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287. 조심하긴 해야지 (2)
만찬이 끝나고 우즈만과 마타르를 배웅한 천중명은 대기하던 승용차로 걸음을 옮겼다. 유진교와 천상기, 새로운 기획실장 공정규가 함께 걷고 있었다.
“부회장님. 다음 주에라도 회장단 회의를 했으면 싶은데 서두르면 언제가 될까요?”
“계열사 부회장이 대신 참석해도 된다면 다음 주 화요일쯤이 적당합니다.”
호텔 앞에 몰려있는 기자들 때문에 더 긴 대화를 하기는 어려웠다.
“그럼 그날로 부탁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통화로 의논하죠.”
“들어가십시오, 회장님.”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천중명이 뒷좌석에 올랐고, 곧바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서울은 발전했고, 풍요로워 보였다.
바쁘게 걷는 누군가는 단돈 몇만 원이 아쉬울 수 있고, 추레한 옷을 입은 저 아저씨가 사실은 박승양이 챙기는 돈줄일 수 있는 도시가 서울이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내일과 모레, 이틀간의 주말을 보내고 나면 상황이 벌어질 테고, 굶주린 늑대처럼 거대자본이 달려들 게 분명했다.
삼성동 빌라에 도착한 천중명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을 때, 허선영은 집에 있었다.
“우리 회장님, 오늘 멋있어요!”
“봤어?”
“뉴스에 나오던데요?”
반갑게 맞아준 허선영이 천중명의 얼굴을 살폈다.
“피곤해 보여요.”
“나 간단하게 씻고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오랜만에 산책 어때?”
“괜찮겠어요? 중명 씨가 피곤해하는 거 처음 보는데?”
“힘을 보여줘?”
“말은!”
“어? 알면서 그런다?”
허선영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으며 천중명의 어깨를 잡아 방향을 돌렸다.
“얼른 옷 갈아입어요. 산책해요.”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천중명은 모처럼 허선영과 함께 탄천을 향해 걸었다. 밤 10시가 조금 넘어서 가로등마다 날파리와 나방들이 힘차게 날아들고 있었다.
이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조심하긴 해야지.”
천중명의 혼잣말에 허선영이 힐끔 시선을 주었다.
“지금처럼 선영 씨를 안다고 생각할 때 더 조심해야 한다고. 내 마음 알겠지 하다가 오해가 생기면 서운하잖아.”
커다란 눈에 미소를 담은 허선영이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이 들어 머리가 하얗게 변한 뒤에도 허선영과 이렇게 걷는다면 탄천의 이 산책로가 흐르는 세월쯤 되겠다.
“다음 주가 지나면 그다지 친하지 않은 곳에서도 돈을 빌려달라고 연락 오는 곳이 있을지 몰라.”
천중명의 말에 허선영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이마에 땀이 살짝 올라와 있었다.
“가능하면 거절하고, 혹여나 건네게 된다면 받을 생각을 포기하는 게 좋아.”
“중명 씨와 결혼하면서 나는 인간관계가 거의 끊겼어요.”
조심스럽게 건넨 조언에 시원한 대꾸가 돌아왔다.
“기억도 안 나는 동창부터 그나마 연락하던 친구들까지 지역 행사, 자선사업, 개인사업에 지원이나 투자해 달라는 요청을 전부 거절했거든요.”
말은 가볍게 했지만, 허선영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안 서운해?”
“난 변함없어요. 연락 오면 통화하고, 차 마시자면 마시죠. 그렇게 나는 늘 제자리에 있는데 거절당한 사람들이 바뀌는 거죠.”
이럴 때 보면 또 허세직의 딸로 살아온 시간만큼 당찬 구석도 있다.
“회장 사모님이잖아. 이 말을 가장 많이 들었어요. 지원을 요구하는 친구들에게 재단이나 홍보실에 신청하라면 다들 그 말을 하더라고요. 아! 웃긴 말도 있었어요.”
궁금한 듯 시선을 돌린 천중명을 향해 허선영이 바로 입을 열었다.
“도와주면 알아서 인사하겠다는 말이요.”
천중명은 흐느끼듯 웃고 말았다.
“평창동 아버님이 선물해주신 시계 보고 나서 그런 말은 없어졌어요.”
천중명이 웃는 것을 보고 난 허선영이 어린아이처럼 함께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기운 내세요, 회장님.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회장님 편입니다.”
농담처럼 건넨 응원이었는데 그 어떤 말보다도 기운을 주는 느낌이었다.
“왜요?”
천중명은 허선영의 손을 부드럽게 당긴 뒤에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자, 사랑하는 사람, 그런 표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눈만 봐도, 손만 잡아봐도 감정을 나누는 사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결혼의 의미를 새삼스레 느낀 천중명이 허선영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재벌 회장님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 이건 아니다!”
또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 덕분에 피로가 반쯤 녹은 느낌도 들었다.
**
토요일 오전과 정오의 중간쯤 황성규는 사무실이 있는 건물 옆의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그런 뒤에 화장실로 향하는 뒤쪽 문으로 나가 계단을 타고 아예 내려갔다.
