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288. 조심하긴 해야지 (3)
누구는 유대 자본을 상대로 아등바등 모든 것을 걸고 싸우려는 마당에 몇 푼 더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꼴같잖은 짓을 해대는 인간이 눈앞에 있었다.
없는 살림으로 결혼해서 열심히 살다가 모처럼 하루 나왔던 거라면 저 돼먹지 못한 눈빛과 말투, 태도에 얼마나 서럽고 서글펐을까.
“나오셨습니까,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백화점 사장이 인사한 뒤에서 쇼핑헬퍼와 직원, 그리고 연달아 달려온 임원들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좌우를 돌아보는 이화영의 뒤편에서 세 명의 여자들이 얼른 빠지라며 손짓과 눈짓을 마구 날리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살짝 비켜난 곳이었다.
이쪽 상황을 알아차린 매장의 매니저들이 우르르 나와서 양손을 붙잡은 채 통로에 서 있어서 자리를 정리하는 것이 좋았다.
“조용히 돌아보고 가려던 게 오히려 번거롭게 했네요. 괜찮으니까 그냥 올라가세요. 나는 장모님 선물 하나 구입하고, 지하에서 식사한 뒤에 갈 테니까.”
얼결에 밀려난 이화영의 귀에 대고 여자 한 명이 뭐라고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괜찮으면 지하에 연락해서 식사할 공간을 부탁할까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는 혹시 필요하신 게 없으십니까?”
천중명의 감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평소의 허선영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회장님과 내가 마실 커피 좀 부탁드려요.”
“예, 사모님.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편안한 쇼핑 되십시오.”
사장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순서를 기다리는 것처럼 임원들이 인사를 전하고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아직 쇼핑헬퍼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가세요. 괜찮으니까.”
천중명의 지시를 받은 헬퍼가 공손한 인사와 함께 몸을 돌리는 것으로 주변이 정리되었다. 그제야 천중명은 이화영을 향해 제대로 시선을 주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쇼핑 즐기고 가세요.”
“예. 감사합니다, 회장님.”
천중명이 건넨 인사에 이화영이 내놓은 대꾸였다.
그사이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어쩌면 눈빛까지 그리 공손하게 변하는 건지, 그녀의 눈에 담긴 감동과 부러움, 시샘이 추하게 느껴져서 천중명은 매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들러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우리 지경백화점 많이 이용해줘.”
“그럼! 우리는 지경이지! 조심해서 가.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고마워.”
인사를 마친 허선영이 다가오자 천중명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신경 쓸 것 없어요. 강남에 빌딩 있는 아버지 믿고 평소에도 저러고 다녔어요.”
“난 괜찮아. 재혼도 아니고.”
허선영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
‘빨래 끝!’ 이라고 만세를 부른 뒤에 돌아섰는데 침대 아래에서 케케묵은 양말과 속옷이 주섬주섬 나올 때의 불쾌함 정도 되겠다. 기가 막혀서인지 팀원들을 불러 모은 황성규는 머리에 꽃 꽂기 직전의 사람처럼 어설프게 웃었다.
“윤만석 선배가 아무래도 프리 롤로 움직이는 눈치다.”
황성규는 윤만석에게서 받은 자료를 테이블에 올려놓았고, 이어서 들었던 내용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제대로 바보짓 한 꼴입니다.”
“내 심정이 그래.”
“회장님께 보고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걸 보고하든, 추가 조사를 마친 뒤에 하든, 알아서 하란 의미라고 봤다. 그런데 내 생각은 이 내용을 먼저 회장님께 보고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한두 마디를 나눈 다음이었다.
“자! 긍정적으로 보자. 우리가 적의 아픈 곳을 잡아낸 건 분명해. 그러니까 이제는 숨겨진 칼을 찾아내서 이 멍청한 꼴을 갚아줘야지.”
회의를 마치기 직전이었다.
“팀장님.”
문상훈이 조심스럽게 황성규를 불렀다.
“우리가 먼저 해킹을 해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일본에 실제 비트코인이 부족하다면 빼돌려도 제대로 떠들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갸웃했던 황성규가 의견을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장님께 보고드릴 때 그것도 함께 건의하마. 그 뒤에 움직이자.”
“예, 팀장님.”
팀원들이 일어나 돌아간 뒤에도 황성규는 입을 뒤튼 표정으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복잡할 때는 기본으로 돌아간다.’
