음.”
이제야 내용의 심각함을 짐작했는지 민세조가 나직하게 신음을 뱉어냈다.
“회장님 말씀대로라면 외국계 대부업체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겠군요.”
“우리가 먼저 움직이면 제대로 맞서보기도 전에 자금이 바닥나니까요.”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대출이 많은 중산층이…….”
말끝을 흐린 민세조가 고개를 저었다.
“다음 주 수요일에 시작할 거라 봅니다. 은행과 저축은행에서 대출받은 사람들은 그나마 경매개시 때까지 버틸 여력이라도 있겠지만, 일용직과 월세, 그리고 현재도 한계에 있는 서민들이 줄줄이 무너질 겁니다.”
“자영업자와 소규모 기업체도 문제겠군요.”
“그렇겠죠.”
문제는 충분히 알았다. 지금까지 지겹게 살피고 살폈던 일이었니까.
“정부가 도움 드릴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불법적인 거래가 있을지 모릅니다.”
덤덤하게 말을 듣던 민세조의 고개가 퍼뜩 들렸다.
“외환과 파생상품에서 규정을 모두 지키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제가 도움 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언론이나 검찰의 움직임에 제동을 건다는 것은…….”
민세조가 고개를 저어가며 부정적인 대꾸를 내놓았다.
“알고 계셨으니 됐습니다. 검찰과 언론은 제가 알아서 할 텐데 당장 정부 차원에서 조사를 약속한다거나 하는 일만 없었으면 싶습니다.”
“외환과 파생상품 거래라고 하셨습니까?”
“예.”
종이컵에서 시선을 든 민세조가 저 앞에 펼쳐진 탄천을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배고프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천호득 회장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유학을 가고 싶었는데 가족들이 걱정이었을 때는 생활비, 유학에 필요한 경비까지 도와주셨었습니다.”
흘러버린 과거의 흔적을 탄천에 깔아놓은 것처럼 그는 아련한 눈빛이었다.
“꼭 한 가지를 들어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이 전부였는데…….”
민세조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천중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그의 머리와 재킷 어깨에 올라탄 오후의 햇살이 진한 그림자를 추상화처럼 멋지게 그려낸 시간이었다.
“회장님은 돈 만 원이 아쉬워 본 적 있으십니까?”
“글쎄요.”
있지. 병원비를 만들기 위해 피눈물 나게 돈을 만들려는 시기가. 그런데 그런 사연을 말할 수는 없어서 천중명은 적당하게 답을 건넸다.
“여름이었습니다. 정말 더운 날이었고, 배가 고팠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데 칡냉면 5천 원이라고 가게 간판에 붙여 놓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었습니다.”
말을 하다가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는지 민세조가 마른침을 삼킨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미치게 먹고 싶었습니다. 주머니에 6천 원이 있었거든요. 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는데 내일 써야 할 버스비, 집에서 더위에 허덕일 부모님을 생각하니까 도저히……. 그때 집까지 가는 길이 왜 그렇게 서럽던지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시선을 떨구고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회장님. 의지대로 하십시오. 제가 목을 걸고 매달리겠습니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제가 그때 느꼈던 비참함을 한 명이라도 덜 느끼게 부탁드립니다.”
경제수석이라는 사람이 눈이 붉어진 채 전하는 당부였다. 당시에 서럽게 울던 감정,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 그의 눈에 넘치도록 담겨있었다.
“부모님은 지금 어떠세요?”
“망고 정말 좋아하십니다. 매주 드신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엉뚱한 대답에 천중명이 웃음을 터트렸고, 표정을 수습한 민세조가 따라 웃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뭐가요?”
“이렇게 나서주신 것 말씀입니다. 돈의 유혹을 밀쳐내신 것도요.”
“그럼 상황에 따라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세조가 함께 몸을 일으킨 천중명과 악수를 나눈 뒤에 계단을 향해 움직였다.
괜찮지, 저 사람?
또다시 사람 욕심이 올라온 천중명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
허선영이 마당에 차를 세우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송순주가 현관을 나섰다. 웃긴다. 분명 혼자라고 전화 통화를 했는데도 혹시나 싶어 조수석과 뒷자리, 그리고 입구 골목을 둘러보는 송순주의 모습이 말이다.
“왔니? 쉬지 않고 뭐하러 와?”
운전석에서 내린 허선영은 트렁크로 움직여 선물과 케이크를 꺼냈다.
“이게 다 뭐야?”
“생신이잖아요.”
둘이서 그렇게 안으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시계 상자를 먼저 풀었고, 이어서 옷을 입어보았으며 다음으로 둘이서 케이크를 앞에 두었다.
“쉬는 날인데 천 서방이 쉬지도 못하고 피곤해서 어쩌니.”
“천 서방?”
“그럼 뭐라고 불러?”
이런 행복한 날이 오리라 기대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었다. 즐겁기도 하고, 예전의 삶이 꿈처럼 아득한데, 그게 또 고마워서 울컥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케이크에 초를 꼽은 허선영이 불을 붙여주자 송순주가 곱다랗게 불었다.
“생신 축하드려요, 엄마.”
둘이서 케이크를 잘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천중명이 없어서 아쉬운 반면에 둘만 있어서 좀 더 편한 느낌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사를 해야 할까 봐.”
“이사를요?”