앞쪽에서 볼 때 계단을 내려가면 당연히 지하여야 하는데 뒤편이 언덕 아래로 내려가 있는 건물이어서 그는 곧바로 뒷길로 나섰다.
승합차였다.
슬쩍 열어둔 뒷문에 황성규가 오르기 무섭게 승합차가 바로 출발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그러네.”
승합차가 방향을 급하게 꺾는 바람에 황성규의 상체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운전석과 조수석의 바로 뒷좌석이었다.
황성규의 인사에 윤만석은 가벼운 웃음만 보여주었다.
“천중명 회장님이 부탁하신 일이 있어서.”
“회장님께서요?”
승합차는 도로의 중간을 여유 있게 달리고 있었는데 황성규가 보기에 앞에 달리는 승용차 역시 윤만석의 일행인 게 분명했다. CIA가 중요한 정보원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이걸 확인해 봐.”
황성규는 윤만석이 건네주는 자료를 받아든 뒤에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진광효가 움직인 비트코인이 홍콩을 거쳤고, 일본 거래소에서 수익을 불린 뒤에 다시 홍콩으로 돌아갔어.”
이미 조사한 내용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황성규는 진광효가 사용한 계좌까지 모두 알고 심지어 해킹할 준비까지 마쳤다.
황성규의 속마음을 읽었다는 것처럼 윤만석은 옅은 웃음을 먼저 그려냈다.
“자네가 찾아낸 것은 수익의 일부야. 거래되는 비트코인의 82퍼센트를 한 세력이 가지고 있지. 가격이 오르고 내리는 것 모두 그들이 결정해.”
“그거야 진광효가…….”
“진광효는 채굴장에서 채굴한 비트코인의 절반을 홍콩에 매각한 것으로 수익을 얻었고, 홍콩에서 다시 일본 거래소로 보내서 2차 수익을 얻었지. 자, 문제! 홍콩과 일본 거래소에서 진광효가 채굴한 비트코인을 실제로 매입한 세력은?”
“예?”
“일본의 거래소에서 거래된 것은 확인했지?”
“예, 선배님.”
마치 CIA 초장기 시절로 돌아가 국장 앞에 선 것처럼 황성규는 예의를 갖추며 답을 건넸다.
“웃기지? 실제로 비트코인을 소지하지도 않고 가격을 올렸다 내렸다는 사실이?”
황성규의 번득이는 눈을 본 윤만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거래소에는 애초에 비트코인이 절반밖에 건너가지 않았어. 없는 비트코인에 투자해서 가격을 올리고 내린 거지. 가격이 높아져 돈을 버는 이가 나오면 투자자들이 달려들고, 그럼 떨어트렸지. 고객이 손해 보고 빠져나가면 끝이지. 주식처럼 계좌에 넣어주질 않으니까.”
“리스트에 있었습니다.”
“내가 거래소를 만들었다고 치자. 자네가 투자하고. 그럼 내가 자네 기록에 매입한 비트코인 숫자만 입력해 주면 되지 않나? 증권사처럼 국가 검증을 받은 것도 아니고, 주권이 있는 것도 아니니 확인할 길도 없지.”
“그렇다면……?”
윤만석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컴퓨터 기록에는 거래 내역, 매입한 비트코인의 수량이 다 찍혀 있겠지. 그런데 정작 비트코인은 넘어오지 않았어. 가격이 폭락하면 모두 해결되니까. 만약 가격이 계속 급등한 상태에서 고객들 전체가 매각하겠다고 나오면 어떻게 하겠나?”
신호를 받아 멈춰선 승합차의 안에서 황성규는 아예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해킹당했다고 발표하겠지. 녹아 없어져서 도저히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 되니까.”
“그런……?”
“컴퓨터의 기록을 너무 믿지 마. CIA도 실제로 비트코인의 실소유주를 찾는 작업을 진행 중인데 아직 결과를 만들지 못했어.”
황성규의 눈을 들여다본 윤만석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주인 마음대로지. 매도 주문도 체결 안 됐다고 하면 그만일 정도로. 그리고 가격을 떨어트려. 한 가지 더.”
다시 달리기 시작한 승합차는 도로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일본에 있는 비트코인의 실제 수량은 기록된 것의 40퍼센트가 채 안 돼. 그렇다면 진광효가 채굴한 실제 비트코인은 어디로 갔을까?”
“현금화해야 가치를 얻지 않습니까?”
“일본에서 거래된다고 믿는 비트코인이 실제로는 홍콩에 남아서 언제고 돈으로 환전할 수 있지. 주인이 결정하는 금액에. 그 비트코인이 어디에 있을지 예상하고 찾아내.”
윤만석의 말이 맞는다면 황성규는 컴퓨터에 기록된 내용만 믿고 반쯤 얼치기 짓을 한 꼴이었다.
“미사일과 총을 쏘는 전쟁 한가운데서 숨은 비트코인은 보이지 않는 칼처럼 무서워.”
“찾아내겠습니다, 반드시.”
“자네라면 그러리라 믿는다.”
윤만석이 팔을 들어 운전석 의자의 등받이를 툭툭 치자 승합차가 다시 깜빡이를 켜며 차선을 바꾸었다.