그는 혹여 더 놓친 것은 없는지를 처음부터, 꼼꼼하게 되새겼다.
**
조양회는 양서평과 함께 두 번째로 진광효의 건물을 찾았다.
똑같았다. 첫 번째 방문과.
정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인공호수와 둥그렇게 서 있는 건물, 안내원까지 다 같았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이 달랐다.
2층에서 내린 조양회와 양서평은 복도의 기둥마다 세워진 등을 따라 왼편의 중간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정면에 있는 방도 아니고, 층수도 달랐다.
‘젠장.’
그런데도 이전에 방문했던 방과 내부가 똑같은 것을 본 조양회는 이상하게 심사가 뒤틀렸다. 속이 꽈배기처럼 꼬이든, 뒤틀렸든 겉보기에는 나름 공손하게 양서평과 조양회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삐딱하게 앉은 진광효가 손으로 테이블을 가리켰고, 두 사람이 앉기 무섭게 뚜껑을 덮어놓은 찻잔이 나왔다.
“내가 너를 불렀는데 왜 양서평과 함께 왔지?”
“제가 간이 작아서 혼자 총재님을 뵈면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 부탁드렸습니다.”
“흥. 혀로 살아가는 놈답게 말이 달구나. 내 앞에서 너무 지껄이지 않는 게 좋아.”
“명심하겠습니다.”
조양회가 고개를 숙인 다음이었다.
“거양자동차의 트럭 부분은 없던 일로 한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이제 가 봐.”
뜻밖에도 진광효는 거양자동차의 트럭만 꿀꺽 삼킨 뒤에 두 사람에게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총재님. 비트코인 채굴장, 거래소에 관해서는 뭐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하루에 한화로 1조 원을 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아직 그 건에 대한 천 회장의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트럭에 관한 결정을 그 뒤에…….”
진광효가 스윽 자세를 바로잡으며 조양회의 말을 잘랐다. 그런 뒤에 그는 지금 저 꼴을 보았느냐는 투로 주변에 서 있는 조직원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후. 내가 가등섭을 잃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고 양서평과 함께 온 모양인데 그건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화를 억누르는 얼굴로 진광효가 말을 토해냈다.
“다 알고 있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으니 솔직하게 말하지. 한국은 앞으로 한 달 내에 끝나. 끝! 끝난다고!”
홰액! 철컥!
말을 하다가 분통이 터졌는지 진광효는 옆의 협탁에서 권총을 집어 들고 조양회의 이마를 겨눴다.
“네놈이 차지한 그 잘난 대송자동차도 한 달이 지나면 우리 손에 들어오고! 잘난 척 우리 중국에 와서 거만을 떠는 한국인들 대부분이 밥을 먹여달라고 매달리게 된다고!”
총을 쏘면 양서평이 달려들고, 둘 다 죽게 된다면 진광효의 앞을 막아줄 사람이 없다. 그러니 양서평이 퉁방울만 한 눈을 부릅뜨고 옆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조양회는 이미 이마에서 피를 흘린 뒤에 물고기를 향해 끌려갔을 게 분명했다.
천중명 회장은 정말 이런 상황을 짐작해서 양서평 부총재와 함께 가라는 말을 했었을까?
“그때가 되면 한국 기업과 한국 땅 절반이 우리에게 넘어와! 그러니 내 앞에서 한국의 어린 회장의 결정이 어쩌고 하는 말 따위 다시 지껄이지 마!”
답을 해야 할까, 아니면 버텨야 할까.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답은 양서평의 입에서 나왔다.
“총재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하겠습니다.”
“흐음.”
양서평을 노려보았던 진광효가 천천히 권총을 내렸다.
“양서평. 분명하게 방향을 정하는 게 좋아. 이 기회에 홍콩처럼 한국을 지배할지, 아니면 젊은 회장에게 붙어서 함께 쓰러지든지.”
“명심하겠습니다.”
“흥! 삼합회 부총재란 인간이 기업인 흉내를 내는 꼴이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진광효가 파리 쫓듯 손을 밖으로 휘저었다.
**
백화점 지하에서 점심을 마친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안성으로 출발했다. 옷 한 벌, 천중명이 산 시계, 그리고 가격이 제법 나가는 케이크를 트렁크에 담은 채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여보세요?”
- 회장님. 황성규입니다.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급한 건가요?”