송순주가 “음! 맛있다!”하는 감탄사를 터트린 뒤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친척 쪽에서 연락 오는 거야 어쩔 수 없는데 여기 알던 사람들이 자꾸만 이것저것 부탁하는데 매번 거절하기도 미안하고, 심지어 한 다리 걸쳐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옆집에 광남이 할머니 아들이 사업한다는데 어제 왔었어. 좋은 사업인데 벤처사업부인가 다리를 놔주거나 아니면 너한테 연락해서 지경에 연결시켜 달라고.”
거절할 때의 송순주 속이 또 얼마나 불편했을까.
허선영은 송순주의 손을 잡아주었다.
“외삼촌도 마찬가지고. 속없이 사업한다고 하길래 아예 인연 끊자고 잘라버렸다.”
“엄마 마음이 많이 안 좋았겠네.”
송순주가 오른손을 움직여 허선영의 손을 덮었다.
“난 괜찮아. 그러니까 행복하게 살아. 내가 딸의 짐이 될까 봐 걱정이지 엄마는 더 바라는 거 없어.”
왜 그런지 허선영은 송순주의 독백 같은 바람을 듣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져서 상체를 기울였다. 세월을 어느 정도 떠나보낸 엄마와 제 자리를 찾아서는 딸은 그렇게 안고서 서로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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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조가 간 뒤에 전화를 받은 황성규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간단한 인사가 있었고, 커피를 앞에 둔 황성규가 곧바로 자료를 꺼내놓았다.
“윤만석 선배가 알려준 내용입니다.”
그런 뒤에 황성규는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솔직하고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이 정도면 현금으로 얼마 정도 될까요?”
“대략 20조 원 정도 될 거라고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러면 우리와 저쪽의 방법이 비슷하다고 봐야겠네요.”
“예?”
“인공지능 거래 프로그램, 파생상품, 환율, 감춰놓은 결정적인 자금, 그리고 정보조직까지 똑같은 방식이니까요. 누가 더 냉정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얼마나 발 빠르게 움직이느냐의 싸움만 남은 거거든요.”
황성규가 놀란 눈으로 천중명을 보았다.
“편하게 생각하세요. 노리는 돈이 조 단위여서 그렇지 몇 백만 원을 가지고 파생상품 거래를 하더라도 결론은 같습니다. 주식이나 파생상품에서 수익을 얻는 유일한 방법 아시죠?”
“죄송합니다, 회장님.”
황성규는 아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압도적으로 많은 자금을 가지고 흔들면 끌려오게 되어 있거든요. 자금이야 우리가 확실히 부족하니까.”
황성규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웃은 천중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금이 부족한 우리는 표정 관리를 하면서 출발해야죠. 우리가 숨겨놓은 패가 엄청난가 싶어서 겁을 먹게요.”
“회장님은 정말 두렵지 않으십니까?”
스웨터 차림의 천중명이 탄천을 향해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 싸움에서 지면 결과는 확실합니다. 선진국으로 향하다가 주저앉은 다른 나라들이 답이 되겠죠. 정치, 경제가 한 30년쯤 후퇴한다고 생각하면 적당하지 않을까요?”
황성규의 질문에 천중명은 먼저 엉뚱한 대꾸를 내놓았다.
“그 부분만 막아도 우리는 성공한 겁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에서 투자받은 돈을 우리 국민 전체와 나누면 얼마나 돌아갈 것 같습니까?”
“갑자기 그러시니까 계산이…….”
“그 짐을 우리가 대신 짊어지는 거죠. 복잡할 거 없습니다.”
“우리가 이기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가, 황성규는 연달아 이어지는 뜬금없는 대화에 정신을 못 차리는 얼굴이었다.
“정보를 찾아주세요. 모사드보다 정확한 정보를요.”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단하게 답을 한 황성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드시고 가시죠?”
“아닙니다. 확인할 것이 몇 가지 있어서 지금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황성규가 옥상을 빠져나간 뒤였다.
“회장님?”
사각틀에 매달린 넝쿨이 자잘한 그림자를 흔드는 옥상으로 곽대출이 들어섰다.
“다 끝나셨으면 저녁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주인영 부장은?”
“가양동 집에 일이 있어서 아까 출발했습니다.”
답을 건넨 곽대출이 천중명의 곁으로 다가와 벤치에 앉았다.
“이제 정말 다 끝났나 보다. 준비는.”
천중명의 표정을 본 곽대출이 픽 웃었다.
“이렇게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해내는 걸 보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그냥 기본대로 가는 거야. 그걸 안 지키는 인간들이 모자란 거지, 내가 뛰어난 게 아니니까.”
“에이! 말이 그런 거지, 아무리 내가 기본을 지킨다고 거대자본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곽대출이 말을 끝으로 표정을 바꿨다.
“저녁은 갈비나 삼겹살, 어떠십니까?”
“우선 나가자. 그리고 박 회장에게 연락 좀 해. 저녁 먹고 보자고.”
천중명의 말을 끝으로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어이쿠! 회장님!”
과장된 표정으로 박승양이 불쑥 옥상문을 통해 나타났다.
“어쩐 일이세요?”
“회장님이 계신 줄은 몰랐고, 문이 열려 있길래 본부장을 잠시 만날까 해서 왔습니다.”
“저를요? 무슨 일이신대요?”
“대치동에서 전주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인데 저녁 시간이 됐지 뭡니까? 저녁 드실 것 같아서요.”
어차피 연락하려던 참이었다. 그건 그건데 저녁거리로 도깨비를 선택한 승냥이를 천중명은 살면서 처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