**
평화로운 토요일 오전이었다.
천중명은 홈바에 앉아 송문철이 보내준 인공지능 거래의 기준점과 판단에 관한 내용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중명 씨. 나 백화점에 다녀올까 하는데 괜찮아요?”
천중명은 노트북에서 시선을 들어 허선영을 보았다.
“사실 다음 주에 엄마 생신이거든요. 적당히 넘어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다녀와야겠어요.”
“엇차!”
천중명은 홈바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요?”
“다음 주부터 정말 바빠질 것 같거든. 그러니 이런 데이트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연락 없이 불쑥 안성에 찾아갈 재미도 놓치기 싫고.”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사모님. 우리 지하에서 점심 먹으면 어때?”
허선영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천상기에게도 공평하게 평화로운 오전이었다.
시간 밥을 먹는 강갑수와 조호철이 전날 냉장실에 넣어두었던 한우 등심을 구우면서 쌈 채소와 맛깔나는 양념장까지 준비한 덕분에 푸짐하게 아침도 먹었다.
다음은 천상기가 질색하는 오전 청소가 간단하게 있었다.
이어서 셋이서 커피를 앞에 두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킬킬댔는데 이런 경험 자체가 천상기는 무척 생소했다.
어릴 적부터 천호득의 날카로운 표정 앞에서 밥을 먹었고, 먹고 난 뒤엔 알아서 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삶을 살았으며, 독립한 뒤로는 딱히 누구와 즐겁게 식사해 본 적 없었다.
게다가 TV를 보며 킬킬대?
“흐하하하하하.”
개그 프로를 보며 강갑수가 흐느끼듯 웃었는데 그래서인지 천상기도 태어나 처음으로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웃을 수 있었다.
“아! 미치겠다!”
심지어 강갑수는 출연자가 날리는 유행어를 따라 하며 웃음을 터트렸는데 천상기는 그 모습이 더 웃겼다.
딱히 나누는 대화는 없었다.
천상기의 빌라 역시 작지 않아서 셋이 알아서 방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런데도 강갑수와 조호철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소파에 모였고, 천상기를 챙겼다.
“흐하하하!”
“미친놈.”
“어? 형은 안 웃겨?”
강갑수는 거실 바닥으로 내려가 소파에 기대앉았고, 조호철은 왼편의 1인용 소파에 늘어진 자세였으며, 천상기는 기다란 소파에 반쯤 누운 자세였다.
창으로 햇살 들어오지, 실내 쾌적하지, TV 커다랗지, 배부르지, 당장은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섬에서 그랬던 것처럼 천상기는 이렇게 지내는 주말이 처음이었다.
**
천중명과 허선영, 두 사람 모두 편안한 차림이었다.
발렛 파킹에 차를 맡겼을 때, 아르바이트생이 차량을 안내했고, 그래서 천중명이 운전하는 승용차의 번호판을 알아보지 못했다.
모처럼 하는 데이트였다. 공연히 매니저 달려오고 소란 떠드니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먼저 1층의 시계와 귀금속 매장을 둘러보았다.
“회장님?”
“오늘은 홀가분하게 둘러볼 거니까 소란스럽게 하지 마세요. 부탁합니다.”
천중명을 알아본 매니저가 눈을 커다랗게 떴는데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저어가며 매장을 돌았고, 곧바로 여성복 매장이 있는 3층으로 향했다.
둘이서 에스컬레이터에서 막 내렸을 때였다.
“허선영? 맞지? 선영이?”
천중명, 허선영과는 전혀 다르게 요란스러운 원피스 차림의 젊은 여자가 다가왔다.
“언제 들어왔어?”
“어제. 뭐야?”
허선영의 답에 짧게 대꾸한 그녀는 심지어 깔보는 듯한 눈짓으로 천중명을 가리켰다.
편안하게 입었다고 해도 천중명과 허선영이 입은 옷이 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앞에 선 여자의 복장이 워낙 화려해서 비교되는 건 있었다.
허선영이 막 천중명을 소개하려는 순간이었다.
또래로 보이는 세 명의 아가씨들이 바로 앞의 매장에서 나오다가 천중명과 허선영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뭐 하는 사람이야?”
이런 거만한 태도는 윤세계 이후로 또 처음이라서 천중명은 새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잠시 돌린 정도였다.
“뭐예요? 사람이 말하는데?”
질문을 던진 여자가 천중명의 태도가 못마땅한 것처럼 눈을 위아래로 던졌다. 도대체 어떻게 살면 다른 사람을 항상 눈앞에 깔아볼 수 있는 건지.
“중명 씨, 인사해요. 이화영이라고 미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예요. 화영아. 우리 신랑.”
“결혼했어? 언제? 어디서?”
“그냥 집에서 했어.”
“재혼이야? 어쩌다가?”
눈빛이며, 말투며, 거만하기가 진짜.
허선영과 천중명이 함께 웃음을 참을 때였다.
“화영아! 너 왜 그래!”
뒤에 나타난 세 명이 움찔거리다가 더는 지켜보기 어려웠는지 화들짝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뒤에서 백화점의 사장과 매니저가 급하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