-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밤에 벤처사업부에서 보기로 하죠. 시간은 내가 전화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이 별거 아니란 투로 허선영을 보았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 전화기가 또 울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민세조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 토요일이라 죄송하지만, 시간을 부탁드립니다. 일요일까지 이견을 조율하려면 오늘 중으로 회장님과 의논을 마쳐야 합니다. 제가 다시 VIP께 보고드릴 시간을 계산해서 그렇습니다.
통화를 지켜보던 허선영이 ‘집으로 가요. 집.’하고 입 모양으로 뜻을 전했다.
“수석님. 제가 5분 뒤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 기다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이 내용을 설명하려는 참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전화기가 또 울었다.
“괜찮으니까 집으로 가요. 나 혼자 다녀올게요.”
“내일 함께 가면 어때?”
“중명 씨. 대신 이따가 밤에 알죠?”
“말은!”
“어? 나 알면서 그런다?”
천중명의 심정을 편하게 해주려는 허선영의 배려였다. 허선영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전한 천중명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회장님. 조양회입니다.
“숨 막히게 급한 일 아니면 내가 30분 뒤에 전화할게.”
-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이 미안한 얼굴로 허선영을 보았다.
본격적으로 일이 벌어지기 전에 하루쯤 시간을 내고 싶었는데 이미 그럴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다.
“나는 중명 씨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여서 정말 행복해요. 그러니까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책임지는 기업인의 모습을 보여줘요.”
천중명을 향해 허선영이 건넨 바람이었다.
“나도 존경받을 수 있는 아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허선영의 말이 고마워서 천중명은 그녀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
천중명이 벤처사업부에 들렀을 때, 뜻밖에도 곽대출과 주인영이 출근해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무슨 문제 있어?”
“어제 밀려온 지원신청서가 워낙 많아서 천천히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천중명과 함께 옥상으로 걷는 곽대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회장님. 저는 사무실에 있겠습니다.”
“그래, 주 부장.”
옥상에 올라간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커피를 만들어 벤치에 앉았다.
“주거래 은행에서 대출을 일시 중단한 모양입니다. 갑자기 자금이 필요한 업체들도 있고, 장기 계획이 삐끗한 기업들이 어제 잔뜩 몰렸었습니다.”
천중명은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은행이란 곳이 원래 그렇잖아. 맑은 날씨에는 우산을 빌려 가라고 매달리다가 정작 비가 오면 신용등급과 분위기를 핑계로 우비 벗겨가려고 달려드는 곳 아냐.”
곽대출이 답답한 투로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늘 하루라도 쉬시지?”
“모처럼 안성에 가려고 했는데…….”
천중명은 연달아 있었던 전화를 설명했다.
“먼저 조양회와 통화 먼저 하고.”
그런 뒤에 휴대 전화기를 들어 조양회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조양회입니다.
통화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 그런 상황이라 우선 회장님께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물러났습니다. 양 부총재는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결정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천중명은 탄천을 향해 시선을 들고서 입을 열었다.
“양서평 부총재 옆에 있어?”
- 그렇습니다, 회장님.
“지금 물어봐. 진광효가 죽으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
- 예, 회장님.
놀랐는지 멈칫한 뒤에 답이 있었고, 이어서 중국어가 들렸다.
- 자신 있답니다. 그리고 진광효 총재가 죽는다고 해도 내부에서 일어나는 충돌은 어쩔 수 없다는 말씀을 전해드리랍니다. 아무래도 반항하는 인원이 있게 됩니다.
“조양회 대표. 그렇다면 밑 작업을 하라고 전해줘. 진광효는 죽는다.”
아까보다 좀 더 긴 침묵 뒤에,
- 알겠습니다, 회장님.
굵직한 조양회의 답이 있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에게 곽대출이 담배를 건넸고, 이어서 라이터를 켜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회장님 말을 듣고 있으려니까 흥분돼서 그러지요! 진광효는 죽는다! 미치겠네, 진짜!”
“미친놈.”
담배를 손에 든 채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웃었다.
웃음이 한 차례 지나간 다음이었다.
“손에 피 묻힐 생각하지 마라.”
천중명은 곽대출을 향해 분명하게 뜻을 밝혔다.
“그럼 어떻게 진광효를 잡으시려고?”
곽대출의 반문에 대한 천중명의 답은 속 깊어 보이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